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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시기 양양군의 군정 통치에 대한 고찰

    5. 성주엽 대멀내 방간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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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5. 성주엽 대멀내 방간


    신덕순 (남, 95세, 양양읍 남문2리)

    면담일 : 2015.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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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주엽 대멀내 방간에서 국수 뽑는 일을 해서 먹고 살았다 .

    나는 맨 처음 목수 일을 조금 하다가 우차 꾼을 해서 벌어먹고 살았다 . 전쟁 후 수복이 되자 나는 성주엽 대멀 ( 대머리 ) 내 방간에서 국수를 뽑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살았다 . 그때 군인들이 나무를 캔 목재를 가지고 와서 주인집보고 사라고 하였는데 성주엽씨가 나를 보고 나무를 사서 집을 지으라고 하면서 우리 집을 지을 나무 목재까지 사주었다 . 그래서 나는 주인집에서 국수 뽑는 일을 다 해주고 난 다음 그전부터 목수 일을 해 본 터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터에 집을 지은 다음 그때 우리 윗집 2 채와 아랫집 1 채 까지 4 채를 짓게 되었는데 , 품값은 그 집 사람들하고 같이 짓는 바람에 조금만 받고 지어 주게 되었다 .


    - 그 당시 양양 시내에만 약 80 여대의 우차 꾼들이 있었다 .

    그때 양양군청의 부탁으로 우차를 몰고 양구까지 가서 쌀을 싣고 왔다 . 그 당시 양양에는 차가 귀해서 목탄차만 조금 있었기 때문에 모든 짐은 소가 끌고 다니는 우차가 다 날랐는데 그때 양양 시내에만 약 80 여대의 우차꾼이 있었다 . 나는 나무 목재를 파는 장사 하는 목상들의 산판 ( 山坂 ) 에서 나무를 300~400 사이씩 싣고 연창 정거장까지 날라다 주었다 . 그때 쌀 한말에 600 원씩 했는데 품값은 꽤 많이 받은 것 같으나 정확한 값은 잘 모르겠다 . 그때는 주로 모루골 ( 내곡리 ), 곤우골 ( 월리 ), 황구렁 ( 용천리 ) 등 여러 곳의 산판의 나무를 싣고 다녔다 . 한번은 양양군청에서 쌀을 실으러 양구까지 우차 여러 대가 쌀을 싣고 인제까지 와서 자게 되었는데 여기는 38 °선이라 도적이 있을지 모른다고 군청 책임자와 우차꾼들이 잠도 못자고 꼬빡 날을 세고 온 적이 있는데 , 그때 양구까지 갔다가 온 우차꾼들은 품값을 조금만 받고 양곡을 날라 주었다 .


    d.jpg


    <당시 우차 꾼들의 짐 운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