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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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사(洛山寺)에서 양양 부사(襄陽府使)인 이여복(李汝復) 경용(景容)종장(宗丈) 69) 을만나서. 이날 눈이 크게 내렸다. 3수
택당(澤堂) 이식(李植) 70)
누가 용왕 불러내어 옥가루 뿌리게 하였는가 誰喚龍公撒玉塵
머리 돌려 바라보니 절의 광경 새롭네 琳宮光景轉頭新
은백색 포말(泡沫) 거꾸로 쓴 푸른 바다요 滄溟倒接銀濤沫
봄철인 양 담복(薝葍)으로 하얗게 단장한 기수로세 祇樹粧成白葍春
세모에 올라와 굽어보니 그대로 마냥 절승(絶勝) 歲暮登臨仍勝地
하늘 끝 타향 만나 뵌 분 바로 우리 집안 어른 天涯會合是宗人
귀로에 도롱이 젖은들 무슨 걱정 있으리까 不愁歸路簑衣濕
구속 떨쳐 내버리고 술이나 한껏 드세 且鬪樽前漫浪身
지인도 창주의 취향이 있었던지 至人亦有滄洲趣
신령스런 그 자취 동해안에 남겼네 靈迹曾留海岸東
자비로운 천수 관음(千手觀音) 동방에 한 손길 뻗쳐 줌에 一手慈悲奔鰈域
웅장한 절 천추토록 홍몽을 제압하였네 千秋臺殿壓鴻濛
경어 우는 소리에 스님들 발우(鉢盂) 공양했고 鯨魚自吼僧催鉢
보배 기운 감돌면서 벽에서 무지개 뿜었네 寶氣常騰壁吐虹
백화 왕자가 지은 찬 한번 본떠 보려 해도 欲效白華王子讚
솜씨 겨룰 기막힌 시어(詩語) 없는 것이 부끄럽네 愧無奇語與爭工
진해(鎭海)의 낙가산(洛伽山)을 소백화산(小白華山)이라고도 하는데, 이곳도 바로 관음 (觀音)의 도량(道場)이다. 왕자 안(安)이 이에 대해서 찬(讚)을 지었는데, 무척이나 기이한 솜씨를 보이고 있다. 71)
안견의 수묵화에 석천의 시편 安堅水墨石川詩
천 년토록 가람의 기막힌 기예로 꼽혔네 千載伽藍兩絶奇
이제는 겁화로 승려들마저 모두 떠나 劫火倂將僧寶去
이 명승지 마치도 골짜기 배가 옮겨진 듯 名區便覺壑舟移
분향 구름 감로 법문 다시는 볼 수 없이 香雲法雨虛無裏
옛 추억 더듬어도 무너진 담에 기왓장뿐 解瓦頹垣指點疑
그래도 다행히 선묘(宣廟)의 글 한 편 남아 賴得宣陵宸翰在
신령스런 빛으로 여전히 산사(山寺)를 감싸 주네 神光依舊擁山祇
『澤堂先生集』
○ 나는 양양(襄陽)의 이 사군(李使君)에 대해서 같은 일가의 조카가 되는데, 나의 모친과 양양의 대부인(大夫人)이 똑같은 을묘생(乙卯生)이기 때문에, 내가 사군과 형제처럼 서울에서 지내면서 수친계(壽親契)를 함께 결성했었다. 그런데 지금 어버이 봉양을 목적으로 외직(外職)을 간청하여 똑같이 영외(嶺外)의 관직을 맡고 있으면서 서로들 접경(接境)을 하고 왕래를 하고 있으니, 실로 희한(稀罕)한 인연이라고도 하겠다.
올해 임신년은 모친의 연세가 칠십팔 세가 되는 해인데, 2월 초사흘이 바로 탄신일이 기에 조촐하게 술과 음악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사군이 마침 기휘(忌諱)하는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하고는 8일이 되었을 적에 대부인을 모시고 이곳에 이르렀으므로, 마침내 초아흐렛날로 날을 정하여 관사의 동헌(東軒)에서 연회를 베풀고, 그 다음 날에는 사군이 관사의 서헌(西軒)에서 연회를 베풀었으며, 다음 날 또다시 청하여 동헌에서 자그마한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내가 청간정(淸澗亭)까지 모시고 갔다가 영동(嶺東)으로 돌아왔는데, 겨울과봄 사이에 하루도 풍설(風雪)이 없었던 적이 없건마는, 이 당시 일주일 동안은 잇따라 날이 개고 그렇게 온화할 수가 없었다. 내가 통음(痛飮)을 해 오지 않은 것이 오래되었 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술에 흠뻑 빠져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보통 때에는 현판(懸板)에 시를 지어 제(題)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나, 돌이켜생각해 보건대 지금의 이 일만은 전해 두지 않을 수 없기에, 율시 두 수를 지어 기록하고 아울러 사군의 좌하(座下)에 써서 올렸다.
