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사이트 내 전체검색
전체검색 닫기
양양문화원
HOME 문화원소식
  • 자료실
  • 동해신묘의 정체성과 복원에 대한 학술대회
  • 자료실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동해신묘의 정체성과 복원에 대한 학술대회

    1) 문화의 전통유지를 위한 계승 – 전통계승론

    페이지 정보

    조회 545회

    본문

    동해신사의 전통은 물(水) 신앙에서 비롯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와 고을의 안녕과 풍요를 위해 물을 관장하는 용신에게 제향을 드린다. 제사는 신과 인간의 교감을 형성하는 기본적인 의례이다. 그리고 그 행사를 주관하고 참관하면서 인간과 인간의 교감도 이뤄진다. 마치, 강릉 단오제의 제의와 난장을 보면 알 수 있다. 강릉단오제가 지금까지 그 전통을 계승하고 세계문 화유산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시공세계글쓰기의 원리와 인간과 인간, 인간과 귀신의 교감을 이루는 바탕 때문이다. 그 교감이 곧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전승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기계중심의 산업혁명을 벗어나야 하는 이유이다. 왜 반(反) 4차 산업혁명을 해야 하고, 5차 산업혁명은 선을 축으로 한 인본주의로 가야 하는지를 잘 나타낸다.

    전통은 옛 풍속을 이어갈 때 그 가치를 더할 수 있다. 시대에 따라 전통의 변질은 어쩔 수없지만, 그래도 그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이런 전통의 계승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이 때문에 전통은 시대적 유행(流行)을 타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발생한 판소리와 탈춤이 지금도 연행되는 현실과 같다. 이것의 좋고 나쁨은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으로 생각해야 한다. 어떨 때는 둘 다 옳고 어떨 때는 둘 다 그르다. 다만 풍속이고 문화라는 차원에서 교감이 이뤄질 때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다종교국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유일신을 부르짖으며 강릉단오제 현장에서 행패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우리의 문화속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릉단오제는 어떻게 보면 민속신앙이지만 이는 또 세시풍속이다. 그렇듯 동해신사의 제의도 국가가 개입되는 민속신앙이면서 풍속의 일종이다. 또 그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개인의 신앙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해신사의 제의를 왜 계승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그 제의 속에 우리 조상들이 생각했던 의식이 계승되어 오기 때문이다. 사람과 귀신의 교감이다. 자연의 횡포를 인간은 이길 수 없다. 가뭄과 폭우와 폭풍과 해일과 갑작스런 풍랑 등은 모두 동해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자연의 횡포이다. 그런 횡포는 인간의 힘과 영역을 넘어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한다. 그런 자연의 횡포를 옛 사람들은 귀신의 조화로 보았다.

    그런데 귀신은 시공을 초월한 존재이다. 물론 귀와 신의 시공은 다르다. 신도 맡은 바 역할이 있고, 역량이 다르다. 신의 세계가 인간의 세계처럼 조직과 계층이 다르다고 생각하였다. 가정신은 가택(家宅)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산신은 산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마을신은 마을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이들 신을 총괄하여 다스리는 옥황상제 같은 절대적인 신이 있다. 신이 잘못 생각하고 판단하여 행패를 부릴 때 그것을 제어하는 기능을 그 계층으로 만들었다. 이중에 동해신사는 꽤 높은 단계의 신이다. 동해라는 바다와 그 주변의 지역을 총괄하는 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동해신사의 용왕신이 갖고 있는 위치에 따라 우리 조상들이 생각했던 생각을 바탕으로 전통을 계승해서 그 문화를 이어갈 수 있다.

    그러면 동해신사의 전통은 무엇일까. 동해신사의 역할을 규정한 기록을 보자. 동해신사의 사우(祠宇)가 지녔던 규모와 제의에 대해 『여지도서』와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렇게 기록했다.

