일연
페이지 정보
본문
○ 낙산 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 212) (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무극(無極) 일연(一然) 213)
옛날 의상법사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진신(眞身)이 이 해변 어느 굴에 산다는 말을 듣고 이곳을 낙산이라고 이름 했는데, 이는 대개 서역(西域)에보타낙사산(寶陁洛伽山-관음보살이 있다는 산 이름) 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소백화 (小白華)라고도 하였는데 백의대사(白衣大士-관음보살의 하나)의 진신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에 이것을 빌어다 이름 하였다.
의상이 재계(齋戒) 후 칠 일만에 좌구(座具)를 새벽 물위에 띄웠더니 용천팔부(龍天八部-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神將)에 시중들이 굴속으로 안내해 들어가 공중을 향해 참선을 하니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내준다. 의상이 받아가지고 물러나오니 동해용이 또한여의보주(如意寶珠) 한 알을 바치므로 의상이 받들고 나와서 다시 칠일 동안 재계(齋 戒)하고 나서 이에 관음보살의 참모습을 보았다. 관음보살이 말하기를 “좌상(座上)의 산마루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다. 그곳에 불전(佛殿)을 짓는 것이 마땅하다.” 법사가 이 말을 듣고 굴에서 나왔더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시니, 그 둥근 얼굴과 고운 바탕이 마치 천연적으로 생긴 것 같았다.
대나무가 다시 사라지자 그제서야 비로소 관음보살의 진신이 살고 있는 곳임을 알았다. 이 때문에 그 절 이름을 낙산사(洛山寺)라 하고 법사는 자기가 받은 두 구슬을 성전(聖殿)에 봉안하고 그곳을 떠났다.
그 후에 원효법사가 뒤를 이어와서 여기에 예(禮)하려고 하였다. 처음에 남쪽 교외(郊 外)에 이르니 논 가운데서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법사가 희롱삼아 그벼를 달라고 하자 여인은 벼가 영글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또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자한 여인이 월수백(月水帛-생리대)을 빨고 있다. 법사가 물을 달라고 청하자 여인은 그 더러운 물을 떠서 받친다. 법사는 그 물을 엎질러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 마셨다. 이때들 가운데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그를 불러 말하였다. “제호(醍醐)스님 [불법이 뛰어난 인물]은 그만 두시지오.” 그리고 갑자기 숨어 보이지 않는데 그 소나무밑에는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법사가 절에 도착하자 관음보살상의 자리 밑에 또전에 보았던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그제서야 전에 만난 성녀(聖女)가 관음의 진신임을 알았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하였다. 법사가 성굴(聖窟)에 들어 가서 다시 관음보살의 참 모습을 보려고 하였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나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떠났다.
그 뒤 굴산조사 범일(崛山祖師 梵日-신라 고승, 품목이라고도 한다)이 태화(太和-당나라 문종의 연호)연간(827-835)에 당나라에 들어가 명주(溟州) 개국사(開國寺)에 이르니왼쪽 귀가 없는 스님 하나가 여러 스님들 끝자리에 앉아 있다가 조사에게 말한다. “저 또한 고향 사람으로 저의 집은 명주의 경계인 익령현(翼嶺縣-양양) 덕기방(德耆坊)에 있습니다. 조사께서 다음 날 본국으로 돌아가시거든 모름지기저의 집을 지어주어야 합니다.” 이윽고 조사가 많은 승려가 오며 있는 곳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염관(鹽官-中國 杭州 鹽官縣 鎭國海昌院에 있던 齊安禪師)에게서 법을 얻고(이 일은 모두 본전에 자세히있다.) 회창(會昌-당나라 무종의 연호) 7년 정묘(丁卯-847)에 본국으로 돌아오자 먼저 굴산사(崛山寺)를 세우고 불교를 전하였다.
大中 12년 戊寅(858) 2월 보름 밤 꿈에 전에 보았던 스님이 창문 밑에 와서 말한다.
