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 범일국사와 정취 보살의 신비한 만남과 몽고군 침입으로 인한 재앙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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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일국사는정취보살과중국명주개국사에서첫만남을가졌다.
범일국사는 신라 흥덕왕 2년부터 흥덕왕 10년간에 당나라에 건너가서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 이르렀을 때 왼쪽 귀가 없어진 한 스님이 여러 스님의 끝자리에 앉아 있다가 국사에게 말하기를“나 역시 우리나라 사람입니다. 집은 명주계(溟州界) 익령현(翼嶺縣:지금의 양양군) 덕기방(德耆坊)에 있습니다. 국사께서 훗날 귀국하시면 꼭 제집을 지어주십시오.”라 청하였다.
범일국사(梵日國師, 810~889)가 여러 총석(叢席-많은 승려들이 모여있는 곳)을 두루 다니며 선에 정진하다가 마조도일 선사(馬祖道一禪師)의 제자인 염관제안 선사(鹽官齊安禪師)에게 불법(佛法)을 얻어 신라 문성왕 9년(847) 정묘에 귀국하여 당시 명주도독(溟州都督) 김공(金公)의 초청으로 지금의 강릉 굴산사(崛山寺)를 세우고 선의 가르침을 폈다.
<범일국사 진영(眞影)>
범일국사는낙산위에불전을짓고정취보살의상을모셨다.
지난날 중국의 명주 개국사에서 만났던 스님이 창문 밑에 와서 말했다. “옛날 명주 개국사에서 국사(國師)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약속이 늦어지는 것입니까?”놀란 국사는 꿈에서 깨어나 사람들과 함께 익령현 경계로 찾아가서 그 스님이 있는 곳을 찾았다. 선문의 대선사로서 바쁜 일상에 빠져있던 국사는 지난날 중국의 한 절에서 만난 초라한 행색의 스님과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수소문 끝에 낙산(洛山) 아랫마을에 사는 한 여인을 찾아서 사는 곳을 물으니 덕기(德耆)라고 대답했다.
그 여인에게는 여덟 살 난 아들이 있었는데 항상 마을 남쪽 돌다리에 가서 놀았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물었다. “너는 매일 누구랑 그렇게 재미있게 노니, 아들은 천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응. 엄마, 나와 같이 노는 아이들 가운데에는 금빛이 반짝이는 아이도 있어요.”어머니는 아들의 이야기를 국사에게 말했다.
국사가 놀라고 기뻐하며 그 아들과 함께 다리 밑에 가서 찾으니 물 가운데 돌부처 하나가 있어 꺼내었다. 왼쪽 귀가 떨어진 것이 이전에 본 사미(沙彌)와 같았는데 이는 곧 정취(正趣) 보살의 상이었다. 이에 점치는 괘 쪽을 만들어 절 지을 터를 점쳐보니, 낙산 위가 길하므로 그곳에 불전 세 칸을 짓고 그 보살상을 모셨다.
몽고침입때낙산二大聖의眞容과두寶珠를양주성으로옮겼다.
몽고의 병란 이후인 1253년과 1254년 사이에 낙산사 두보살의 진용과 두 보주를 양주성(襄州城)으로 옮겼다. 몽고 대군의 공격이 심히 급박하여 양주성이 함락할 즈음에 주지 선사 아행(阿行)이 은합(銀合)에 두 보주를 담아서 몸에 지니고 도망하려고 하니, 걸승(乞升)이라는 절의 종이 이를 빼앗아 땅에 깊이 묻고 맹세하기를“내가 만약 병란에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면 두 보주는 끝내 세상에 나타나지 못하여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오, 내가 만약 죽지 않으면 마땅히 두 보물을 받들어 나라에 바치겠다.”라 하였다.
1254년 10월 22일 성이 함락되었을 때 아행은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으나, 걸승은 죽음을 면하였고, 적병이 물러간 뒤 땅속에서 파내어 명주도 감창사(溟州道監倉使)에게 바쳤다. 이때 낭중(郎中) 이녹수(李祿綏)가 감창사였는데, 받아서 감창고에 간직하여 후임이 교대할 때마다 물려받았다.
무오(戊午:1258)년 11월에 이르러 본업(本業)의 노숙(老宿) 기림사(祇林寺) 주지 대선사 각유(覺猷)가 왕께 아뢰기를“낙산사의 두 보주는 국가의 신보(神寶)입니다. 양주성이 함락될 당시에 절의 종 걸승(乞升)이 성 가운데 묻었다가 적병이 물러간 뒤에 명주 군영(溟州軍營)의 창고에 간직하여 왔습니다. 지금 명주성(溟州城)이 위태하여 지키지 못하겠으니 마땅히 어부(御府)로 옮기어 안치하여야 합니다.”라 하였다. 임금이 윤허하여 야별초(夜別抄) 10인을 보내어 걸승을 거느리고 명주성에서 보주를 가져다 내부(內府)에 모셔 두었다. 이때 관원 10인에게 각각 은 1근과 쌀 다섯 섬을 주었다.
낙산이대성진용의행방은묘연, 두보주는원나라황후에바쳤다.
고려 원종 14년(1273) 3월 경오에 마강(馬絳)이 원나라로 귀국하게 되었으므로 대장군(大將軍) 송분(宋玢)으로 하여금 함께 가게 하였다. 원나라 황후가 일찍이 낙산사 관음여의주(觀音如意珠)를 얻어보고자 하였으므로 송분이 가는 편에 보내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은 낙산사의“비천(卑賤)한 종 걸승(乞升)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나라의 신보(神寶)가 양양 낙산사에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면 얼마나 자랑스럽겠습니까 만은, 그렇지 못하고 불교를 숭상(崇尙)하던 고려가 국가적 자존심을 뒤로한 채 쉽게 보주를 적에게 내어주었다니, 당시 상황이 어찌 되었건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보냈다는 것이 너무나 참담하고 안타깝다.
/ 1273명 3월 17일 (음)
<『高麗史』원 황후에 관음여의주 바침>
<『三國遺史』정취보살 洛山寺에 모심>
<건칠 관음보살좌상>
<정취전(正趣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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