     

    동해묘(東海廟) 관아의 동쪽 10리, 바닷가에 있다. 정전(正殿)이 6칸, 신문이 3칸, 전사청이

    2칸, 동재와 서재가 각각 2칸, 백천문(百川門)이 1칸이다. 매래 초에 별제(別祭), 음력 2월과 8

    월에 상제(常祭)를 지낸다. 향(香)과 축문(祝文)은 모두 서울에서 내려온다. 23) (『여지도서』)

     

    명산(名山)은 설악(雪嶽)이다. 【부(府) 서쪽에 있는데, 신라 때 소사(小祀)로 하였다. 】 동해 신사당(東海神祠堂) 【부(府) 동쪽에 있는데, 봄·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려 중사(中祀)로 제사지 낸다. 】 24) (『세종실록』153권)

     

    중사(中祀)는 모두 3일 동안을 산재(散齋)하고, 2일 동안을 치재(致齋)한다. 【1일은 본사에서 하고, 1일은 제소(祭所)에서 한다. 】 25) (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128권)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동해신사의 건물 규모와 제의날짜와 제수에 대한 기록이 되어 있다. 그 규모가 상당히 컸음을 알 수 있다. 최소한 지방의 향교와 같은 규모를 갖추었다. 이는 국가와 양양도호부에서 동해신사에 대해서 각별히 신경을 썼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제의의 규모는 설악산은 소사(小祀)인데 비해 동해신사당은 중사(中祀)로 지냈다.

    대사와중사와 소사는 규정이 매번 바뀐 전례를 조선왕조실록에서 볼 수 있다. 곧, 『태종실록』7권 태종 4년 2월 20일 기사에는 도교 숭봉에 대해서 “중사(中祀)의 예(例)에 의하여 5일 동안 재계(齋戒)하게 하소서.”라 했으며, 태종실록24권 태종12년 9월 28일 기사에는 “그 기간은 제사에 따라 일정하지 않은데, 대사(大祀)에는 4일 동안, 중사(中祀)에는 3일 동안, 소사(小 祀)에는 2일 동안 산재하였음”이라 하였고, 『태종실록』24권 태종12년 10월 7일 기사에는 “대사(大祀)에는 3일 동안, 중사(中祀)에는 2일 동안, 소사(小祀)에는 1일 동안 치재하였음”이라 하였다. 이밖에도 그 규정에 대한 사례는 아주 많다. 이 가운데 『태종실록』28권 태종14년 8월 21 일 기사에는 “ 악(嶽)·해(海)·독(瀆)은 중사(中祀)로 삼고, 여러 산천(山川)은 소사(小祀)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동해신사는 해(海)에 대당하니 중사의 예로 제사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규정이 일정치 않았는데, 중사는 향(香)과 축문(祝文)을 나라에서 보낼 정도로 중요하게 여긴 제사이다.

    그런데 『정조실록』에는 동해신사[여기서는 동해신묘로 표시됨]를 제사하는 예법이 법전에 실려 있는데 그를 이행하지 않았고, 관리를 하지 않아서 더럽혀 졌다는 기사가 보인다.

     

    양양(襄陽) 낙산진(洛山津)에 있는 동해신묘(東海神廟)는 제향을 드리는 예법이 나라의 법전에 실려 있으니 이곳을 어느 정도로 중시했던가를 알 만한데, 근년 이후 제관(祭官)이 된 자가 전혀 정성을 드리지 않아 제물이 불결하고 오가는 행상들이 걸핏하면 복을 빌어 영락없는 음사(淫祠)로 변했으며, 게다가 전 홍천 현감(洪川縣監) 최창적(崔昌迪)의 집이 신묘(神廟)에서 매우 가까운 지점에 놓여 있어 닭이며 개들의 오물이 그 주변에 널려 있고 마을의 밥짓는 연기가 바로 곁에서 피어오릅니다. 신과 인간이 가까이 처해 있는 것은 신을 존경하되 멀리한다는 뜻에 자못 어긋납니다. 요즘 풍파가 험악해져 사람들이 간혹 많이 빠져 죽고 잡히는 고기도 매우 양이 적은데, 해변 사람들이 다 그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억지로 끌어다 붙인 말로서 족히 믿을 것이 못 되지만, 신명을 존경하고 제사 예법을 중시하는 도리로 볼 때 그대로 방치할 수 없습니다. 감사에게 분부하시어 그 사당을 중수하여 정결하게 만들고 제향에 올리는 제물도 다 정성을 드리게 하며, 미신으로 믿어 기도하는 일을 일체 금지 시키고 사당 앞의 인가도 빨리 철거하도록 명하소서."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 양양 낙산진 동해신묘에 관한 일도 장청대로 보수한 뒤에 감사가 그 결과를 장계로 보고하면 그대 권준을 헌관으로 차임하여 제물을 올려 양양 백성들이 옛날처럼 풍요를 누리도록 빌게 하겠다. 26) ( 『조선왕조실록』정조실록 54권)

