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동해신묘의 문헌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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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양군에 위치한 동해묘는 시도기념물 73호로 나라에서 동해신에게 풍농풍어(豊農豊 魚)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동해신묘는 해신(海神)을 모신 묘사(廟祠)로 국가의 주관으로 치제하던 곳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동해신묘는 가장 중요시했던 곳이었다. 동해신묘의 건립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高麗史』에“원종원년 승지양주사 별호양산 유동해신사(元宗元年 陞知襄州事 別號襄山, 有東海神祠)” 19) 라는 기록으로 볼 때 고려시대인 1260년 이전부터 이미 존속했었음을 알 수 있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고려 제6대 성종 10년 (991)에서 고려 제8대 현종19년(1028년)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20)
또한 『高麗史』에 공민왕 19년 7월 동해묘의 이름을 새로 정해 반포한 기록이 있는데,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지금 옛 제도에 의하여 제도를 정하라고 명령하였으니, 무릇 오악·오진·사해·사독은 모두 전대에 봉하였던 명호를 제거하고 단지 산과 물의 본래 칭호로써 그 신을 부르도록 한다.
… 중략 … 사해는 동해지신(東海之神), 남해지신(南海之神), 서해지신(西海之神), 북해지신(北 海之神)이라고 일컫는다.…” 21)
이 기록을 통하여 동해신으로서의 명호로 부르게 된 시기는 공민왕 19년인 1370년에서부터 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 사전(祀典)이 정비되면서 중사(中祀)로 설정되었고 이때부터 국가적인 제사처로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동해신묘는 서해의 풍천, 남해의 나주와 함께 우리나라 삼해(三海)의 해신에게 국가 주관으로 치제하였던 역사유적으로 지정·보존가치가 크다.
조선 초기 세종실록 지리지 강원도 강릉 대도호부 양양 도호부에 동해신묘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 명산(名山)은 설악(雪嶽)이다. 【부(府) 서쪽에 있는데, 신라 때 소사(小祀)로 하였다. 】 동해 신사당(東海神祠堂) 【부(府) 동쪽에 있는데, 봄·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려 중사(中祀)로제사지낸다. 】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바다 어귀에 이르기 7리, 남쪽으로 강릉(江陵) 임내 연곡(連谷)에 이르기 50리, 서쪽으로 인제(麟蹄)에 이르기 36리, 북쪽으로 간성(杆城)에 이르기 33 리이다. …" 22) 조
또 다른 조선왕조실록의 주요한 기록은 세조2년에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의 상소로, 수도가 고려의 개경에서 조선의 한성으로 이전함에 따라 동해묘의 위치를 양양에서 강릉으로 옮겨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 기사는 다음과 같다.
"악진해독(嶽鎭海瀆)입니다. … 중략 … 또 동해·남해·서해의 신사(神祠)는 모두 개성(開城)을기준하여 정하였기 때문에 또한 방위(方位)가 어긋납니다. 빌건대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고정 (考定)을 상세히 더하게 하고, 삼각산(三角山)을 중악(中岳)으로 삼고, 금강산을 동악(東岳)으로 삼고, 구월산(九月山)을 서악(西岳)으로 삼고, 지리산(智異山)을 남악(南岳)으로 삼고, 장백산(長 白山)을 북악(北岳)으로 삼고, 백악산(白岳山)을 중진(中鎭)으로 삼고, 태백산(太白山)을 동진(東 鎭)으로 삼고, 송악산(松嶽山)을 서진(西鎭)으로 삼고, 금성산(錦城山)을 남진(南鎭)으로 삼고, 묘향산(妙香山)을 북진(北鎭)으로 삼을 것입니다. 또 동해신(東海神)을 강릉(江陵)에, 서해(西海)는인천(仁川)에, 남해(南海)는 순천(順天)에, 북해(北海)는 갑산(甲山)에 이제(移祭)하고, …"
동해신묘 이건에 관한 내용은 본 학술세미나에서 다루고 있으며, 추가적인 동해신묘의 기록 내용은 인문학적 연구결과를 통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동해신묘가 창건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사를 통해 고려 시대에 이미 창건되어 조선 초기에 국가 제사 장소로 정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동해신 묘는 북서쪽으로 대나무와 솔밭이 있고, 서쪽은 민가와 접해있다. 남쪽과 동쪽은 밭으로 이용 되고 있으며, 높은 대지 위에 새로 지은 신당이 1동 있는데 일제시대에 철폐되었다가 1993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신당의 서북쪽으로 정조 24년(1800)에 관찰사 남공철이 글을 지은 ‘양양 동해신묘중수기사비(襄陽東海神廟重修紀事碑)’가 있다. 보편적으로 중수기는 창건시기와 건물의 위치, 건물의 동수, 각 건물의 기능과 배치 등이 서술되어 건축학적 연구에 매우 중요한 사료 이다.
