襄陽地域의 傳統寺刹

[낙산사] 성보문화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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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25회 작성일 2023-02-2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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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후반에 해동의 화엄종조가 세운 관음신앙의 발원지 낙산사는 그 깊은 역사만큼이나 사찰과 관련한 유물과 유적 은 물론 무형의 유산도 매우 많다.

현존하는 문화재로는 보물 3종, 사적 1종, 명승 1종, 강원도의 유형문화재 3종, 강원도 문화재자료 1종이 있다.

보물로는 낙산사 7층석탑(제499호)과 낙산사 건칠관세음보살좌상(1362호),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 및 사리장엄구 일괄(1723호) 등 3종이다. 사적 495호는 낙산사 일원으로 2008년 12월 18일에 지정 되었으며, 명승 27호는 의상대와 홍련암으로 2007년 12월 7일에 지정되었다. 강원도 지정 유형문화재로는 낙산사 홍예문(33호), 낙산사 원장(34호), 낙산사지(35호), 낙산사 의상대(48호)가 있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36호는 홍연암으로 1984년 6월 2일에 지정되었다. 

안타깝게도 보물 제479호인 낙산사 범종(梵鐘)은 2005년 산불 당시 고열에 녹아 크게 훼손되어 복원은 되었으나 2005년 7월 7일 보물에서 해제되었다. 또한 늘 시인 묵객들이 찾던 이화정(梨花亭)도 자취가 사라져 장소만 짐작할 뿐이다. 2005년 산불로 인하여 몇몇 당우를 빼고는 모두가 최근에 신축되어 선열들의 얼과 땀의 손길이 모두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쉽다. 



● 낙산사 7층 석탑(洛山寺七層石塔, 보물 제499호)


이 석탑은 창건 당시 3층으로 조성하여 천룡팔부로부터 받은 수정 염주(念珠)와 여의주를 탑 속에 봉안하였던 탑으로 1466년 세조(12년)의 명으로 학열대사가 1467년에 현재의 7층으로 조성한 탑이다. 

높이 6.2m, 둘레 4.7m의 석탑으로, 상부의 1.5m 부분은 청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탑의 받침이 되는 기단부(基壇部)는 정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밑돌을 놓았는데 윗면에 24잎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신부(塔身部)는 지붕돌과 몸돌을 1층으로 하여 7층을 이루고 있다.  각 층의 몸돌 아래로는 몸돌보다 넓고 두꺼운 괴임이 1단씩 있어 특징적이다.  지붕돌은경사면이 평탄하며 네 귀퉁이의 들림이잘 어우러져 전체적인 모양이 경쾌하다.

탑의 머리인 장식부는 찰주를 중심으로 원나라의 라마탑(喇嘛塔)을 닮은 여러 장식이 보존되고 있어 또 다른 특징이다. 본래 상륜부는 오동(烏銅)으로 장식되었으나 1951년 1.4후퇴 때 없어지고 지금 것은 그 후에 새로 얹은 것이다. 고려 시대의 양식을 이어받아 전체의 조형이 더욱 간략하며, 보물 제87호인 강릉 신복사지삼층석탑과 비슷하다. 

6·25 전쟁 당시 총탄을 맞아 부분적으로 손상되었으나 1953년 4월 이형근 장군이 재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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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낙산사 7층 석탑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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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7층 석탑



● 낙산사 건칠관세음보살좌상(洛山寺 乾漆觀世音菩薩坐像, 보물 제1362호)


원통보전에 봉안된 불상으로 조성연대는 15세기 전반의 양식이며,  2003년에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영혈사에서 모셔왔다고 전해진다. 높이 112㎝로, 종이로 조성한 지불(紙佛)로 겉면에 마른 옻칠을 한 불상에 개금하였다.  머리에는 높고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금속으로 만든 팔각 대좌(臺座) 위에 앉아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 높이로 들고 있다. 왼손은 무릎 위쪽에서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짓고 있다. 

둥글고 원만한 얼굴과 부드러운 어깨선, 적절한 무릎 폭 등이 조화를 이루어 전체적으로 온화하고 안정감 있는 형상을 이루고 있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눈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으며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엿보인다.  치밀한 장식이 새겨진 높은 보관과 목걸이, 팔찌 등 각종 영락(瓔珞) 장식이 어깨와 다리는 물론, 대좌 위로 늘어진 상현좌(裳懸座)의 옷자락 위로도 표현되어 장식성이 부각 되어있다.  단정하고 부드러운 자세,  섬세한 손가락 표현 등은 고려 말의 전통을 이은 조선 초기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각 부분의 비례가 좋고 특히, 얼굴 표정도 빼어날 뿐만 아니라,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은 고대 이래의 형식에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보관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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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칠관음 보살상

 

 


●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 및 사리장엄구 일괄

(洛山寺 海水觀音空中舍利塔·碑 및 舍利 莊嚴具 一括, 보물 제1723호)


① 해수관음공중사리탑

석겸(釋謙) 스님은 이 구슬을 봉안하기 위해 숙종18년 (1692) 공중사리탑을 세웠다. 8각 원당형을 기본으로 하는 부도탑이다. 전체 높이는 3.55m이고 각 부재는 흠을 맞추어 끼웠었으며, 탑신은 구형(球形)이며 옥개(屋蓋)는 8각인데 상륜부는 앙련(仰蓮)과 복발(覆鉢), 보륜(寶輪), 보주(寶珠) 등을 하나로 조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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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관음공중사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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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

 


②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숙종18년 1692년)을 세우게 된 내력과 관음의 영험을 기록한 비문으로 일찍이 신라 의상과 원효가 친견했던 관음도량임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 숙종 9년(1683) 낙산사 홍련암 불상을 개금(改金)하여 새로 모실 때상서로운 빛과 향기가 법당에 가득 차더니 공중에서 밝은 구슬 한 알이 탁자에 떨어졌다. 유리와 같이 깨끗하고 보배와 같이 밝게 빛나는 구슬이었다. 그 이전 광해군 11년(1619)에도 관음굴 중건을 마치고 상량하는 날 파랑새가 날아오르면서 울었다. 의상이 관음굴에서 동해 용왕으로부터 여의보주를 받은 것까지 하면 이러한 이적(異蹟)은 세 번째이다..

1693년(숙종 19년) 가선대부(嘉善大夫) 강원도방어사 겸 춘천도호부사 이현석(李玄錫)이 비문의 글을 짓고 1694년(숙종 20년)에 이 비를 세웠다.


③ 사리장엄구 일괄

2005년 4월 산불로 낙산사가 화마(火魔)를 입었을 때 해수관음공중사리탑이 기울어져서 2006년 4월 28일 사리탑을 해체 보수하던 중 탑신 윗면 원형 사리공 안에서 진신사리가 봉안된 사리장엄구 일괄을 발견했다.

발견 당시 노란색 비단 보자기에 싸인 원형 청동합 안에“강희(康熙)  31년”으로 적힌 연기(緣記)가 들어 있어 숙종 18년인 1692년에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사리장엄구는 청동합, 은합, 금합, 호박 사리병, 사리호 보자기, 금합 겹보자기, 금합 홑보자기, 은합 겹보자기 등과 강희 31년경 조탑시주질, 대중질, 진언문의 문서들이 청동합 안에 봉안되어 있다.

2011년 11월 1일 사리장엄구, 해수관음공중사리탑,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와 함께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제1723호로 지 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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