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주사] 창건(創建) 및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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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사(明珠寺)는 현북면 어성전길 93-229(어성전리 488번지) 만월산(滿月山)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도량으로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로서 역대 명망이 높던 선사(禪師)와 강백(講伯)들이 후학들을 길렀던 수행승의 요람이다.
고려(高麗) 제7대 목종(穆宗) 12년(1009) 혜명(惠明)대사와 대주(大珠)스님이 창건하고 사찰의 명칭을 두 스님의 이름에서 한자씩을 따서 명주사(明珠寺)라 하였다.
혜명대사에 대하여는 관촉사(灌燭寺) 은진미륵(恩津彌勒)과 관련한 전설과 역사가 있어 아래에서 전하기로 한다. 그러나 대주 대사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어 따로 기록할 것이 없다.
하늘에서 본 명주사 가을 풍경
『건봉사말사사적』기록에 의하면 창건 당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 보통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결과부좌(結跏趺坐)한 자세로 앉아 있음]을 조성 봉안한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화엄종 계통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경전상으로 볼 때 비로자나불은『화엄경(華嚴經)』의 교주) 여러 차례 소실로 남아있지 않다. 비로자나불을 모셨다면 당시 사찰 규모로 보면 대적광전(大寂光殿)이 금당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기록에 의하면 고려 1123년[인종(仁宗) 원년] 부속 암자인 청연암(靑蓮庵)과 운문암(雲門庵)을 창건하여 이 고장에 불교가 크게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운문암은 법수치리(法水峙里)로 가는 길 강가 바위에“운문암(雲門岩)”이란 음각된 글씨만 전하는데 이형익(李衡翼)이 대각(大刻)했다고 한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은 반승반속(半僧半俗)의 삶으로도 유명한데 1486년(성종 17년) 52세 나이로 법수치리 부근 검달동(黔達洞)에서 살 때 명주사의 암자 이름도 지었다고 하며 혹자는 명주사에서 수행했다고 한다. 명주사는 현재 설악산 신흥사의 말사로 규모가 아담하지만, 한때는 강원도에서 건봉사와 비교하여도 작지 않은 큰 거찰이었다고 전해진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인 까닭에 옛날에는 많은 고승과 시인 묵객이 명주사를 거쳐 갔다고 한다. 또한 예로부터 선원(禪院)으로 이름나 많은 학승을 배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676년(숙종 2년) 수영(秀瑩)이 향로암(香爐庵)을 창건하였다. 1701년(숙종 27년)에는 법당 맞은편에 벽옥루(碧玉樓)를지었다. 1781년(정조 5년)에는 연파(蓮坡) 스님이 원통암(圓通庵)을 창건하고 관음상(觀音像)을 조성 봉안하였다. 원통암을 창건한 연파 스님의 법명은 영주(永住:1730~1817)로 양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돌을 세워 부처라 하고 모래로 탑을 만들어 예배하는 놀이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12세에 부모를 잃고 명주사로 출가한 뒤 불경을 배우다가, 당대의 고승인 호월(皓月)·풍악(楓岳)·송암(松巖)·설파(雪坡) 스님을 찾아다니며 불경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 뒤 명주사로 돌아와 원통암을 짓고 강석(講席)을 열었는데, 항상 100여명의 학도들이 모였다고 한다. 또한 스님은 나라에서 내렸던 승려에 대한 직책 중 최고의 승직(僧職)인 표충사선교양종도총섭(表忠祠禪敎兩宗都摠攝) 및 석왕사도원장 (釋王寺都院長)을 역임하다가 세수 87세, 법랍 73세로 입적하였다. 다비(茶毘)하여 사리를 얻게 되자 비를 세웠는데, 현재명주사에 남아있다. 명주사에 학승들의 요람처가 된 데는 이 스님의 공이 지대하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849년(헌종 15년)과 1853년(철종 4년) 원통암이 화재로 소실되자 곧바로 중건하였으며, 1860(철종 11년) 큰 화재가 만월산 전체를 뒤덮어 명주사 본사와 원통암·청연암·운문암·향로암이 소실되자 월허(月虛) 스님이 사재를 기울여 명주사를 중건하였다. 이듬해인 1861년(철종 12년) 월허(月虛)와 인허(印虛)가 운문암을 중건하여 만일선회(萬日禪會)를 개설하고 향로암을 서쪽에 옮겨 중건하고 보련암(寶蓮庵)이라 개명하였다.
1864년(고종 원년)에는 학운정원(鶴雲正原) 스 님이 사재를 털어서 원통암을 중건하였으며, 1878년(고종 15년)에 또다시 화재를 입어 이듬해인 1879년(고종 16년)에 명주사를 중건하였다.
1887년(고종 24년) 일봉(日奉)스님이 용선전(龍船殿)을 지으면서 가람의 규모를 제대로 갖추게 되었다.
옛 명주사 (1928년)
그러나 대한제국 광무(光武) 원년인 1897년(고종 34년) 명주사가 화재로 다시 한번 모두 소실되자 부속 암자였던 원통암에서 여러 가지 사무(寺務)를 행하게 되자 이때의 명주사를 원통암으로 칭하면서 지금의 명주사는 본래의 원통암 자리가 된 것이다. 1899년(고종 36년)에는 향로전, 1906년(고종 43년)에는 원통전을 중건 새롭게 사찰을 확장하였다. 1912년 31본말사법 인가로 건봉사 말사가 되었고, 그해 1월 홍포룡(洪莆;龍) 스님이 주지로 취임하였다가 1913년 3월 김월인(金月印) 스님이 취임하였고, 1915년에 침고(砧庫)를 건립하였다. 1917년 8월에 김백월(金白月) 스님이 취임하여 다음 해엔 사찰을 중수하였다. 1920년 8월에 노제봉(盧霽峯) 주지에 이어 1923년 7월에 윤설호(尹雪昊)가 주지로 취임, 1925년에 사찰을 수리하였다. 1926년 7월에 묵옹(黙翁) 스님이 취임하여요사채의 지붕을 기와로 바꾸었다.
이 당시 명주사는 총 15동 95칸의 건물이 있었다. 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末寺史蹟)에 따르면 법당인 원통암 30칸을 비롯하여 독성각 1칸, 산신각 1칸, 어향각(御鄕閣) 9칸, 응향각(凝香閣) 6칸, 진영각(眞影閣) 6칸, 현위실(弦葦室) 6칸, 만수실(曼殊室) 6칸, 미타암(彌陀庵) 6칸, 삼포방(三浦房) 6칸, 창고 6칸, 욕실 3칸, 족침실(足砧室) 2칸, 수침실(水砧室) 4칸, 해우 소 3칸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9칸의 어향각(御鄕閣 임금이나 왕비의 조상과 관련)은 명주사가 왕실과 관계가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연파당 스님 등)이며, 법당 좌우의 선방과 강원을 현위실(弦葦室), 만수실(曼殊室)로 명명한 것도 주목된다.
그리고 진영각 안에는 환성당(喚惺堂)을 비롯한 이 절과 관련된 17분의 고승 영정이 일제 강점기까지 봉안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모두 전하지 않는다.
6·25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명주사는 폐허가 되어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1963년 주지 수룡(壽龍)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979년 주지 마근(麻根) 스님이 법당과 삼성각, 추성각(秋聲閣 : 주지스님 거주), 종각, 요사체 등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명주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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