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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시기 양양군의 군정 통치에 대한 고찰

    34. 학교수업은 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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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학교수업은 천막


    오제정 (남, 90세, 양양읍 군행리, 당시 장학사)

    면담일 : 2014.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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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군단이 주관 국어와 수학만 가르쳤고 , 교과서는 강릉 교육청에서 수집해 가져오고 월급 없었다 .

    1944 년 3 월 춘천사범 강습과 수료 , 훈도 자격증 받고 1944 년 4 월 1 일 천진국 민학교 발령을 받고 , 1945 년 8 월 15 일 해방 후 11 월 까지 근무했다 .
    1945 년 12 월부터 고향 현북국민학교에서 무보수 로 근무하다가 1946 년 현북 중학교 교사가 되어 약간의 보수를 받았다 .


    1949 년 4 월 1 일 양양여자중학교 발령을 받고 1950 년 10 월 6 ㆍ 25 전쟁 중에도 양양여자 중학교 근무하였다 .


    1950 년 6 월 24 일 팔로군 1 개연대가 현재 양양도서관 자리에 있었던 고급중학교에 이동해 와 솥 7 개 걸고 소리 없이 조용히 저녁밥을 해먹고 마차로 무기 , 식품 싣고 와서 주둔했다 . 그들은 6 월 25 일 새벽 3 시 조용히 이동하여 남쪽으로 떠났는데 , 약 1 시간 후 신호탄인 듯 공포탄을 쏘더니만 전쟁 발발을 알리는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기 시작했다 .


    1950 년 8 월 추석전날 현북중학교에 미군기가 폭격하여 학생 , 교사 다수 사망 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 당시 미군기들은 인민군들의 주둔지로 보고 오인 하여 공습하였다고 했으며 , 환자들은 양양 현 사거리 관동다방자리의 인민병원으로 후송되어 가보니 내가 아는 학생들이었다 .


    1950 년 10 월 1 일 2 사단 18 연대 백골부대가 군군 입성을 한 후 , 1950 년 10 월 10 일 개교하니 남은 교사들은 모두 나왔다 . 현북국민학교는 25 일에 개교 하여 교장은 지방유지가 맡았고 , 1 군단이 주관하여 국어와 수학만 가르쳤다 . 교과서는 강릉 교육청에서 수집해 가져오고 월급 없었다 . 가르칠 교사가 부족하여 고급 중학 2,3 학년 학생을 교사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 국군의 후퇴로 1950 년 12 월 26 일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는데 , 부친께서는 전쟁 시 피난은 남보다 먼저하고 수복 때는 늦게 들어 오거라 라고 말씀하신다 .


    - 군정 당시 학교수업은 천막 속 맨바닥에서 하였다 .


    1951 년 4 월 25 일 돌아와 군청 학무계로 복직하여 총무과 인사계를 맡았다 . 당시 학교 수업은 천막 속 맨바닥에서 하였으며 군청 민사처의 지시에 의하여 실행하였다 .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50 명 모집하였는데 제 1 기 기간은 1 개월로 강사는 국군 제 1 군단 민사처 문관이 맡았고 , 그때 강사로 임명된 분은 강진천 , 함종악 , 최영린 이었고 , 민사처에서 신원조회 후 48 명을 군단장 명의로 수료증 수여하여 교사 발령하였음 . 그러나 북한 공산당에서 활동한자는 제외 시켰다 . 중ㆍ고등학교는 양고 교장에 강진천 , 속고 교장에는 함경남도 고원 출신으로 중 광정리로 피난을 나온 교사출신인 서창하 , 그리고 상평교장 , 고성교장발령을 냈다 . 그 외에 피난 갔던 교사들도 민정관 박종승 명의로 교사로 임명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