다음은 강원도 관찰사 남공철 찬한 양양동해신묘중수기사비의 원문이다,
" “ 海與王公同位望沈之祭報其德也 易說卦曰潤萬物者莫盛於水水之爲言演也 故其立字兩人交一 以中出者爲水一者數之始兩人譬男女言蔭陽交物以一起也 周制四次驚蟄因郊而祭立夏因迎氣而祭白 露因雩而祭大寒因蜡而祭歲凡四祭王兩珪有邸五寸牲用少牢幣視方色王及尸皆服毳冕樂奏蕤賓歌函 鐘舞大夏用五獻器齊是朝踐之獻也 淸酒是饋食之獻也 後世又加王爵東海曰廣德王西海曰廣潤王南 海曰廣利王北海曰廣澤王曰禮諸候得祀方內嶽瀆我國亦有東海神廟在襄陽府治東十里聖上正宗二十 四年御史權晙言臣行郡縣見東海神廟齊舍墻垣多頹廢宜修治民家之八居近廟者一倂撤去毋使鷄犬相 聞肅敬於嶽瀆之祀而四方之以水旱疾苦祈禱者聚焉 甚非所以致崇極之道諸著爲式以禁敎日可命觀 察使主其事臣公轍適按關東謹作禮部知▨擧行事說驛聞香祝自京師至以晙差獻官而祀之噫疾痛必呼 人之情也 民之視海神如父母不護者祈禱焉 固宜然祀有其常祀彼遇夫遇婦執金帛而來者將以求媚于 神而徼福禮滋甚漫則層執甚焉 朝廷之禁之乃尊神之至而導民於正也 一擧而兩得矣 遂述其事刻石 碑解其感至於廟宇之隨時修補者有有司存銘曰有宮變變有墻翼翼邊豆▨嘉維珪及帛於粲酒掃肆筵說 凡神具醉飽神旣安正御史自東歸奏于王岳漬有祀曰沈曰望蚩蚩者珉凡有假求握粟擲錢久爲神羞禮滋 益慢神顧不敵王命方伯其始自今勅其府使袛存常祀迺宣祝冊乃命御史丕顯我王以禮事神導率土之正 愛及衆民民皆稽首神宜酬蕙酬之維何惠玆東裔▨有魚矣 多黍多稻旣富而庶黃髮壽考維萬億年海晏 河淸維萬有▨偕我太平 崇禎紀元後庚申閏四月江原道觀察使 南公轍撰"
양양동해신묘중수기사비의 원문에는 아쉽게도 동해신묘의 건축현황을 알 수 있는 대목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정조24년인 1800년 4월에 주위의 민가 8채를 헐어 제사를 엄격히 지내게 하였다는 기사와 함께 담장보수공사에 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또 다른 비문으로 허균이 지은 『성소부부고』 중 중수동해용왕비문(重修東海龍王碑文) 23) 이 있다. 이 비문 또한 건축의 중수보다는 이건의 내용이 중심이다. 강릉에 동해신묘를 세워 용왕이 양양으로 이건하기를 요청 하는 내용으로 용왕으로부터 해를 입고 난 후에 다시 양양의 동해신묘를 보수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동해신묘를 이건하였다는 역사적 기록은 어느 곳에서 찾을 수 없기에 이는 추후 더욱 논의를 거쳐야 할 사항이라 판단된다.
