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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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은 선사시대부터 강과 바다에서 삶을 영위하며 자연스럽게 용왕숭배사상이 생성되었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낙산사 창건설화와 관련 있는 용왕설화이다.
동해용왕의 상주처인 양양은 삼국시대부터 신성시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동해신사(東 海神祠)로, 역사적 변화에 따라 다양한 명칭을 사용하였다. 조선 후기로 올수록 신사(神祠 가 성리학의 영향으로 동해신사의 신성성이 폄하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였다.
『정조실록』 정조 24년(1800)권준의 장계에서 지적하고 있고, 허목은 이미 치제의 예를 잃었 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국가제의가 성리학의 이념에 의해 문제점을 표출하고 있다. 조선 전기는 통치이념이 엄격하게 유지되었지만 후기로 오면서 시대적 흐름에 의해 해이해졌다.
하지만 어촌의 용왕숭배사상은 오늘날까지 강한 생명력으로 그대로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어촌의 공동체 신앙으로 자리하고 있다.
동해신사(東海神祠)는 국가주관 제사로 『고려사』를 시작으로 사서, 지리지, 각종 읍지 등 수많은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앞으로 동해신사의 명칭과 건물을 원형대로 복원하여 양양문화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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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祖實錄』54권, 정조 24년 4월 7일 己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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