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웅진단(熊津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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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지정번호: 명승
■ 창건시기: 통일신라시대, 조선시대(발굴 연혁)
■ 현황조성: 2011년 발굴조사
■ 위치 :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 730
재 공주 웅진동 고마나루에는 곰사당과 별개로 웅진단이 있다. 복원된 곰사당은 금강이 흘러가는 것과 같은 방향의 남서쪽을 바라보는 축을 가지고 있다. 2011년 발굴결과에 따라 현재 곰사당 북쪽에 정면3칸×측면3칸 규모의 웅진단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림 10> 복원된 웅진단 곰사당
<그림 11> 웅진단 건물지 발굴현황
(2) 발굴조사 내용
2011년 9월부터 실시한 웅진단의 발굴조사는 기존 단 (壇)으로만 존재하였을 가능성을 뒤집는 결과를 가져왔다.
현재 발굴 위치의 남쪽에 있는 웅신단(곰사당)의 경우 그위치와 존재의 불확신성으로 인하여, 웅진단의 발굴은 기존의 정확한 웅진단의 위치와 규모를 확인하게 하는 중요한 조사라 할 수 있다.
발굴지는 곰사당으로부터 북동쪽으로 200여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향을 하고 있는 기와건물지 1 동과 담장이 발굴되었다. 건물의 소실원인은 화재이며, 부분적인 축소·확대 등의 흔적이 나타났으며, 여러 차례 개· 보수의 모습도 보였다.
웅진단의 발굴(2011)을 통한 유구는 총 5시기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 1차시기 : 가장 초기의 유구로 발견된 흔적이 적어 분석에는 어려움이 있다. 기단석렬이 2시기의 장적심과 간섭이 있는 것을 보면 초기에 작은 규모의 사묘였음을 추정. 북쪽의 동쪽 2번째 장적심에 간섭이 되어있는 원형 적심은 목조건축이었음 보여준다.
- 2차시기 : 6기의 장적심(가로 150~170㎝×세로 240~316㎝)과 동, 서, 북의 담장지(너비 약 60~110㎝)가 나타났다. 남과 북의 장적심에 전퇴와 후퇴의 2열 초석이 놓이게 되는 정면 3칸×측면 3칸 규모의 사당임을 알 수 있다. 동쪽 담장지 하단에 문지로 추정되는 유구가 있다. 화재로 훼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3차시기 : 2차시기의 북쪽 장적심을 모두 사용하지 않고, 새롭게 원형적심을 놓아 중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3칸×측면 2칸의 2차시기보다 적은 규모의 사당임을 알 수 있다. 규모의 축소에 따라 담장도 2차시기보다 남쪽에 배치되어 있다. 일제시대에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 4차시기 : 3차시기보다 축소된 규모이다. 초석 적심이 1기 보이나, 3차시기보다 남쪽에 위치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사당위치에 새로운 건조물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 5차시기 : 훼손된 이후 묘지 등 발굴 이전의 상태이다.
<표 17> 웅진단의 각 시기별 발굴도면 분류(본 연구자 작성)
(3) 웅진단의 규모와 형태 웅진단 발굴도면을 통하여 규모와 형태를 분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순서로 연구를 진행하 였다. 각 시기별 도면의 분류, 각 시기에 따른 영조척 선정, 영조척을 Module로 하여 만든 Grid를 이용한 초석의 위치 추정(CAD Data와 이미지를 이용한 비교), 초석 배열을 통한 건물 규모 산정, 규모와 평면형태 및 기단부 분석을 통한 가구구성, 지붕의 형태 추정, 마지막으로 배치 공간 구성분석의 순이다.
본 연구에서는 유구의 분포와 형태가 비교적 상세하게 표출된 2차시기와 3차시기의 건축규 모와 형태를 추정하고자 하였다.