양양 동해묘의 조선시대 건축 현황을 알 수 있는 여러 자료가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영조 41년인 1765년 단묘(壇廟)에 동해묘에 대한 글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在府東十里海上 正殿六間 神門三間, 奠祀廳二間, 東西齌 各二間, 百川門一間, 每歲首別祭 仲 春仲秋常祭 香祝皆自京下來."
본문을 국역하면, “부 동쪽 10리 해상에 있다. 정전 6간, 신문 3간, 전사청 2간, 동서재 각 2간, 백천문 1간으로 매년 초에 별제를 지내고 2월 8월 상제를 지낸다. 향과 축은 모두 서울에서 내려온다.”이다.
또 다른 자료로 『관동읍지(關東邑誌)』(1871)가 있다. 양양부 단묘에는 동해묘에 대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在府東十里海上 正殿六間 神門三間 奠祀廳二間 東西齌 各二間 每歲首別祭 仲春仲秋常祭 香 祝皆自京下來"
본문을 국역하여 보면, 여지도서의 내용과 유사하다. 다만, “백천문 1칸”의 기사가 사라진 것을 볼 수 있다. 여지도서의 1765년과 관동읍지의 1871년 사이에 백천문이 기록에 누락이 되었 거나,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외에 동해신묘의 중수에 대한 내용이 있다.
“동해신묘는 경조 2년(1722)에 양양부사 채팽윤(蔡彭胤)이 중수하고, 동해묘, 백천문 등을 현판했으며, 영조 28년(1752) 부사 이성억(李聖檍)이 중수하고, 그 후 정조24년(1800)년 어사 권준(權晙)의 상소와 관찰사 남공철(南公轍)의 주장으로 중수하였다.” 24) 이 글은 『양주지(襄州誌)』(1990, p.777)의 동해신묘에 대한 글이다.
추가적으로 철종원년(1850) 부사 홍운모(洪運謨), 광무 4년(1900) 부사 이구영(李龜榮)에 의하여 중수(重修)했다고 『양양읍지』에 기록 되어 있다.” 25) 는 내용도 있다.
목조건축이었던 동해신묘는 목조의 재료문제로 인하여 여러 차례의 중수가 필요하다. 상기의 기록을 보면, 대체적으로 50년 간격의 중수시기가 있어, 국가적 제의시설인 동해신묘의 체계적인 관리를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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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고려사 권58, 지(志) 권제12
翼嶺縣本高句麗翼峴縣【一云伊文縣】, 新羅景德王, 改今名, 爲守城郡領縣. 顯宗九年, 置縣令. 高宗八年, 以能禦丹兵, 陞 襄州防禦使, 四十一年, 降爲縣令. 四十四年, 以降賊, 又降爲德寧監務. 元宗元年, 陞知襄州事. 別號襄山. 有東海神祠. 屬縣 一.
) 익령현(翼嶺縣)은 본래 고구려의 익현현(翼峴縣)【이문현(伊文縣)이라고도 한다.】으로, 신라 경덕왕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수성군(守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현종 9년(1018)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고종 8년(1221)에 거란군을 능히 방어하였기 때문에 양주방어사(襄州防禦使)로 승격시켰다가, 〈고종〉41년(1254)에 현령(縣令)으로 강등시켰다.
〈고종〉44년(1257)에 적에게 항복하여 또다시 덕령감무(德寧監務)로 강등시켰다. 원종 원년(1260)에 지양주사(知襄州 事)로 승격시켰다. 별호(別號)는 양산(襄山)이다. 동해신사(東海神祠)가 있다. 속현(屬縣)이 1개이다.