“옛날에 명주 개국사에서 조사와 함께 약속이 있어 이미 승낙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늦는 것입니까” 조사는 놀라 꿈에서 깨어 수 십 명의 사람을 데리고 익령(翼嶺) 경계에 가서 그가 사는 곳을 찾았다. 한 여인이 낙산 아래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그 이름을 물으니 덕기(德耆)라고 한다. 그 여인에게 아들 한 명이 있는데 나이가 겨우 8세로 항상 마을 남쪽 돌다리 가에 가서 놀았다. 그는 어머니에게 말한다. “나와같이 노는 아이들 중에 금빛이 나는 아이가 한 명 있습니다.” 어머니는 이 사실을 조사에게 말하였다. 조사는 놀라서 기뻐하며 그 아이와 함께 놀았다는 다리 밑에 가서 찾아보니 물속에 돌부처가 하나 있어서 꺼내어 보니 왼쪽 귀가 끊어져 있고 전에 보았던스님과 같았다. 이것은 곧 정취보살(正趣菩薩)의 불상이었다. 이에 간자(簡子-점치는 댓조각)를 만들어 절을 지을 곳을 점쳤더니 낙산 위가 제일 좋다고 하여 여기에 불전 세 칸을 지어 그 불상을 모셨다(고본에 범일의 일이 앞에 있고, 의상과 원효의 일은 뒤에있다. 그러나 상고해 보건대 의상과 원효 두 법사의 일은 당나라 고종 때 있었고, 범일의 일은 회창(會昌) 후에 있었다. 그러므로 연대가 서로 120년이나 차이가 난다. 이런연유로 지금은 앞뒤가 바뀌어 책을 꾸몄다. 혹은 범일이 의상의 문인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그 뒤 1백년이나 지나 들에 불이 나서 이 산까지 번져왔으나 오직 관음, 정취 두 성인을 모신 불전만은 그 화재를 면했고, 그 나머지는 두 타버렸다. 몽고의 병란이 있은 이후 계축, 갑인 연간(1252-54)에 두 성인의 참 얼굴과 두 보주(寶珠)를 양주성(양양)으로 옮겼다. 몽고군사가 몹시 급하게 공격하여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자 주지 선사 아행(住 持 禪師 阿行 -옛이름은 希玄)이 은으로 만든 합(盒)에 두 보주를 넣어가지고 도망하려 하였다.
이것을 절에 있는 종 걸승(乞升)이 빼앗아 땅 속에 깊이 묻고 맹세 하였다. “내가 만일 병란으로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면 두 보주는 끝내 인간 세상에 나타나지 못해서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요, 내가 만일 죽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 두 보물을 받들어 나라에 받칠 것이다.” 갑인년(1254) 10월 22일에 이 성이 함락되었다. 아행(阿行) 은 죽음을 면하지 못했으나 걸승은 죽음을 면했다. 그는 적의 군사가 물러가자 이것을 파내어 명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에게 받쳤다. 이때 낭중(郎中) 이녹수(李祿綏)가 감창사였는데 이것을 받아 감창고(監倉庫) 안에 간직해 두고 교대할 때 마다 서로 전해서 이어 받았다. 무오년(1258) 11월에 이르러 본업(本業)의 늙은 스님, 지림사(祗林寺) 주지 대선사각유(覺猷)가 임금께 아뢰었다. “낙산사의 두 보주(寶珠)는 국가의 보물입니다. 양주성이 함락 될 때, 절의 종 걸승이 성 안에 묻었다가 적병이 물러 간 뒤에 파내서 감창사에게 바쳐서 명주영 의 창고 안에 간직하여 왔습니다. 지금 명주성도 지킬 수 없으니마땅히 어부(御府)로 옮겨 모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야별초(夜別抄) 10명을 내어 걸승을 데리고 명주성에서 두 보주를 갖다가 내부(內府)에 안치해 두었다. 그때 사자로 간 10명에게는 각각 은 1근과 쌀 5石씩 두었다.
옛날 신라가 서울이었을 때, 세규사(世逵寺)의 장원(莊園)이 명주 날리군(捺李郡)에 있었는데 본사에서 스님 조신(調信) 214) 을 보내어 장원을 맡아 관리하게 하였다. 조신이 장원에 와서 태수 김흔공(金昕公)의 딸을 좋아하여 아주 반하였다. 여러 번 낙산사 관음 보살 앞에 가서 남몰래 그 여인과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로부터 몇 해가 지나 그 여인에게 배필이 생겼다. 그는 또 불당 앞에 가서 관음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생각하는 마음에 지쳐서 잠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갑자기 김씨 낭자가 기쁜 낯빛을 하고 문으로 들어와 활짝 웃으면서 말한다. “저는 일찍부터 스님을 잠깐 뵙고 알게 되어 마음속으로 사랑하여 잠시도 잊지 못했으나 부모의 명령에 이기 지 못하여 다른 사람에게로 시집갔습니다. 지금 내외가 되기를 원해서 온 것입니다.” 이에 조신은 매우 기뻐하며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녀와 40년간 같이 살면서 다섯 자녀를 낳았다. 집이 다만 네 벽뿐이고, 좋지 못한 음식마저도 계속해 갈 수 없었다. 마침내 형상이 말이 아니어서 식구들을 이끌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얻어먹고 지냈다.
