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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신묘의 정체성과 복원에 대한 학술대회

    2) 문화의 전통과 현대적 재해석 – 전통활용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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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동해신사의 전통문화는 얼마든지 현대적 상품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전통의 계승은 시대인식을 잘 하고 그 시대의 문화콘텐츠로 변화를 줘야 지속이 될 수 있다. 마치 <오징어게임>이라는 영화와 같은 논리이다. 전통적인 오징어게임이 어떻게 영화로 만들어져서 지구촌 사람들에게 접목될 수 있었을까. 이 영화는 한국의 전통게임을 전 세계 사람들이 알 수 있게 만든 최고의 선전매체이다. 전통놀이라 하여 마을 입구나 공터에 오징어를 그려놓고 서로 밀치면서 노는 것만이 전통계승이 아니다. 이를 현대적인 매체를 활용해서 새롭게 가공하여 흥미를 주고 교훈을줄 수 있다면 이 또한 전통을 계승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영화 <오징어게임>처럼 그 지향점이 경쟁 원리로만 주어지고 그 결말이 무섭게 이뤄진다면 문제가 있다. 사람의 마음에는 그런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악행도 있겠지만 사랑이라는 선행으로 이루어진 것이 더 많다. 그렇게 착한 행실을 만드는 것은 교육을 통해서 가능하다. 왜냐면 인간의 본성은 동물적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승자의 근성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없이 서로 사랑 하면서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최고의 가르침인 종교(宗敎, 마루 종, 가르칠교)의 근본정신이 사랑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은 선을 추구하지 악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사람은 누구나 창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살면서 환경에 맞춰 물건을 만들고 더넓고 깊은 사유를 하여 더 편하게 살고자 한다. 그런데 이런 창의성이 노소(老少)에 따라 지향 점은 같되 방법이 다르게 전개된다. 젊은 사람들은 현실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개척을 하려 한다. 그러나 노인들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고 현실을 중요시한다. 그들이 그려내는 작품세계도 그렇게 그려진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어느 나라 어떤 사람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이때 노인들이 그려내는 어린 시절의 초상과 젊은이들이 그려내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모험은 사실 지향점이 모두 같다. 젊은이들도 노인들도 모두 현실을 바탕으로 생각을 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있는 사실,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과거회귀로 새로움을 만든 다든가 과거이탈로 새로움을 만든다는 차이밖에 없다. 그들은 모두 어떤 사실을 딛고 그 사실을 활용해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몸짓을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콘텐츠이고, 문화이다. 이곳에 이야기를 잘 입혀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여 움직이게 하여 소기의 목적을 이루면 스토리텔링이 되는 것이다. 그들이 모두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현실의 이상향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활용할 수 있도록 동해신사에서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 있는 이야기 바탕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활용론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동해신사는 제사의식에만 머물면 안 된다. 제사의식에만 머물면 발전이 없다.

    가령, 강릉단오제가 서낭제와 산신제라는 제사의식에만 머물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강릉단 오제가 세계유산이 되고 여태까지 매년 100만 이상의 관광자가 찾아오고, 강릉의 대표 축제로 자리 잡은 것은 제사를 기초로 그에 딸린 갖가지 이야기와 문화행사 및 콘텐츠 발굴에 있다.

    강릉단오제는 전통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정말 모범답안이다. 첫째는 강릉단오제는 신주미 등을 모아 강릉사람 모두 참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둘째는 누구나 범일국사처럼 국사가 되고 효자가 될 수 있다는 곧,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범일국사이야기를 볼 수 있다. 석천, 처녀임신, 학바위, 국사, 굴산사 등의 제재는 신이성을 띠고 있다. 김유신이야기, 정 씨처녀와 서낭신의 결혼이야기 등이 있다. 셋째는 세시풍속 단오제와 관련을 맺었다. 넷째는 관노가면극 등의 콘텐츠가 풍부하다. 다섯째는 산신과 서낭신으로 누구나 위하고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신앙의 차원이 깃들어 있다. 여섯째는 물건을 사고팔며 먹거리가 풍부한 난장이 열리는 것이다. 일곱째는 시장을 비롯한 관료와 무당이 함께 하는 제의와 공연이 열리는 것이다. 이밖에도 강릉단오제를 보면 평생의 한이 풀린다는 등의 격언을 만들어서 유행하게 한 것이다.