20) 이기용, 동해신묘의 역사적 고찰과 이해, 양양 향토문화연구논문집, 양양문화원, 대영프리컴, 2021
21) 고려사 권42, 세가 권제42, 공민왕(恭愍王) 19년 7월, 1370년 7월 16일(음) 임인(壬寅) “壬寅 帝遣秘書監直長夏祥鳳來, 詔曰 “自有元失馭, 群雄鼎沸, 土宇分裂, 聲敎不同, 朕奮起布衣, 以安民爲念, 訓將鍊兵,
平定華夷, 大統旣正. 永惟爲治之道, 必本於禮. 考諸祀典, 知五嶽五鎭·四海·四凟之封, 起自唐世, 崇明美號, 歷代有加. 在 朕思之, 則有不然. 夫嶽鎭海凟, 皆高山廣水, 自天地開闢, 以至于今, 英靈之氣, 萃而爲神. 必皆受命於上帝, 幽微莫測, 豈 國家封號之所可加? 瀆禮不敬, 莫此爲甚. 至如忠臣烈士, 雖可加以封號, 亦惟當時爲宜. 夫禮所以明神人, 正名分, 不可以僭 差. 今命依古定制, 凡嶽鎭海瀆, 並去其前代所封名號, 止以山水本號, 稱其神. 郡縣城隍神號, 一體改封, 歷代忠臣烈士, 亦 依當時初封, 以爲實號, 後世溢美之稱, 皆與革去. 其孔子善明先王之要道, 爲天下師, 以濟後世, 非有功於一方一時者可比, 所有封爵, 宜仍其舊. 庶幾神人之際, 名正言順, 於理爲當, 用稱朕以禮祀神之意. 所有定到神號, 開列于後.
一, 五嶽, 稱東嶽泰山之神·南嶽衡山之神·中嶽嵩山之神·西嶽華山之神·北嶽恒山之神.
一, 五鎭, 稱東鎭沂山之神·南鎭會稽山之神·中鎭霍山之神·西鎭吳山之神·北鎭醫無閭山之神.
一, 四海, 稱東海之神·南海之神·西海之神·北海之神.
一, 四瀆, 稱東瀆大淮之神·南瀆大江之神·西瀆大河之神·北瀆大濟之神.
一, 各處州府縣城隍, 稱某府城隍之神·某州城隍之神·某縣城隍之神.
一, 歷代忠臣烈士, 並依當時初封名爵, 稱之.
一, 天下神祠, 無功於民, 不應祀典者, 卽係淫祀, 有司毋得致祭. 於戱! 明則有禮樂, 幽則有鬼神, 其理旣同, 其分當正.”
22) 세종실록 153권, 지리지 강원도 강릉 대도호부 양양 도호부
“襄陽: 都護府使一人, 本高句麗 翼峴縣, 【一云伊文縣。】 新羅改名翼嶺, 爲守城郡領縣。 高麗 高宗八年辛巳, 以能禦丹 兵, 陞改襄州防禦使, 【南宋 寧宗 嘉定十四年。】 四十四年丁巳, 以降賊, 降, 爲德寧監務。【南宋 理宗 寶祐六年。】 元 宗元年庚申, 復知襄州事。 本朝太祖六年丁丑, 以外鄕, 陞爲府, 太宗十三年癸巳, 例改都護府, 十六年丙申, 改襄陽。 別號 襄山。 屬縣一, 洞山縣, 本高句麗 穴山縣, 新羅改今名, 爲溟州領縣。 高麗 顯宗戊午, 移屬翼嶺縣任內, 本朝因之。 名山, 雪嶽 【在府西, 新羅時, 爲小祀。】 東海神祠堂。【在府東, 春秋降香祝致祭, 中祀。】 四境, 東距海口七里, 南距江陵任 內連谷五十里, 西距麟蹄三十六里, 北距杆城三十三里。 戶八百五十七, 口一千二百七十七。 洞山縣戶一百二十五, 口二百 十八。 軍丁, 侍衛軍七十三, 舡軍一百九十五。 土姓二, 金、李; 亡姓四, 孫、朴、河、鄭; 續姓三, 張、林、尹。 洞山縣姓 四, 朴、金、崔、陳; 來姓一, 林; 亡姓一, 李。 厥土多塉, 俗業海錯, 崇習武藝, 墾田一千八百三十三結。【水田五分之二 强。】 土宜五穀, 桑、麻、莞、柿、梨、栗、猪、漆。 