이렇게 10년 동안 초야로 두루 다녀서 옷은 여러 조각으로 찢어져 몸도 가릴 수가없었다. 마침 명주 해현령(蟹縣嶺)을 지날 때, 15세 된 큰 아이가 갑자기 굶어죽자 통곡하면서 길가에 묻었다. 남은 네 식구를 데리고 그들 내외는 우곡현(羽曲縣)에 이르러 길가에 초옥(草屋)을 짓고 살았다.
이제 내외는 늙고 병이 들었다. 더욱이 굶주려서 일어나지도 못하자 열 살 난 계집 아이가 밥을 빌어다 먹었는데 다니다가 마을 개에게 물렸다. 아픔을 부르짖으며 앞에와 누웠으니 부보도 목이 메어 눈물이 몇 줄이고 흘렀다. 부인이 눈물을 씻더니 갑자기 말한다.
“내가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가 젊었으며 입은 옷도 깨끗했었습니다. 한 가지 맛있는 음식도 그대와 나누어 먹었고 옷 한 가지도 그대와 나누어입었는데 집을 나온 지 50년 동안에 정이 맺어져 친밀해졌고 사랑도 굳게 얽혔으니 가히 두터운 인연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병으로 쇠약하여 해마다 더해지고굶주림과 추위도 날로 더욱 닥쳐오는데 남의 집 곁방살이나 하찮은 음식조차도 빌어서 얻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문전에서 걸식하는 부끄러움은 산더미보다 더 무겁습니다. 아이들이 추워하고 배고파해도 미처 돌봐주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사랑이 있어 부부간의 애정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붉은 얼굴과 예쁜 웃음도 풀 위의 이슬이요, 지초(芝草)와 난초 같은 약속도 바람에나부끼는 버들가지입니다. 이제 그대는 내가 있어서 더 누가 되고 나는 그대 때문에 더근심이 됩니다. 가만히 옛날 기쁘던 일을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바로 근심의 시작이었습 니다. 그대와 내가 어찌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뭇 새가 다 함께 굶어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짝을 잃은 난조(鸞鳥)가 거울 향해 짝을 부르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추우면 버리고 더우면 친하는 것은 인정에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행하고 그치는 것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수가 있는 것입니다. 원컨대 이 말을 따라서 헤어지기로 합시다.”
조신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각각 아이 둘씩 나누어 데리고 장차 떠나려 하자 여인이 말한다. “나는 고향으로 갈 것이니 그대는 남쪽으로 기시오.” 이리하여 서로작별하고 길을 떠나려 하는데 꿈에서 깨었다. 타나 남은 등잔불은 깜박거리고 밤도 이제 새려고 하였다. 아침이 되었다. 수염과 머리털은 모두 희어졌고 망연(惘然)히 세상일에 뜻이 없어졌다. 괴롭게 살아가는 것도 이미 싫어졌고, 마치 한 평생의 소생을 다 겪고 난 것과 같아 재물을 탐하는 마음도 얼음 녹듯이 깨끗하게 없어졌다. 이에 관음보살의 상을 대하기 가 부끄러워지고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을 참을 길이 없었다. 그는 돌아 와서 해현에 묻은 아이를 파보니 돌미륵(石彌勒)이었다. 물로 씻어서 근처에 있는 절에모시고 서울로 돌아가 장원을 맡은 책임을 내놓고 私財를 내어 정토사(淨土寺)를 세워 부지런히 착한 일을 하였다. 그 후에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 알 수 없다. 의논해 말한다. “이 전기를 읽고 나서 책을 덮고 지나간 일을 생각해 보니 어찌 조신사(調信師)의꿈만이 그렇겠는가. 지금 모두가 세속의 즐거운 것만 알아 기뻐하고 애쓰고 있지만 이것은 다만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詞 를 지어 경계한다.
