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사이트 내 전체검색
전체검색 닫기
양양문화원
HOME 문화원소식
  • 자료실
  • 襄陽地域의 傳統寺刹
  • 자료실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襄陽地域의 傳統寺刹

    [명주사] 성보 문화재 (3)

    페이지 정보

    조회 472회

    본문

    ● 일주문(一柱門)


    일주문이라는 말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있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사주(四柱)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 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으로 되어있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 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건축양식은 주로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이 문에 많은 현판(懸板)을 걸어 사찰의 격(格)을 나타내기도 한다.

    명주사 일주문은 금당에서 약 450m 전면에 있으며, 2021년도에 시작하여서 연말에 사업을 완료하였다. 건축 연 면적 40.18㎡이고, 높이 8.8m이다, 특이한 점은 일주문의 기둥을 눈이 많은 지역 특성을 고려하여 지상 2m까지는 돌기둥(하부 둘레 137cm, 상부 둘레 127cm)을 세우고 그 위에 목재기둥을 세웠다, 양각된 현판은 “만월산명주사(滿月山明珠寺)”이며 글씨는 “설악산인(雪嶽山人) 사문적광(沙門寂光) 지혜(智慧)”로 되어있다. 아직 단청은 하지 않은 상태이다. 




    ● 포대화상(布袋和尙) 석상(石像)


    2017. 9. 5일 포대화상을 경기도 이천 무량사에서 이운(移運)해 모셨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의하면 포대화상은 명주(明州) 봉화현(奉化縣) 출신으로 당나라 말기부터 활동했던 인물이다. 

    이름은 계차(契此)이며,  항상 커다란 포대 자루를 들고 다녔기 때문에 포대화상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포대화상은 올챙이처럼 볼록 튀어나온 배불뚝이 모습을 하고서 늘 화통하게 웃고 있다.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보시받은 물건을 포대 속에 넣고 다니면서 어려운 이웃에게 모두 나누어주었다. 눈 속에 누워 있어도 그의 몸에는 눈이 쌓이지 않았으며 사람의 길흉을 족집게처럼 잘 알아 맞혔다고 한다. 

    전등록에는 포대화상이 지었다는 몇 편의 게송도 실려 있다. “발우 하나로 천 집의 밥을 먹고 외로운 몸은 만 리에 노닌다.(一鉢千家飯 孤身萬里遊)”는 시를 통해 구름처럼 살았던 그의 인생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다.

    우리는 포대화상을 통해 단순한 기복신앙이 아니라 마음이 부처라는 소신과 함께 상처받은 중생들을 종횡무진 치유하고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절망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희망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72-2.jpg

     

    새로 건립된 명주사 일주문

     

     

    72-3.jpg

    언제나 화통하게 웃는 포대화상

     

     


    ● 극락전(極樂殿) 외부 벽화(壁畫)


    극락전 동편 벽에는 4점의 벽화가 죽전지혜(竹田智慧) 주지 스님의 뛰어난 솜씨로 그려져 있다. 다만 포대화상의 그림은 앞에서 설하였기 생략한다.



    ▶ 조과도림선사(鳥窠道林禪師)와 백낙천(白樂天) 이야기


    중국 당송 8대 문장가 중 백낙천(白居易, 772~846)이 항주 지사로 부임한 후 자신의 학문과 지혜를 과신하여 학문이 높은 사람을 찾아가 골탕을 먹이는 일을 즐겼다. 

    항주에는 부처님으로 추앙받는 도림선사가 있었다. 하루는 백낙천이 도림선사를 찾아갔다. 도림선사는 사찰 경내의 큰 고목 나무 꼭대기에 새집처럼 작은 평상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서 좌선을 하고 있었다.

    “선사님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선사의 단순한 대답에 백낙천은 소리 높여 웃었다. “소문에 고승이라고 해서 귀한 시간을 쪼개 찾아왔는데, 그런 말은 3살 아이도 알고 있는 이야기 아니오?” 

    도림선사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알지만 팔십 노인도 행하기 어려운 일이외다.”백낙천은 언행일치(言行一致) 지행일치(知行一致)의 교훈을 얻었다.



    ▶ 태전선사(太轉禪師)와 한유(韓愈) 이야기


    당송 팔대가 중 한 명인 한유(韓愈 768~824)는 늘 불교를 심하게 비방을 했었다. 한번은 한림학사라는 벼슬에 있을 때 "불골표(佛骨表)"라는 사리 신앙을 비방하였다가 임금에게 노여움을 사서 팔천 리나 떨어진 곳인 조주(潮州) 지역의 자사라 는 직위로 좌천이 되었다.