土貢, 蜂蜜、黃蠟、松子、胡桃、五倍子、芝草、石茸、狐皮、狸 皮、獐皮、大口魚、文魚、沙魚、年魚、全鮑、紅蛤、水魚、常藿、席、正鐵。 藥材, 人蔘、五味子、當歸、茯苓、安息 香、蓁艽、芎藭、白花蛇、熊膽、防風、白膠香、白芨、牧丹皮。 土産, 篠。 石鐵産府西十里鐵掘山。 鹽盆二十二。 洞 山縣鹽盆十八。邑土城、【周回一千八十八步。】 擁金山石城在府北。 【周回一千九百八十步, 兩則岩石間水湧流爲 泉。】 驛四, 連倉、祥雲、降仙、麟丘。 【在洞山縣。】 要害, 自本府西去麟蹄境所等羅領三十六里。 烽火四處, 水山在 府東, 【南準任內洞山 廣汀, 北準府德山。】 德山、 【北準杆城竹島】 陽也山在洞山縣南, 【南準連谷 注乙文、北準廣 汀。】 廣汀在縣北。 【南準陽也山, 北準德山。】”
23) “萬曆甲辰歲七月。襄陽府洞山居漁人池益福。乘舶捉魚于海中。風引其舶。行甚駛。一晝夜東泊于一嶼。有靑衣人招詣王 宮。陞戟仗衛甚嚴。王者被紫坐殿中。謂曰。吾享祀於江陵殆數千年。不幸爲府人所逐。移於玆土。非所樂也。我訴於 帝。今始得請。欲假爾導意於列岳。還吾宇舊地。爾其言於司牧者。否則當以兵伐之。人必受吾害也。因以風送之。不一 日。回抵東岸。漁人異之。不敢自陳於官。言諸鄕任人李碩霖俾達之。府使洪公汝成聞而心異之。取掌故攷之。嘉靖丙申 歲。祠自江陵府正東村移于玆。不敢引神語以滋弊。乞還舊。牒于方伯。不見從。明年乙巳七月。關東大風雨。自安邊, 通川。南至安東地數十郡。酷被水災。民畜死者以萬計。尤劇於江陵焉。洪公愈以爲異。招吏民議曰。神言不移祠。則當 降沴以警之。帀歲而 水災若是。其果徵歟。吾之力不可移。吾視其神宇頹圮未修盍相與新之。以致吾敬。修吾職而誠以 享之。則神其吐諸。咸曰。然。遂捐廩餘。鳩工徒。命鄕任人董之。易其瓦。墁其壁。繚以垣。作神門。除其庭。不數月 告完。公躬祭之。自是襄無風而歲屢熟也。府人神異之。乞文於余。欲鑱石而豎之以示後。余曰。我國設四海龍祠。相度 地理之中以置宇。江陵爲東海之最中。而正東尤其邑之中。位置爽塏。故名爲正東。自新羅祭龍于是。恭僖王朝。府人沈 彥慶,彥光兄弟秉魁枋。以龍祠有費於府。諷方伯啓聞。無故移之。方纂輿地。書曰。東海在襄陽。至今未復舊。今祠地 庳汚。不合妥靈。宜其神之怒也。彥光兄弟之敗。其亦坐是。而乙巳風水之變。實可懼也。神之明告人。人不能信。吁其 惑也夫。府伯之改修廟。甚合於禮。其可泯之乎。遂備紀而係以之頌曰。
海於天地。爲物甚鉅。孰王其中。以風以雨。矯矯龍神。天用莫如。降福降沴。靈應孔孚。疇就其庳。俾徙我宇。惜其小 費。宜神之怒。神之所都。貝闕珠宮。俗之陬居。奚戀以恫。不然誠敬。神所享者。不敬者慢。不誠則惰。掃地酌水。誠 敬則臨。玉寢瓊饔。慢則不欽。移以汚之。卽惰卽慢。豈以豐殺。而爲忻歎。告而不從。宜水之洪。溫溫邦侯。事神以 恭。乃新其構。乃腆其饗。神顧以喜。風來悽愴。克敬克誠。奚擇江襄。願此永鎭。資歲穰穰。民無札傷。五兵不入。於 萬斯年。祐我弊邑。”
24) 장정룡, 동해신묘의 문화사적 고찰, 동해안연구(Journal of East Coastal Research), Vol.7, No.1, 1996.11
25) 이기용, 동해신묘의 역사적 고찰과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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