잠시 즐거운 마음은 이미 가버리고 快適須叟意已閑
근심 속에 남모르게 늙어버렸네 暗從愁裏老蒼顔
모름지기황량(黃粱)이 다 익기를 기다리지 말고 不須更待黃粱熟
노생은 인생이 한바탕 꿈인 것을 깨달았네 方悟勞生一夢間
몸을 다스림에 잘못됨은 먼저 정성인데 治身臧否先誠意
홀아비는 미인 꿈꾸고 도둑은 창고를 꿈꾸네 鰥夢蛾眉賊夢藏
어찌 가을날 청야몽만으로 何以秋來淸夜夢
때때로 눈을 감아 열반에 이르리오 時時合眼到淸凉
『三國遺事』
昔, 義湘法師始自唐來還, 聞大悲眞身住此海邊窟內, 故因名洛山, 盖西域寶陀洛伽山, 此云小白華, 乃白衣大士眞身住處, 故借此名之, 齋戒七日, 浮座具晨水上, 龍天八部侍從, 引入崛內, 參禮空中, 出水精念珠一貫給之, 湘領受而退, 東海龍亦獻如意寶珠一顆, 師捧出.
更齋七日, 乃見眞容, 謂曰, 於座上山頂雙竹湧生, 當其地作殿宜矣, 師聞之出掘, 果有竹從 地湧出, 乃作金堂, 塑像而安之, 圓容麗質, 儼若天生, 其竹還沒, 方知正是眞身住也, 因名其寺曰洛山, 師以所受二珠, 鎭安于聖殿而去.
後有元曉法師, 繼踵而來, 欲求瞻禮, 初, 至於南郊水田中, 有一白衣女人刈稻, 師戱請其禾,
女以稻荒戱答之, 又行至橋下, 一女洗月水帛, 師乞水, 女酌其穢水獻之, 師覆棄之, 更酌天 水而飮之, 時, 野中松上有一靑鳥, 呼曰, 休醍□和尙, 忽隱不現, 其松下有一隻脫鞋, 師旣到 寺, 觀音座下又有前所見脫鞋一隻, 方知前所遇聖女乃眞身也, 故, 時人謂之觀音松, 師欲入 聖崛, 更覩眞容, 風浪大作, 不得入而去.
後有堀山祖師梵日, 太和年中入唐, 到明州開國寺, 有一沙彌截左耳, 在衆僧之末, 與師言曰, 吾亦鄕人也, 家在溟州界翼嶺縣德耆坊, 師他日若還本國, 須成吾舍, 旣而遍遊叢席, 得法於鹽官[事具在本傳], 以會昌七年丁卯還國, 先創崛山寺而傳敎, 大中十二年戊寅二月十五日, 夜夢昔所見沙彌到窓下, 曰, 昔在明州開國寺, 與師有約, 旣蒙見諾, 何其晩也, 祖師驚覺, 押數十人, 到翼嶺境, 尋訪其居.
有一女居洛山下村, 問其名, 曰德耆, 女有一子年才八歲, 常出遊於村南石橋邊, 告其母曰, 吾所與遊者, 有金色童子, 母以告于師, 師驚喜, 與其子尋所遊橋下, 水中有一石佛舁出之, 截左耳, 類前所見沙彌, 卽正趣菩薩之像也, 乃作簡子, 卜其營構之地, 洛山上方吉, 乃作殿三間安其像, [古本載梵日事在前, 湘曉二師在後, 然按湘曉二師爾□於高宗之代, 梵日在於 會昌之後, 相去一百七十餘歲, 故今前却而編次之, 或云, 梵日爲湘之門人, 謬妄也.
後百餘年, 野火連延到此山, 唯二聖殿獨免其災, 餘皆煨燼, 及西山大兵已來, 癸丑甲寅年間, 二聖眞容及二寶珠, 移入襄州城, 大兵來攻甚急, 城將陷時, 住持禪師阿行[古名希玄]以銀合盛二珠, 佩持將逃逸, 寺奴名乞升奪取, 深埋於地, 誓曰, 我若不免死於兵, 則二寶珠終不現於人間, 人無知者, 我若不死, 當奉二寶獻於邦家矣.
