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 교통의 요충지 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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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은 요즘 시대 말로 핫 플레이스(Hot Place :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유명한 장소)이다. 특히 교통적으로는 양양국제공항과 고속도로, 그리고 동해북부선 철도까지 예정되어 있어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지역의 교통 환경을 통하여 조선시대 양양의 위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양양의 지정학적(地政學的) 위치
조선시대 강원도는 태백산 동쪽에 아홉 고을(통천∽울진)이 있었는데 남북으로는 천 리지만 동서로는 백리도 못 되는 거리로 그중 양양이 유독 한양과 최단거리이며 동해안의 중심이다.
이러한 연유로 조선시대 강원도 동쪽을 남북으로 양분하여 그 북쪽은 양양(襄陽)의 상운도(祥雲道)가 양양(襄陽)-간성(杆城)-고성(高城)-통천(通川)-흡곡(歙谷)까지의 15역로(驛路)를 관할하였으며, 남쪽은 삼척(三 陟)의 평릉도(平陵道)가 강릉(江陵)-삼척(三陟)-울진(蔚珍)-평해(平海)까지를 관할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권44 양양도호부 역원
(상운도 관할 15역이 기록되어 있고, 양양의 인구·연창·강선역이 별도로 표기되어있다)
역참(驛站)의 역할
국가의 행정 명령과 공문서의 전달, 변방의 긴급한 군사 정보 및 외국 사신 왕래에 따른 영송(迎送)과 접대, 그리고 공공 물자의 운송 등을 위하여 설치된 교통 통신기관으로, 흔히 우역(郵驛), 역관(驛館)이라고도 하였다. 역참은 군사·외교면 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측면에서도 중앙집권적인 사회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육상에는 육참(陸站)을 설치하여 주로 역참이라 하였고, 해상이나 강변에는 수참(水站)을 설치하여 수로와 육로를 연결하였으며, 때로는 통행인을 검문하는 관방(關防)의 구실도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고려의 역참 조직을 계승하면서 30리를 1식(息)이라 하여 약 30리마다 1개 역을 설치하였다.
또한 역촌을 중심으로 지방에는 촌락이 형성되고 교통의 요지가 되어 상업 도시가 발달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와 같은 역참의 전통 아래 1896년 갑오개혁 이후 현대적인 도로·교통 체제가 발달하면서 폐지하게 되었다.
상운도(祥雲道)의 위상
상운도(祥雲道)의 유래는 고려시대의 명주도(溟州道)와 삭방도(朔方道)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두 역도(驛道)에 속한 역들이 조선 전기 세종 연간에는 대창도(大昌道)에 소속되었다가 세조와 성종을 거치며 상운도로 독립되었다.
『경국대전』 (1485년)에 수록된 전국의 역참 조직은 41역도 543속역으로 편성되는데 상운도는 16개의 속역중 양양의 상운역을 본역(本驛)으로 하였으며, 성종 때까지는 역승(驛丞)이, 중종 이후에는 찰방(察訪 : 종6품)이 파견되어 역무를 맡아보았는데, 『승정원일기』에 인조 9년(1631)에 신적도(申適道) 부터 고종 31년(1894)에 김교명(金敎命)까지 약 160여 명이 상운역 찰방으로 관직을 제수(除授)한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전국 40개 역도, 535개 역에 5,380필의 말이 있었는데 전국의 역은 9등급으로 나누어져 1등부터 9등까지 대마(大馬), 중마(中馬), 소마(小馬)를 구분하여 차등을 두었는데 역의 대부분은 7~9 등 로(路)에 속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상운도(祥雲道)에 역리(驛吏) 1,202명, 역노(驛奴) 347명, 역비(驛婢) 186명이 배정되어 역무를 담당하였으며, 역마는 93필이 배속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찰방의 업무는 말(馬) 관리뿐만 아니라 유랑인 체포와 죄인 압송, 군사 요충지 방어, 왕이 행차 시 접대, 역사(驛舍) 관리, 도성 축성과 구휼(救恤), 목장 감독, 도첩(度牒) 없는 승려 색출, 환곡(還穀) 담당 등 광범위한 일을 하다 보니 엄청난 인력을 관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상운도의 본 역인 상운역(祥雲驛)의 경우 역리 154명, 역노 30명, 역비 29명과 역마 11필이 배치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관동지(關東誌)』와『양양읍지』에도 대마 3필, 복마(卜馬 : 짐을 싣는 말) 8필 등 총 11필의 역마가 배속되었다는 기록을 보면 7등 로(路)에 속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운역은 세종 때 대창도에 편성되었다가, 세조 8년(1462)에 상운도로 이속(移屬) 되었다. 성종 24년(1493) 미시파령(彌時波嶺) 길을 개척함으로써 양양의 오색역을 폐지하고 간성에 원암역(元巖驛)을 설치하였다.
선조 23년(1590)에는 상운역에 있던 “상운관(祥雲館)”을 양양도호부 관아와 인접해 있는 연창역으로 이건(移建) 상운도(祥雲道) 15속역(屬驛)을 관할하였다.
교통과 양양의 미래
위와 같이 조선시대 이래로 양양은 가히 교통의 중심지였다. 하늘길이 열리고 국제적 관광지로 도약하고 있으며 육로로는 고속버스가 연일 수도권 왕복하고 있다.
이러한 때 1937년 12월 1일부터 운행되던 양양∽안변간 철도를 이용한 물류와 금강산 수학여행을 상기하며 다시 한 번 동해북부선의 조기 완공으로 지역 발전의 원동력이 될것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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