    이런 사례는 춘천의 공지천 설화에서도 볼 수 있다. 공지천 이야기는 공주의 곰나루 설화와 같은 유형이다. ‘곰짓내’, ‘곰지내’에서 비롯했다. 곧 ‘곰(神)이 지어준 내’가 훗날 전혀 다른 공지천으로 변화하였다. 그러면서 이 퇴계와 얽힌 설화가 나오고 도통수련자의 이야기가 나오고, 춘천마임축제가 나오고, 이외수의 <황금비늘>이 나오고, 각종 조각상이 만들어지고 하면서 다양한 콘텐츠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런데 공주의 곰나루이야기는 같은 유형의 이야기인데도 공지천이야기처럼 다양한 콘텐츠로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은 공주의 곰나루는 신화(神 話)로만 전승이 되어 제사의식에 충실한 반면, 춘천의 곰짓내 이야기는 신이성(神異性)으로 변화하여 많은 이야기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곧 환상과 실재가 함께한 것이다. 29)

    강릉단오제와 춘천 공지천이야기가 이렇게 다양한 콘텐츠로 생성될 수 있었던 원인은 신화에만 머물지 않고, 제사의식에만 치중하지 않고, 환상과 실재가 함께하는 신이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콘텐츠로 생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과 신의 교감을 간직하고 있으며, 절대 선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련된 모든 이야기와 콘텐츠가 좋은 방향으로 진행 되고, 공동체를 위한 선행으로 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에서 보듯 동해신사의 경우도 신앙적인 제사의식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신앙 적인 면을 유지하되 인간과 신의 교감을 통한 신이성을 간직하여 환상(幻想)과 실재(實在)가 함께 할 수 있는 면으로 나가야 한다. 신앙은 기복(祈福)을 담고 있다. 아주 중요한 콘텐츠 생성 요소이다. ‘복을 구할 수 있다’는 의식은 모든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는 최고의 주제어이다. 누구나 원망충족(願望充足)을 하고자 하며, 모자란 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미신(迷信)에 대한 개념은 버려야 한다. 미신은 세상에 없다. 다른 종교를 얕보거나 터부(Taboo, 접근 꺼림)할 때 나올 수 있는 말이 미신이다. 특정 종교인이 미신이라고 하는 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는 절대적이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 밖 이야기인 환상적인 이야기도 받아들일 수 있을때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활용이 가능하다. 이런 면에서 보면 동해신사의 이야기는 벌써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현재 동해신사 관련 이야기는 허균의 <중수 동해용왕묘비(重修東海龍王廟碑)>, 그리고 <구전 동해신묘 이야기>라 하여 최종낙(崔鍾洛) 양양군수의 죽음 이야기와 관우제사 이야기 등이 전하고 있다. 그리고 <동해송금란>도 있다. 이 이야기는 동해신사를 활용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이야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중수 동해용왕묘비(重修東海龍王廟碑)>

    만력 갑신년(선조34, 1604) 7월 양양부(襄陽府) 동산(洞山)에 사는 어부 지익복(池益福)이 배를 타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중, 바람이 그 배를 몰고 가는데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이렇게 일주야(一晝夜)를 달려 동쪽으로 한 섬에 닿았는데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인도하여 왕궁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왕궁에 나아가니 궁뜰에는 창을 든 병사의 경계가 매우 삼엄하였다. 왕이 라는 자가 보라색 옷을 입고 궁전에 앉아서 말하기를 “내가 강릉(江陵)에서 제사를 받아먹은 지 수천년이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강릉부 사람에게 쫓기어 이곳에 옮겨와 보니 좋은 곳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상제께 호소한 끝에 이제 비로소 허락을 받았으므로 너의 힘을 빌어 관원에게 뜻을 전하고 옛땅 내집에 돌아가고자 하니, 너는 목민관(牧民官)에게 말하라. 그렇지 않으면 군사를 몰아치게 할 것이니, 백성들이 나의 해를 입게 될 것이다.”