    이 지역에는 "태전선사(太轉禪師)"라는 고승이 “축봉령”에 머물며 오직 수도에 전념하였다. 한유는 여기서도 불교를 깎아 내리기 위해 이 지역에서 가장 미모가 뛰어난 여인인 "홍련(紅蓮)"으로 하여금 태전 스님을 유혹해서 파계를 계획하였다.

    홍련에게 100일 안에 태전 스님을 유혹해서 파계를 시켜주면 큰 상을 내리겠다. 그러지 못한다면 엄한 벌을 내릴 것이라고 했다.

    홍련은 자신의 미모가 뛰어남으로 자신있다고 대답하고 스님께서 계신 축령봉으로 들어갔다. 도착하여 스님께 인사를 드리며 스님을 모시고 백일기도를 하려고 하니 허락을 해 달라고 간청하여 스님의 승낙을 받았다.

    기생 홍련은 쾌재를 부르며 기회를 엿보았으나 스님께서는 오직 수행에만 전념하실 뿐 그 외는 일체 눈길을 주지 않으셨다. 약속한 백일은 빠르게 다가오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겨 홍련은 매우 다급해졌다.

    홍련은 고통스러워하다가 마침내 백일째 되는 날에 스님께 눈물을 흘리면서 사실대로 아뢰었다. “이대로 내려가면, 큰 벌을 받게 되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스님께서 온화한 미소로 답(答)해 주시기를 “걱정하게 말라 해결책을 전해 주겠다.”고 하셨다.  홍련에게 가까이 오게 하여 치마를 펼친 다음 한시(漢詩)를 적어주셨다.


    十年不下祝靈峰 (십년불하축령봉)  십 년(十年)을 축령봉을 내려가지 않고

    觀色觀空卽色空 (관색관공즉색공)  색(色)을 관(觀)하고 공(空)을 관해 보니 색(色)이 공(空)하구나.

    如何一滴曺溪水 (여하일적조계수)  어찌 조계수 한 방울이라도

    肯墮紅蓮一葉中 (긍타홍련일엽중)  홍련의 잎(葉) 가운데에 떨어뜨릴 수 있겠는가?

    그 후 한유는 자신의 잘못을 크게 깨닫고 스님의 가르침으로 대오(大悟)하였다. 



    ▶ 달마(達磨)와 혜가(慧可)의 단비도(斷臂圖)


    달마가 소림사 석굴에서 면벽 수도를 하고 있을 때 신광(神光)이 찾아와 제자로 받아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스님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때마침 함박눈이 아침까지 퍼부어 허리까지 도는데도 신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서야 달마가 무슨 까닭인지 물었다. “감로 법문으로 중생을 제도해 주십시요”라고 간청했다. 달마가 다시 이르기를“큰 법을 구하려면 너의 믿음을 바쳐라”고 말했다. 

    신광은 지체 없이 왼쪽 팔을 잘라 파초잎에 싸서 바쳤다.“

      그대가 팔을 끊어 믿음을 보이니 법을 구할 만 하구나”그때서야 제자가 되어 법을 구할 만 하다는 뜻으로 혜가(慧可)라는 법명을 얻었다.

    그러나 혜가는 여전히 마음이 불안하였다,“   스승께서 저의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켜 주소서”

    달마가 혜가에게“불안한 마음을 가져오너라. 내가 편안케 해 주리라” “스님! 마음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찾아진다면 어찌 그것이 그대의 마음이겠는가?” “나는 벌써 너의 마음을 편안케 하였느니라”혜가는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하여 혜가는 달마의 가르침으로 선종 제2조가 되었다. 




    ● 극락전(極樂殿) 주련


    極樂堂前滿月容(극락당전만월용)    극락당 앞에는 밝은 달이 두둥실 떠 오르고

    玉毫金色照虛空(옥호금색조허공)    옥호에 금빛 찬란한 빛 내어 허공을 비추시네

    若人一念稱名號(약인일념칭명호)    만약 사람들이 한 생각으로 그 명호를 부른다면 

    頃刻圓成無量功(경각원성무량공)    한순간에 한량없는 공덕을 모두 이루리




    ● 옛 명주사지(明珠寺址)


    옛 명주사지는 현 사찰에서 도로를 이용해 1.3km 정도 내려오면 ”천년고찰 명주사 옛터“라는 간판이 보인다. 근처에 있었던 중봉당선사탑(中峯堂禪師塔)도 옮겨가서 아무것도 없다. 1897년 화재로 소실되고 나서는 현 사찰로 옮긴 후 밭으로 경작이 되었으나 최근 언제부터인가 휴경이 되면서 잡목과 넝쿨만 무성하다. 지적도상으로는 어성전리 368, 369번지로 사찰이 존립하던 당시에는 없던 도로가 밭 가운데로 개설되어 통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