1) 2차시기 웅진단 건축의 규모와 형태
2차시기의 규모와 형태를 분석하기 위해, 우선 초석의 배치를 위해 분류된 2차시기 발굴 CAD Data를 조정하였다. 장적심 1열과 2열의 행과 열을 맞추지 못하면 초석열이 자오선으로 놓지 못하기 때문에, Grid를 올리기 전 남북의 장적심 위치조정을 우선 시행하였다. 다음, 2차시기만을 추출한 Cad Data위에 1430년 이전의 용척인 32.21㎝의 Grid를 올렸다(표18 순서1).
초석의 위치를 잡기 위해 건축용도에 맞는 초석간격을 참고하여 배치하였는데, 가장 적절한 초석 위치를 찾기 위해, 발굴이미지와 CAD Data와의 비교분석도 동시에 시행하였다(순서2). 확인된 초석의 위치와 담장, 그리고 추정 문지에 대한 위치와 규모 또한 용척 Grid를 이용하여 분석하였다(순서3).
<표 18> 웅진단 2차시기 건축 규모 산정
초석의 위치가 확인된 후, 초석의 간격, 즉 간사이 치수를 통하여 규모를 산정하였는데, 분석 결과 규모는 정면 6.44m(20尺)×측면 5.473m(17尺)로 35.25㎡(10.68坪)로 나타났다(순서4). 기단은 정면 1.288m(4尺), 좌측면․우측면․배면은 0.966m(3尺)의 규모인데, 배면의 경우 북쪽 담장과 간섭이 생기는 결과를 초래하였다(순서5). 이는 담장지의 성격과 기단 계획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건물의 규모를 볼 때, 건물의 지붕은 조선 초기 단묘건축에 많이 사용되었으며, 정면과 측면의 비가 장방형에 가까운 평면에 구축하기 유리한 팔작지붕이 가장 유력한 지붕형태라 할 수 있다.
2) 3차시기 웅진단 건축의 규모와 형태
3차시기 초석열의 배치에 의한 평면규모의 산정방식은 2차시기의 Grid를 이용한 방법과 일치한다. 1340년 이전의 용척인 32.21㎝와 이후의 31.22㎝ 용척을 기준으로 두 용척의 Grid를 CAD Data위에 놓아, 장적심안의 전면 퇴칸 초석배열과 후면의 단위 원형적심 및 동측 2기의 장적심안의 초석배열과의 배치비교를 통하여 초석의 적정 배치를 구성하였다(순서1, 2, 5). 표19 는 두 용척을 기준으로 한 규모산정의 과정을 통한 결과이다. 두 용척 모두 척도에 의한 규모는 정면 21尺×측면 13尺이었다. 정면은 3칸으로 각 7尺이며, 측면은 전퇴가 5칸, 내진이 8척이 었다(순서4, 7). 다만, 1340년 이전의 평면의 규모는 6.762m×4.186m로 면적은 28.31㎡(8.58坪) 이다(순서3). 2차시기보다 2.1평이나 적은 규모이다. 사용 용척이 32.21㎝인 점을 보면, 화재이후 20%나 적은 규모로 복구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마도 다른 건축 과의 상관관계속에서 경제적 문제가 가장 큰 변수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임진왜란을 통한 관아관련 건축의 복구와 맞물려 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임진왜란 이후 관아건축의 복구는 규모의 축소와 함께, 구조의 간략화도 함께 나타났기 때문이다. 기단의 규모는 전․후면 4尺(1.288m), 측면 3尺(0.966m)의 규모로 산정하었다.
<표 19> 웅진단 3차시기 건축 규모 산정
1340년 이후의 평면규모는 6.552m×4.056m로, 면적은 26.57㎡(8.05坪)이다(순서6). 32.21㎝ 의 용척기준 산정보다 반평의 차이가 났다. 기단의 경우 전면 5尺(1.56m), 배면과 측면은 3尺 (0.936m)이다. 이와 같은 결과는 용척이 작아짐에 따라, 1340년 이전의 경우보다 장적심과 원형적심에 일치되는 초석의 배열 차이에 의해 생긴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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