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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시기 양양군의 군정 통치에 대한 고찰

    24. 비행기를 녹여 지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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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비행기를 녹여 지게로


    추종삼 (남, 79세, 양양읍 조산리)

    면담일 : 2015. 6. 3


    08.jpg


    - 둔전골에 전투기가 떨어져 고물 장사꾼이 비행기를 녹여 지게로 날랐다 .


    1951 년 1 월 4 일 중공군의 공세로 남으로 피난을 나가는데 양양 남대천에 다리가 없어져 강 아랫목으로 건너 동호리 터널을 빠져나가 솔밭에서 1 박을 하고 , 하광정을 지나 동산에서 1 박하면서 바닷가에서 미역을 뜯어 지붕에 널어 말려서 짊어지고 나갔다 . 먹을 것이 없으니 논에 골뱅이를 잡아다 삶아 먹으면서 피난생활을 하다가 아군의 재 반격으로 양양이 수복되자 집으로 들어왔다 .
    1953 년 전투기 4 대중 1 대가 산에 부딪쳐서 작은 깊은 게에 떨어졌다 . 고물상 이하옥은 김사식 , 임사길과 비행기를 녹인 고물을 마을 사람들이 지게로 지고 내려왔으나 설악대인 HID 가 압수하여 임금도 받지 못했다 . 마을 사람들이 노임을 못 받아 진정서를 쓴 김사식이 설악대에 잡혀가 맞아서 사망 당 하는 일이 있었다 .


    - 숯을 짊어지고 속초에 가서 팔고 남은 돈으로 50 원으로 학용품을 샀다 .

    숯을 짊어지고 속초에 가서 팔아 남은 돈으로 학용품을 사서 공부했다 . 14 살이 되던 해 나는 당숙에게 남들은 학교에 가는데 나는 울며 학교 보내달라고 졸라 학교에 들어가 17 세에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 월사금이 없어 일요일이면 장작을 패서 지고 대포 , 청호동에 가서 팔아서 100 원 ~150 원을 당숙에게 드리고 50원은 학용품 , 전과지도서를 사서 공부했다 . 수복이 된 후 지역에 주둔한 군부대 에서는 부대 운영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산에서 숯을 구어 파는 사업을 했는데 ,

    당숙은 그 숯을 군부대에서 550 원에 넘겨받고 나에게 600 원씩 팔되 더 받은 것은 네가 쓰라고 하여 숯을 짊어지고 석교리 어이정 고개 , 회룡리 고개 , 장재터 버덩 , 싸리재를 넘어 , 청대리 반쟁이 에서 쉬고 , 속초 중앙시장 오달포목점 앞에서 숯을 팔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

    숯을 사려는 분이 숯을 묶은 단을 헤쳐 보더니 불량품이 나와 안 팔려서 저녁 무렵에 600 원에 파니 나는 한 푼도 남는 것이 없어 속이 상한 마음으로 40 계단에 오는데 , 지게꾼 ! 지게꾼 ! 하고 부르는 소리에 가보니 6 구 시장에서 양미리 한 짐을 저다 달라고 하는 바람에 50 원 벌이는 한 셈이 되었다 . 그러나 사방은 어두운데 싸리재 고개에 오니 군인 (HID) 보초가 정지 ! 소리친다 . 겁에 지리려 서 있는데 군인들이 빨리 가라하여 벼락바위를 지나 고개를 몇 개 지나서 집에 도착 하니 밤 11 시였다 . 한번은 상도문리 싸리재를 오르는데 군인들이 전화선을 풀며 올라오더니 우리를 오라고 하고는 때리는 것이다 . 이유는 전화선을 끊어갔
    다는 것이다 . 우리는 알지도 못하고 매를 맞았다 . 그 당시에는 전화선이 여러 가지로 활용되었고 대부분의 지게에 멜 방에 전화선이 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


    - 영혈사 주둔부대에서 쑈리 일을 했다 .

    당숙은 논이 얼마 되지 않은 농토를 가지고 우리 집에 들어오니 두 집 살림이라 형편이 어려우니 인근 부대에 군인들이 오라고 하여 옷과 신발을 주었다 .

    수도사단 기갑연대 화기중대가 탑 골 앞에 있었는데 취사반이 우리 밭에 있었다 . 취사반장이 밥 좀 저다 달라고 하여 토옥 골과 경사가 가파른 호랑콧등에 칼돌이 깔렸는데 그때는 맨발로 살던 터라 밥을 지고 호랑이콧등으로 올라갈 때 여유 신발을 가져오라하여 미군신발을 가져와 보니 너무 커서 양말을 신은 신발에 또 미군 신발을 겹쳐서 신으니 날아갈듯 기분이 좋았다 . 군인들이 우리와 같이 있자고 하여 좋을 듯 심부름하며 같이 있었다 . 이렇게 있는 것을‘쑈리’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