금강산 남쪽 기슭 신선 노니는 동굴이요 金剛南麓遊仙窟
푸른 바다 동쪽 머리 해님 뜨는 나루로세 碧海東頭浴日津
모두가 동갑이신 고령(高齡)의 두 분 모친 大耋兩堂偕甲子
종친끼리 생신 잔치 성대한 모임 열었네 同宗高會屬初辰
화려한 수레 검은 일산 가까이서 상봉하여 華輧皀蓋逢迎近
신선의 술과 과일 올려 새로이 송축하는 오늘 玉醴瓊桃頌祝新
일천 년 전 영랑의 일 말할 것이 뭐가 있소 莫說永郞千載事
인간 세상 이 즐거움 만고 장춘(萬古長春) 족하네 人間此樂足長春
맑게 갠 날 흰 모래밭 판여 모시고 가뿐가뿐 鳴沙晴路板輿輕
현수의 풍광이 수성까지 잇따랐네 峴首風煙接水城
달은 상현 지나서 어느 사이에 재생백(哉生魄) 月過上弦初展魄
한식 절기맞아서 꽃들도 다투어 피네 花臨寒食政催榮
노위의 경계 맞대고서 생신 잔치 함께 열고 封隣魯衛叨聯席
교송의 축수 바치면서 교대로 올린 술잔 壽祝喬松遞進觥
친족끼리 멋진 모임 극진히 하면 그뿐 但得情親窮勝事
해변이든 서울이든 굳이 따질 게 뭐 있으리 滄濱何異在秦京
植於襄陽李使君爲同宗姪. 而慈氏與襄陽大夫人同乙卯生. 植與使君兄弟在京. 同修壽親稧. 今爲養乞外. 同爲嶺外官. 接壤往來. 實稀罕之遘也. 今年壬申. 慈壽七十八. 二月初三日. 乃 誕辰. 粗設酒樂. 而使君適有忌不果來. 越八日. 使君奉大夫人至. 遂卜初九日. 開筵館之東軒. 明日. 使君開筵于衙舍西軒. 又明日. 復請小設於東軒. 植陪至淸澗亭而歸嶺東. 冬春來 無日不風雪. 是時連七日晴和. 余久不劇飮. 至是不覺酩酊. 尋常不喜作題板詩. 顧念此事不可無傳. 仍以二律記之. 兼錄奉使君座下.
『澤堂先生集』卷之五,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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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종장(宗丈): 집안 어른이라는 말이다.
70) 이식(1584년, 선조17-1647년,인조25)은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 남궁외사 (南宮外史), 택구거사(澤癯居士)이다. 좌의정 행(荇)의 손자로, 당대의 뛰어난 학자이자 문장가로 문풍을 주도하여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문장능력이 뛰어나 절제된 문장으로, 시는 우아한 흥취가 표현되어 있다.
이정구, 신흠, 장유와 더불어 한문4대가(漢文四大家)로, 1610년(광해군 2) 문과에 급제하여 7년 뒤 선전관이 되었으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경기도 양동면 쌍학리로 낙향하여 택풍당(澤風堂)을 짓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호를 택당이라고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이조좌랑이 되었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실정(失政)을 논박하다가 여러 번 좌천되었다. 1642년(인조 20) 김상헌 등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청나라 군사에게 잡혀갔다가 돌아올 때 다시 의주에서 잡혔으나 탈출하여 돌아왔다. 그 뒤 대사헌, 형조·이조·예조 판서를 지냈다.
이식의 문장은 한문이 함축성과 살리면서 간결하고도 품격이 높았고, 5언율시를 잘 썼다. 한문4대가의 한사람으로서 문풍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였고 소설의 폐단을 강경하게 지적하고 소설배격론을 주장하며 허균을 공격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71) 이 시는 이식이 간성부사로 부임하여 낙산사를 지나면서 쓴 시이다. 첫 수는 낙산에서 바다를 바라보자 눈 내리는 모습을 용왕이 옥가루를 뿌려 은백색의 포말이 선궁 같고, 은백색의 포말을 뒤집어 쓴 푸른 바다, 너무나 아름다움에 모든 구속을 떨쳐버리고 술이나 마시면서 걱정 없이 살고 싶음을 노래하고 있다.
두 번째 수는 낙산은 관음보살의 상주처로 자비로움을 이야기 하며 의상대사가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성전에 모셨던 고사응 인용하고 있다. 세 째 수 에서는 안견의 수목화와 임억령의 시가 천년토록 아름다우며전란으로 스님들이 모두 떠나 큰 변화로 폐허가 되었다며 심회를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