甲寅十月二十二日城陷, 阿行不免而乞升獲免, 兵退後掘出, 納於溟州道監倉使, 時, 郎中李祿綏爲監倉使, 受而藏於監倉庫中, 每交代傳受, 至戊午十月, 本業老宿祗林寺住持大禪師覺猷奏曰, 洛山三珠, 國家神寶, 襄州城陷時, 寺奴乞升埋於城中, 兵退, 取納監倉使, 藏在溟州營庫中, 今溟州城殆不能守矣, 宜輸安御府, 主上允可, 發夜別抄十人, 率乞升, 取於溟州城, 入安於內府, 時使介十人各賜銀一斤·米五石.
昔, 新羅爲京師時, 有世逵寺(今興敎寺也)之莊舍, 在溟州捺李郡(按『地理志』, 溟州無내李郡, 唯有捺城郡, 本捺生郡, 今寧越, 又牛首州領縣有捺靈郡, 本捺已郡, 今剛州, 牛首州今春州, 今言捺李郡, 未知孰是), 本寺遺僧調信爲知莊, 信到莊, 上悅□守金昕公之女, 惑之深, 屢就洛山大悲前, 潛祈得幸,
方數年間, 其女已有配矣, 又往堂前怨大悲之不遂己, 哀泣至日暮, 情思倦憊, 俄成假寢, 忽夢金氏娘, 容豫入門, 粲然啓齒而謂曰, 兒早識上人於半面, 心乎愛矣, 未嘗暫忘, 迫於父母之命, 强從人矣, 今願爲同穴之友, 故來爾, 信乃顚喜, 同歸鄕里, 計活四十餘霜, 有兒息五, 家徒四壁, 藜藿不給, 遂乃落魄扶攜, 糊其□於四方, 如是十年, 周流草野, 懸鶉百結, 亦不掩體,
適過溟州蟹縣嶺, 大兒十五歲者忽餧死, 痛哭收瘞於道, 從率餘四□, 到羽曲縣(今羽縣也), 結茅於路傍而舍, 夫婦老且病, 飢不能興, 十歲女兒巡乞, 乃爲里獒所噬, 號痛臥於前, 父母爲之歔欷, 泣下數行, 婦乃□澁拭涕, 倉卒而語曰, 予之始遇君也, 色美年芳, 衣袴稠鮮, 一味 之甘, 得與子分之, 數尺之煖, 得與子共之, 出處五十年, 情鍾莫逆, 恩愛綢繆, 可謂厚緣, 自比年來, 衰病歲益深, 飢寒日益迫, 傍舍壺漿, 人不容乞, 千門之恥, 重似丘山, 兒寒兒飢, 未遑計補, 何暇有愛悅夫婦之心哉, 紅顔巧笑, 草上之露, 約束芝蘭, 柳絮飄風, 君有我而爲累, 我爲君而足憂, 細思昔日之歡, 適爲憂患所階, 君乎予乎, 奚至此極, 與其衆鳥之同餧, 焉如隻鸞之有鏡, 寒棄炎附, 情所不堪, 然而行止非人, 離合有數, 請從此辭, 信聞之大喜, 各分二兒將行, 女曰, 我向桑梓, 君其南矣, 方分手進途而形開,
殘燈翳吐, 夜色將闌, 及旦鬚髮盡白, 惘惘然殊無人世意, 已厭勞生, 如飫百年辛苦, 貪染之心, 洒然氷釋, 於是, 慙對聖容, 懺滌無已, 歸撥蟹峴所埋兒塚, 乃石彌勒也, 灌洗奉安于隣寺, 還京師, 免莊任, 傾私財, 創淨土寺, 懃修白業, 後莫知所終,
議曰, 讀此『傳』, 掩卷而追繹之, 何必信師之夢爲然, 今皆知其人世之爲樂, 欣欣然役役然, 特未覺爾,
乃作詞誡之曰.
快滴須臾意已閑, 暗從愁裏老蒼顔, 不須更待黃粱熟, 方悟勞生一夢間, 治身臧否先誠意, 鰥夢蛾眉賊夢藏, 何以秋來淸夜夢, 時時合眼到淸凉.
『三國遺事』 卷第三
---------------------
212) 『三國遺事』卷第三
213) 일연(1206,희종2~1289,충렬왕15)의 속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견명(見明)이다. 자는 회연(晦然), 호는 무극 (無極)·목암(睦庵)이다. 경주 장산군(章山郡,지금의 경산시) 출신으로, 아버지는 지방 향리 출신인 언필(彦 弼)이다.