    하고는 바람을 몰아 돌려보내 주었는데 하루가 못 되어 동해 가에 돌아왔다. 어부는 매우 이상히 여겼으나, 감히 관가에 나아가 스스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향임(鄕任) 이석림(李碩霖)에게 말하여 관에 보고하게 하였다.

    부사(府使) 홍여성(洪汝成)은 이 말을 듣고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여 전고(典故)를 들어 상고해 보니, 가정(嘉靖, 명 세종 연호) 병신년(중종31, 1536)에 사당이 강릉부 정동촌(正東村)에서 이곳으로 옮겨졌음을 알았다. 그러나 감히 귀신의 말을 인용하지 못하고 폐해가 많다는 이유로옛 문서를 돌려주기를 방백(方伯)에게 청하였으나 따라주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해 을사년(선조39, 1605) 7월 관동(關東) 지방에 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안변 (安邊), 통천(通川)에서부터 남쪽으로 안동(安東)까지 수십 군이 혹독한 수해를 입어 백성과 가축의 죽은 수효는 수만에 이르렀는데, 강릉이 특히나 심하였다. 부사 홍공(洪公)은 더욱 이상히 생각하여 지방 관리와 백성을 불러 의논하기를 “귀신이 사당을 옮기지 않으면 해를 내린다고 우리에게 경고한 지 1년 만에 수해가 이 지경 이니, 이는 과연 그 징험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의 힘으로는 옮길 수 없으나, 그 사당을 보니 퇴락하고 무너진 것을 보수하지 않고 있다. 어찌 우리가 서로 이를 새롭게 단장하여, 우리의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렇게 우리의 할 일을 수행하고, 정성으로 받든다면, 신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하니, 모두 ‘그렇다’ 하고 드디어 녹봉을 떼내어 공장이와 인부를 모아 향임에게 이를 감독케 하여 기와를 갈고, 벽을 바르고, 담장을 둘러쌓고, 신문(神門)을 만들고, 마당을 고르는 일을 두어 달 만에 완성 하였다. 그리고 나서 공이 몸소 제사를 지내니 이때부터 양양이 바람이 없고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강릉부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여 비석을 세워 후대사람들에게 보이 고저 내게 글을 청하기에 나는 “우리나라는 사해 용왕을 위해 사당을 세우되 지리의 중앙되는 곳을 가려 설치하셨는데 강릉은 동해의 한 가운데이고, 정동이며, 더욱이 고을 한 가운데가 상개(爽塏: 앞이 탁 트여 밝은땅)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정동이라 이름하고 신라 때부터 이곳에서 용왕께 제사 지냈다.

    그런데 공희왕(恭僖王, 중종) 때에 강릉부 사람으로 장원 급제한 심언경(沈彦慶), 심언광(沈彦 光) 형제가 용왕의 사당에 비용이 든다 하여 방백에게 말하여 상께 글을 올리고, 까닭 없이 옮겨버렸다. 요즘 편찬된 여지서(輿地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동해 용왕의 사당은 양양에 있는데 지금까지 복구되지 않고 있다. 현재의 사당 자리는 낮고 더러워 귀신의 영을 평안히 하기 에는 적당치 않다.’고 하니, 귀신의 노여움도 당연하다 하겠다. 언광 형제의 몰락도 이것 때문일 것이며, 을사년 바람과 비의 변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다. 신이 사람에게 밝게 고한 것을 믿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미혹하기 때문이다. 부사의 사당 개수(改修)는 예에 들어맞는 처사니, 어찌 그를 덮어 둘 것인가.”

    하고 갖추어 기록하고 이에 송(頌)을 드린다.

     

