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국사] 성보문화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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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유물로는 통일신라 시대의 양양오색리삼층석탑을 비롯하여 석사자(石獅子)와 장대석(長臺石), 기단석, 탑재(塔材) 등이 산재(散在)되어 있고, 연화문 수막새, 당초문 암막새 등 여러 가지문양이 새겨진 평 기와 등이 수습된 바 있다.
고려 시대에도 석탑의 부재와 난간석, 석수, 막새기와 평기와, 도자기 파편으로 미루어 번성햇던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장대석과 건물의 부재들로 중창 불사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오랫동안 폐사지로 남아 있었을것으로 추정하며, 언제, 어떤 일로 폐사가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최근에 불사한 인법당(因法堂) 1동이 있다.
삼존불 옆에는 삼층 석탑으로 보여지는 또 다른 작은 탑이 있는데 이 탑은 고려 시대의 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확인된 바는 없다.
절에 오르는 계단석이 장대석(240cm)으로 만들어져 당시의 건축 규모를 짐작케 할 뿐이다. 또한 2017년 설악산 집중호우시 수해 복구를 하다가 절 맞은편 위 측에서도 곡식을 빻는 돌확이 발견되어 수습하였다고 한다.
성국사 3층 석탑
● 양양오색리3층석탑(襄陽 五色里 三層石塔)(보물 제497호)
전형적인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으로 1968.12.19.일 보물(寶物) 제479호로 지정되었으며 높이는 약 5m이고 화강암(花崗巖)으로 만들어졌다. 복원 전에는 3층(三層) 석탑(石塔)과 또 다른 부재(部材)들이 흩어져 완전히 쓰러져 있던 것을 1971년에 복원한 탑이다. 5매(五枚)의 길고 큰 돌로 짜여진 바닥 돌 위에 2층 기단이 마련되고 그 위에 3층 탑신부가 놓여 있다. 밑 기단은 높직한 댓돌과 벽면이 한돌로 이루어졌으며 각 면에는 네 귀의 귀기둥과 가운데의 사잇기둥 하나가 새겨져 있다.
덮개돌(甲石)은 3장의 판돌(板石)로 덮여있는데 윗면에는 경사를 이루며, 네 귀퉁이에 맞접은 선이 뚜렷하며 가운데에는 높직한 굴림 턱과 낮게 턱을 돋우고 그 위로 윗 기단을 바치고 있다. 윗 기단 벽면은 4장의 판 돌로 짜여있으며, 각 면에는 네 귀에 귀기둥을 새기고 가운데에는 사잇기둥이 하나씩 있다. 덮개돌은 2장의 판 돌로 이루어졌는데 밑면에는 깊숙이물 끊기 홈이 얇게 파여있고, 네 귀에도 물 끊기 홈이 표시되어 있다. 또 밑면에는 밑받침 턱이 돌아 있고 윗면은 약간의 경사가 져서 네 귀의 맞접은 선이 뚜렷하며 가운데에는 굴리고 괴임 턱을 돋우어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몸돌(屋身)과 지붕돌(屋蓋石)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다. 각 층의 몸돌에는 귀기둥이 있고 지붕의 처마밑에는 4단씩 층단 받침이 있다. 처마 끝은 위 아랫단이 수평을 이루면서 추녀 끝에는 귀 솟음하여 경쾌한 느낌을 주며 이곳에 풍경(風磬)을 매달았던 구멍이 있다. 지붕 꼭대기를 장식하는 상륜부(相輪部)는 지금 모두 없어졌으며 3층 지붕돌윗면에는 지름 7cm, 깊이 4.5cm의 둥근 찰주(擦柱) 구멍이 있을 뿐이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돌 다듬은 모양새가 우수하며 전체적인 균형과 조형감도 단정하고 우아한 편이다. 또한 기단부(基壇部)와 탑신부(塔身部)의 형태, 지붕돌이 얇은 점, 층단 받침이 4단인 점 등에서 통일신라 말기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 인법당(因法堂)
인법당(因法堂)은 큰 법당이 없는 절에서 승려가 머무르는 곳에 불상(佛像)을 함께 봉안(奉安)한 전각(殿閣), 혹은 승방(僧房)으로 학루당 황운영 주지 스님의 뜻으로 1990년대 초부터 신축하기 시작하여 현 주지이신 지명(智明) 스님께서 2010년에 준공하였다. 앞으로도 단청은 하지 않을 것이라 한다. 앞면 8칸 옆면 4칸 규모의 팔짝지붕 형식으로 내부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중심으로 남순동자(南詢童子)와 해상용왕(海上龍王)이 각각 보처(補處)로 삼존상(三尊像)이 봉안되어 있으며 후불탱화(後佛幀畵)도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협시(脇侍)한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가 봉안되어 있다.
인법당내 관세음보살을 중심으로 남순동자와 해상용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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