14세 때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 대웅장로(大雄長老)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로부터 선 (禪)수행을 위해 여러 곳을 유력하였고 여러 사람들의 추대로 구산문(九山門) 사선(四選)에의 으뜸이 되었고 22세에는 최고 고시인 선불장(選佛場)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1227년(고종 14) 선불장(選 佛場)에 나아가 상상과(上上科)에 급제한 이후 포산(包山 , 경주 근처 현풍현 비슬산)의 보당암(寶幢庵)·무주암(無住庵)·묘문암(妙門庵) 등지에서 머물렀으며, 1237년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고 1246년 선사(禪師)가 되었다.
1249년 최씨 무인정권과 밀접한 유대를 가지고 있던 정안(鄭晏)의 초청으로 남해(南海) 정림사(定林社)에 머물게 되었다. 이는 일시적으로 최이에게 반발한 정안이 수선사(修禪社) 계통의 승려를 기피하여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일연을 초청한 것인데, 이로 인하여 가지산문의 승려들이 최씨 정권과 연결되어 1251년에 완성된 대장경 조판 중 남해분사(南海分司)에서의 작업에 참가하게 되었다. 1259년 대선사(大禪師)가 되었고, 1261년(원종 2) 원종의 명에 따라 강화도에 초청되어 선월사(禪月社)에 머물렀는데, 이때 지눌 (知訥)의 법맥을 계승했다. 이는 그가 가지산문에서 사굴산문(闍堀山門)으로 법맥을 바꾼 것이 아니라 원종을 옹위한 정치세력이 불교계를 통솔하기 위해 일연을 이전의 수선사 계통의 승려를 대신한 계승자로부각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연은 중앙정계와 관련을 맺은 이후, 이를 배경으로 가지산문의 재건에 힘썼다. 1268년 왕명에 의해운해사(雲海社)에서 대장낙성회(大藏落成會)를 주관하고, 1274년 비슬산 인홍사(仁弘社)를 중수한 후 왕의 사액에 따라 인흥사(仁興社)로 개명했으며, 같은 해 비슬산 용천사(湧泉寺)를 불일사(佛日社)로 개명했다.
1277년(충렬왕 3)부터 충렬왕의 명에 따라 운문사(雲門寺)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三國遺事』의 집필에 착수했다. 1283년 3월 국존(國尊)으로 책봉되고, 원경충조(圓經沖照)라는 호를 받았으나 노모의봉양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1284년 인각사(麟角寺)에서 2회에 걸쳐 구산문도회(九山門徒會)를 열었 는데, 이는 가지산문이 일연을 중심으로 고려 불교계의 전 교권을 장악한 것을 뜻한다. 1289년 7월 왕에게 올리는 글을 남기고 7월 인각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해 10월 인각사 동쪽 언덕에 탑을 세웠으니, 시호는 보각(普覺)이고 탑호는 정조(靜照)이다.
『삼국유사』 찬술을 위해 1278년에 이미 〈역대연표〉를 작성하고, 이후 그의 나이 73~76세에 운문사에서 『삼국유사』를 찬술했다. 저서로는 『語錄』 2권, 『偈頌雜著』 3권, 『삼국유사』 5권, 『중편조동오위』 2권, 『祖派圖』 2권, 『祖庭事苑』 30권, 『禪門頌事苑』30권, 『大藏須知錄』 3권, 『諸乘法數』7권 등이 있다.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11년(1285)에 일연스님이 지은 5권 2책의 역사책이다. 인종23년(1145)에 김부식을 비롯한 11명의 편사관이 왕명에 의해 편찬한 50권 10책의 기전체 사서(紀傳體 史書)『삼국사기』이다.
이 두 책은 우리 고대사 연구에 가장 귀중한 보물이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기재할 수 없는 내용과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구 의미가 크다. 왕력(王曆), 기이(紀異), 흥법(興法), 탑상(塔像), 의해(義解),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孝善)으로 항목을 나누어 고조선을부터 후삼국까지의 역사, 지리, 문학, 종교, 미술, 민속 등 문화 전반인 내용을 기술하였다.
이 글은 『삼국유사』낙산 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조에 수록되어 있다 . 조신전의 마지막에 이 전기를 읽고 책을 덮고 지나간 일을 생각해 보면 어찌 조신사의 꿈만 그렇겠는가. 지금 모두가 세속의 즐거운 일만기뻐하고 애쓰고 있지만 이것은 다만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 깨달 음을 주기 위해 쓴 글이다.