    海於天地 바다는 천지간에 

    爲物甚鉅 가장 큰 것이온데 

    執王其中 그 누가 왕이 되어 

    以風以雨 바람 불고 비 오게 하는가 

    矯矯龍神 강하고 강한 용왕신이라 

    天龍莫如 하늘의 용은 이것 같음이 없네 

    降福降禍 복 내리고 화 내리네 

    靈應孔孚 신령스런 응보 매우 진실코야 

    疇就其庳 그 누가 그곳 낮은 데에 

    俾徒我宇 내 집 옮기게 하였는가 

    惜其小費 적은 비용 아끼니 

    宜神之怒 신의 노여움 마땅하네

     神之所都 귀신의 계신 곳을 

    貝闕珠宮 조개집 구술 궁궐인데

    俗之陬居 세상의 오두막집 

    奚戀以恫 뭐라 연연하여 섭섭해 하겠는가 

    不然誠敬 아니로다 정성은 

    神所享者 신의 흠향하시는 것이니 

    不敬者慢 불경한자 방자하고 

    不誠則惰 불성하면 게으른 법

    掃地酌水 땅을 쓸고 물 떠놓아도 

    誠敬則臨 정성껏 공경하면 강림하지만 

    玉寢瓊饔 좋은 자리 좋은 음식 차려 놓아도

     慢則不欽 방자하면 흠향하지 않는다네 

    移以汚之 옮겨 놓고 더럽힘은 

    卽惰卽慢 게으르고 방자한일 

    豈以豊殺 어찌 재수의 많고 적음에 

    而爲炘歎 기뻐하고 탄식할까 

    告而不從 알려져도 안 따르니 

    宜水之洪 홍수 피해 마땅하네 

    溫溫邦侯 온화한 원님이 

    事神以恭 공경으로 신 받들어 

    乃新其構 새로 사당 단장하고 

    乃腆其饗 제수 차려 제 올리니 

    神顧以喜 신이 돌아보고 기뻐하여 

    風來悽愴 바람 같이 와 흠향하네 

    克敬克誠 공경을 다하여 정성껏 받든다면 

    奚擇江襄 어찌하여 강릉(江陵) 양양(襄陽) 가리겠는가 

    願此永鎭 원컨대 이곳에 길이 진정하시어 

    資歲禳禳 해마다 풍년들게 도와주시고 

    民無札傷 백성들 상하지 않으며 

    五兵不入 전란이 미치지 못하게 하여

     於萬斯年 길이길이 만년토록 

    祐我獘邑 우리 고을 도와 주소서 30) (『성소부부고』)

     

    <동해송 금란(東海松 禁亂)>

    고종 무술(1898)春에 양주에 거주하는 申景裕란 자가 農部훈령을 受命하였다고 하면서 본군 군수 趙觀顯을 附同하여 동해신묘 임목을 벌목코자 하였다. 그때 조산리민들은 동해신묘림은 신비지역으로 보호하며 禁養하여 온 것이 오백년이나 되었으므로 강경히 벌목을 반대하는 터라 官世間에는 일대 충돌이 발생되어 崔永彬, 崔永徽 등 708명은 투옥을 당하고 선동자를 엄벌하여 營門에까지 압송하려 했다. 그래서 전 주민은 협심궐기하여 농부에다 訴狀을 시급히 제기하 였는데 관도 민의를 거역할 수 없어 불미한 사태에 처한 신경유는 도망해 버리고 사태는 평온해졌다. 31) (『향토지』)

     

    <구전 동해신묘 이야기>

    동해묘라 있는데 옛날에 그 거기다 관운장을 모셨어요. 관운장을 모셔가지고 설레무네 춘추로 제사를 지내서, 바다가 평안하도록 결국은 제사지내죠. 동해비라는 것이 조그만게 부서졌습 니다. 동해비라는 것이 양양 조산리에 있습니다. 동해묘도 없어지고 동해비라는 것도 뭐, 조그만 비석인데 사각형 비석인데 한 반이 부서졌습니다. 그 비문은 다 여기 있습니다.

    근데 그 왜정 우리 아니 한말에 양양군수라는 최종락이라는 이가 있습니다. 그 인제 최종락 이는 이제 개명한 분이거든요. 그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철폐시키고 머리를 깎고 뭐 이런 시대가 있었잖아요. 그래 서원 철폐할 적에 전부 서원을 다 없앴습니다. 아마 양양 동명서원도 그맘때 아마 없어질 겁니다.

    그래 동해묘를 자기가 헐러갔어요. 헐러 가는데 최종락이라는 군수가 사람을 시켜설라무네 그걸 헐어냈다 합니다. 헐어냈는데, 그 후로서 이 양반이 집이 강릉이야, 강릉 상노동이예요.

