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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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제영(洛山寺題詠) 정조어제시(正祖御製詩) 47)
취봉문 절강의 물결 마주하고 鷲峰門對浙江潮
비껴 흘러 돌다리 띄우려 하네 直欲橫流泛石橋
밤은 고요하고 달 밝은데 수님 들어와 자리 정하고 夜靜月明僧入定
하늘로 솟은 측백나무 그림자만 하늘거리는 구나 諸天柏樹影陰陰
『江原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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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정조(1752,영조28~1800,정조24)의 이름은 산(祘)이고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이다. 영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 , 思悼世子)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 홍씨(惠慶 宮洪氏)이다. 1759년(영조 35) 세손(世孫)에 책봉되고, 1762년 세자인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뒤 동궁으로 불렸으며, 1764년 2월 어려서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과 홍인한을 경원과 여산으로 귀양 보냈다가 사사(賜死)했다. 홍국영이 세도를 부리며 권력을 남용하자 조신들의 탄핵에 따라 1779년 9월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고, 이듬해 2월에는 전리(田里)로 돌려보내 친정체제를 강화했다.
정조는 즉위한 다음날 어제봉안(御製奉安)의 장소로 마련했던 규장각(奎章閣)을 9월에 준공, 역대 왕의 문적들을 수집해 보관하게 하고, 중국에서 보내온 서적을 비롯한 많은 책들을 거두어 수장하게 했다. 규장각에 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 등을 각신(閣臣)으로 선발해 후한 녹봉을 주고 연구에 몰두하도록했으며, 정조 자신도 이들과 밤을 새워 대화를 나누고 시정(時政)의 득실과 학문을 논했다.
정조는 영조의 뜻을 이어 탕평책을 실시했다. 1800년 6월 개혁의 의지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채 갑자기 죽은 뒤, 유언에 따라 현륭원 동쪽 언덕에 묻고 건릉(健陵)이라 했다. 1821년 효의왕후가 죽자 현륭원서쪽 언덕으로 옮겨 합장했다.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