낙산은 불교의 성지이고, 깨달음의 공간이다. 낙산이란 원래 관음보살이 있다는 서역의 보타낙가산(寶陀洛伽寺)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관음보살은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을 치유해줄 뿐 아니라 모든 중생의 소원 을 해결해 주는 보살이다. 낙산의 공간적 배경을 고통과 슬픔을 깨달음의 세계로 설정하였다. 낙산사는 관음보살이 함께 하는 자비의 도량으로, 이곳과 관계된 의상과 원효는 한국불교를 발전시킨 고승으로, 두 고승의 소중한 만남은 매우 의미 있는 것으로 한국불교의 수준을 한 단계 발전시켰지만 신앙적 형태는 달랐다.
원효는 관음보살을 친견하지 못했다. 그것은 신앙적으로 말하면 깨달음이 부족해서이다. 법사들이 만난여인은 모두 관음보살의 화신이다. 원효 같은 고승이 왜 깨닫지 못했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대목이다.
논에서 벼를 베던 여인에게 벼를 달라고 청하자 여인은 벼가 영글지 않았다고 말하며 거절한다. 농경사회 에서 벼는 먹고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양식이었다. 이것을 달라는 상징적인 의미는 문화인류학적으로 본다면 여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달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속세의 욕망을 끊어야 할 스님에대한 경계로 보인다.
관음보살을 친견하기에 정성이나 성의가 부족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벼가 익으면 머리를 숙인다는 겸손이 부족했던 불자였다.
다리 밑에서 월수백을 빨고 있는 여인에게 원효가 물을 청하자 여인이 더러운 물을 떠 주자 법사가 엎질러 버리고 다시 깨끗한 냇물을 떠 마신다. 속세의 욕망을 끊어야 할 월수백을 빨고 있는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는 모습에서 법사의 의식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속세의 철없는 행동을 보고 파랑새가 ‘스님 그만 두시오’한다. 그리고는 숨어버린다. 그런데 그옆에 있는 소나무 밑에 신 한 짝 있었다. 그리고 법사는 절에 이르러 관음보살상의 자리 밑에 전에 보았던 신 한 짝을 보고 비로소 전에 만난 여인이 관음보살의 진신임을 알게 되었다. 법사는 의상이 만났던장소에서 관음보살의 진용을 친견하려 하였으나 풍랑이 심해 보지도 못하고 떠났다.
이 이야기에서 두 스님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지극한 기도와 불심으로 속세의 욕망을 끊고 불도에 정진했던 의상과 반면에 속세욕망을 끊어야할 불자가 여인을 보고 희롱하는 모습에서 인간적인 면을 느낄수 있다.
조신전 같이 꿈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은 우리 문학사에서 고대설화에서부터 시가, 수필,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표현해 왔다. 꿈을 소재로 한 작품은 민족의식과 관계있는 것으로 꿈의 서사양식은인도의 불경 ≷잡조장경≸의 「사라나비구」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 작품도 깨달음을 주기 위한 서술로 불경 속에 수록되어 중국의 육조시대나 당대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는 불경역경사업이 성행하여 당대 소설인 「침중기」에 영향을 준 것으로, 이 「침중기」를 일연스님이 읽고 조신전 창작에 영향 을 받았다.
꿈은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것으로 우리 문학사에 자주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조신으로, 이 작품은 우리 소설사에서 최초의 소설로 그 배경을 낙산으로 하고 있는 것은 불교의 성지이고 깨달음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신라말기의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모순 속에서 경제적 어려움과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민초들의 의식반영으로 사회전반적인 모순과 현상을 서술하고 있다. 이 작품은 우리 문학사에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214) 이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은 낙산으로, 낙산(洛山)이란 원래 관음보살이 있다는 서역의 보타낙가산(寶陀洛 伽山)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관음보살은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을 치유해 줄 뿐 아니라 모든 중생의 소원을 해결해 주는 보살로, 낙산의 공간적 배경은 인간의 고통과 슬픔이 없는 세계로 설정하였다. 낙산사는 관음보살이 함께 하는 자비의 도량이다. 이곳과 관계된 의상과 원효는 한국불교를 발전시킨 고승으로, 두고승의 소중한 만남은 매우 의미 있는 것으로 한국불교의 수준을 한 단계 발전시켰지만 신앙적 행태는달랐다.