     

    인용문처럼 동해신사를 잘 돌보지 않고, 제사도 게을리 하고, 주변에 사람 사는 집이 있으며, 음사로 변해서 마을에서 사람들이 얘기하기를, 이 때문에 풍파에 사람이 빠져 죽고 고기가 잘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권준을 헌관으로 보내 제사를 지내 백성들이 옛날처럼 풍요를 누리게 하라고 했다. 음사(淫祠)는 내력이 바르지 못한 귀신을 제사하는 사당이다. 그러니 나라에서 관리하는 동해신사가 음사로 빠져서는 안 됨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 중요성을 새삼 일깨 우고 있다.

    그러면 중사인 동해신사의 제사는 어떻게 지내야 할까. 남공철의 <동해신묘중수기사비>에다음과 같은 대목이 보인다.

     

    옛날 주나라 법제에는 네 차례로 경칩에 제사하고 입하에 기운을 맞이하여 제사하고 백로에 기우제로 인하여 제사하고 대한에 납향으로 인하여 제사지내니 한 해에 네 번이라. 왕이 두 홀로 홑바탕 다섯 치를 두고 짐승은 작은 소나 양을 쓰고 폐백은 오방색을 보이고, 왕과 주관하는 사람은 다 연하고 부드러운 세 깃털을 꽂은 면류관을 쓰며, 풍류는 유빈을 연주하고 노래는 함종으로, 춤은 대하로 추고 다섯 번 그릇을 가지런히 함은 이 조정에서 하는 것처럼 드리는 것이고 맑은 술은 이 음식을 드림이라. 27) (<동해신묘중수기사비>)

     

    물론 이 제사 방법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으나 강원도 관찰사 남공철이 봤을 때는 이에 합당한 제사법에 따라 행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이런 제사를 준비기간과 함께 약 3일~5일간 행했 으니 요즘 보면 축제(祝祭)와 같은 큰 제사였다. 그리고 용왕의 이름은 “왕의 작위를 더하여 동해를 말하되 광덕왕, 서해는 광윤왕, 남해는 광리왕, 북해는 광택왕이니 제후로 예우하여 제사를 산과 내 안에서 제사했다고 하며(동해신묘중수기사비)”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위패는 광덕왕(廣德王)으로 썼음을 알 수 있다. 광덕왕 등의 용왕 이름은 김시습의 <용궁부연록> 등에도 나오는데, 이 중 광덕왕은 동해용왕의 명칭으로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후로 예우했다 했으니, 축제를 연다면 그 규모가 상당히 크게 진행할 수 있다.

    그런데 『양양군지』에 따르면 지금은 그 규모가 상당히 축소되어 진행됨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제의(祭儀)는 매년 1월 1일에 새해맞이 할 때와 해변개장 때에 양양군수가 헌관이 되어 동해신묘에서 국태민안과 풍농․풍어를 기원하는 제를 올리고 있다. 28) ( 『양양군지』)

     

    그러나 이처럼 해맞이 행사와 해수욕장 개장제로 변해서 그 전통을 잇고 있으니 다행스럽다.

    이는 시대에 따라 환경이 변하기 때문에 그대로 전승하지는 않는다. 현재는 이 제사가 문화재 청에서 문화재로 등록을 한다든가 하면 옛 제도를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 1월 22일동해신묘지(東海神廟址)와 남공철의 동해신묘중수기사비는 강원도 기방기념물 제73호로 지정되어 보전 되고 있다.

     

    ----------------------------

    23) 김우철 역주, 『여지도서』강원도2, 흐름, 2009, 49쪽.

    24)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153권 지리지 강원도 강릉대도호부 양양도호부조.

    25)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28권, 오례 길례 서례 재계 중사를 지낼 때의 재계.

    26)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54권, 정조24년 4월 7일 기축 번ㅉ때 기사. 1800년.

    27) 장정룡(1996), 앞의 논문, 10쪽, 재인용.

    28) 『양양군지』(2010), 앞의 책, 15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