    그 출신지 상노동가설래무네 그냥 급병으로 죽었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래서 옛날에는 그 동해 묘라는 데를 그렇게 신성하게 한 묘라는 이거예요. 근데 그 묘라는 게 집입니다. 최종락이라는 이가 때려 부수고 가설레무네 그래서 빨리 죽었다 그러지요. 32) (김종국, 남 77세, 양양읍 군향리, 1981.9.21. 구비문학대계2-5)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 의해 일제 통감부 훈령으로 순종 2년(1908년) 12월 26일 양양군수 최종낙(崔鍾洛)이 동해신묘를 훼철(毁撤)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최종낙 군수는 동해신묘 훼철(毁撤:헐어서 치워버림) 후 3일 만에 급사하였다고 한다. 그 후 1993년부터 복원사업이 추진 되어 현재 정전 6칸 1동이 건립 되었으며 정전의 북·서쪽에 두 토막이 났던 동해신묘중수기사비(東海神廟重修記事碑)를 복원(復元)하여 세워 놓았다. 33)

     

    현재 전하고 있는 동해신사 관련 이야기인데, 물론 찾아보면 더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이들 이야기는 동해신사를 활용하여 새로운 콘텐츠로 만드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이야기이다.

    셋 다 신비성(神祕性)과 신이성(神異性)이 있어서 앞서 거론된 강릉단오제와 춘천 공지천 이야 기와 상통하고 있다. 그 중에 인간과 신과의 교감이 주요 모티프로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資歲禳禳 해마다 풍년들게 도와주시고/ 民無札傷 백성들 상하지 않으며/ 五兵不入 전란이 미치지 못하게 하여/ 於萬斯年 길이길이 만년토록/ 祐我獘邑 우리 고을 도와 주소서”라는 <중수동해용왕비문>의 끝부분 같이 인간의 정서를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곧 기계를 중심으로 발전해 온 산업혁명의 문제를 인간의 정서를 바탕으로 바꿀 수 있는 내용이다. 이는 필자가 주창하는 5차 산업혁명의 주제와도 일맥상통한다. 환상과 실재가 함께 하여 시공세계글쓰기를 하기에도 좋은 자료이다. 특히, 바다와 신과 인간 그리고 신앙이 함께 어우러지고 있는 콘텐츠를 생산해 내기에 좋다. 게다가 권준을 헌관으로 임명했던 사실을 더한 다면 인물설정도 상당히 수월하다.

    곧 지영복의 용궁여행, 향임 이석림, 사또, 벌목자 신경유와 군수 조관현, 벌목을 반대하다 잡혀간 최영빈과 최영휘, 소장을 올린 주민들, 동해묘를 부수고 죽은 최종락 군수, 동해용왕 등이 있어서 인물설정을 하기에도 좋다. 게다가 동해신사를 중수하고 비문을 지은 남공철과 허균도 있고, 상소를 읽고 대책을 내린 임금도 있다. 이런 인물에 선악의 대결을 넣어서 선룡과 악룡의 대결이 들어가면 더 좋은 콘텐츠가 탄생할 수 있다.

    단, 콘텐츠를 만들었을 때 이야기가 너무 복잡하면 곤란하다. 보다 단순하면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캐릭터도 가령 ‘깨비’처럼 단순해야지 되지, 복잡하면 안 된다.

    신이성과 신비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시공세계글쓰기와 귀신의 세계를 활용한 4차 산업혁명의 방법을 동원하면 보다 쉽게 현재적 가치창출을 이룰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인간과 신의 교감은 복잡하고 어려우면 접근할 수 없다. 인간과 신의 교감, 그리고 사람의 정서는 단순하고 쉽게 이해할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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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이학주, 「지명의 생성변화와 문화콘텐츠 확산 관련 연구: 춘천시 ‘공지천; 지명의 스토리텔링사례를 통해서」, 『인문과학 연구』73,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22, 257~273쪽.

    30) 『성소부부고』, 앞의 책, 320~3쪽.

    31) 장정룡(1996), 앞의 논문, 15쪽 재인용. 원본은 『향토지』, 양양군 교육청, 1968.에 있다고 한다.

    32) 위의 논문, 같은 곳, 재인용.

    33) 이기용, 앞의 논문, 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