의상은 재계 후 칠 일만에 좌구를 새벽 물위에 띄웠더니 용천팔부의 시종들이 굴속으로 안내해 들어가 공중을 향해 참예하니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내준다. 의상이 받아가지고 나오는데 동해의 용왕이 또한 여의보주 한 알을 바치므로 의상이 받들고 나와 다시 칠일 동안 齋戒하고 나서 이에 관음보살의 참모습을보았다. 관음보살이 “좌상의 산마루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다. 그 곳에 불당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법사가 듣고 굴에서 나오자 과연 대나무가 당에서 솟아 나왔다. 이에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시니 그 둥근 얼굴과 고운 바탕이 마치 천연석으로 생긴 것 같았다. 대나무가 다시없어지자 비로소 관음보살의 진신이 살고 있음을 알았다. 법사는 자기가 받은 두 구슬을 성전에 봉안하 고 그곳을 떠났다.
그 후 원효법사가 뒤에 와서 여기에 예하려 하였다. 처음에 남쪽 교외에 이르자 논 가운데 흰 옷을 다고대답한다. 또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니 한 여인이 월수백을 빨 고 있었다. 법사가 물을 달라고 청하자 여인은 그 더러운 물을 떠서 주자, 법사는 그 물을 엎질러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신다. 이 때 들 가운데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그를 불렀다. “제호(醍醐)스님은 그만 두시오.” 그리고는 갑자기숨어서 보이지 않았는데 그 소나무 밑에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그제서야 전에 만난 성녀가 관음의진신임을 알았다. 이런 연유로 당시의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하였다. 법사가 성굴로 들어가 다시 관음의 진용을 보려고 하였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나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떠나버렸다.
원효는 관음보살을 친견하지 못했다. 그것은 신앙적으로 말하면 깨달음이 부족해서 이다. 법사가 만난여인은 모두 관음보살의 화신이다. 원효 같은 고승이 왜 깨닫지 못했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대목이다.
논에서 벼를 베던 여인에게 벼를 달라고 청하자 여인은 벼가 영글지 않았다고 말하며 거절한다. 농경사회 에서 벼는 먹고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양식이었다. 이것을 달라는 상징적인 의미는 문화인류학적으로 본다면 여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달라는 의미로 성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속세의 욕망을 끊어야할 스님에 대한 경계로 보인다.
신앙적으로 말한다면 관음보살을 친견하기에 정서이나 성의가 부족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벼가 익으면 머리를 숙인다는 겸손이 부족했던 불자였다.
다리 밑에서 월수백을 빨고 있는 여인에게 원효가 물을 청하자 여인이 더러운 물을 떠 주자 법사가 엎질러 버리고 다시 깨끗한 냇물을 떠 마신다. 속세의 욕망을 끊어야 할 월수백을 빨고 있는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는 모습에서 법사의 의식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속세의 철없는 행동을 보고 파랑새가 ‘스님 그만 두시오’한다. 그리고는 숨어버린다. 그런데 그옆에 있는 소나무 밑에 신 한 짝 있었다. 그리고 법사는 절에 이르러 관음보살상 의 자리 밑에 전에 보았던 신 한 짝을 보고 비로소 전에 만난 여인이 관음보상의 진신임을 알았다. 법사는 의상이 만났던 장소에서 관음보살의 진용을 친견하려 하였으나 픙랑이 심해 보지도 못하고 떠나 버렸다.
이 이야기에서 두 스님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지극한 기도와 불심으로 속세의 욕망을 끊고 불도에 정진했던 의상과 반면에 속세욕망을 끊어야할 불자가 여인을 보고 희롱하는 모습은 인간적인 면을 느낄 수있다.
조신몽 같이 꿈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은 우리 문학사에서 고대설화에서부터 시가, 수필,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표현해 왔다. 꿈 을 소재로 한 작품은 민족의식과 관계 있는 것으로 꿈의 서사양식은인도의 불경 잡보장경의 사라나비구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 작품도 깨달음을 주기 위한 서술로부경 속에 수록되어 중국의 육조시대나 당대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는 불경역경사업이 성행 하여 당대 소설인 침중기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꿈은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것으로 우리 문학사에 자주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조신으로, 이 작품은 우리 소설사에서 최초의 소설로 그 배경을 낙산을 하고 있는 것은 불교의 성지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신라말기의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모순 속에서 경제적 어려움과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민초들의 의식반영으로 사회전반적인 모순과 현상을 서술하고 있다. 이 작품은 양양을 대표할 뿐 아니라 우리 문학사에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