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9호

- 양양의 동해신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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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12회 작성일 2018-02-13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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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교육]


양양동해신묘지(襄陽東海神廟址)


향토사연구소 소장 이규환



● 동해신묘(東海神廟)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 339번지 외 1필에 위치하며 2000년 1월 22일 강원도 기념물 제73호로 지정되었다. 고려시대 이후 동해신(東海神)을 모신 사당(祠堂)이며 매년 나라에서 향과 축을 내려 보내 정초에는 별제(別祭), 2월과 8월에는 상제(常祭)로 관찰사(도지사)가 국태민안(國泰民安)과 풍농풍어(●農豊漁)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 곳이며, 그 외 기우제와 기청제도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 건립년대(建立年代)


동해신묘를 세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고려사』를 참조하면 고려 성종 10년(991)~현종 19년(1028)사이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고려사』제58권 동계편 익령현에는“양양에 동해신사가 있다. [원종원년 승지양주사 별호 양산 유동해신사(元宗元年陞知襄州事別號襄山有東海神祠]”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고려의 도읍(都邑)지인 개성(開城)으로부터 정동(正東)인 양양에 동해신사(東海神祠)가 이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동해신묘의 제향의식


조선 태종 14년(1414) 8월 예조에서 그린 동해신묘의 찬실도(●室圖:제사 차리는 방법을 그린 그림)를 보면“동해는 양양, 남해는 나주, 서해는 풍천으로 정하고 치제(致祭:제사를 지내는 일)를 관에서 주관하였다”고 하며, 조선의 제전(祭典: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등급을 정하였다.
세종 19년(1437) 3월 기사에“나라에서 행하는 강원도 양양의 동해는 중사(中祀)이고 사묘(祠廟:신주를 모셔 두고 제사 지내는 건물)의 위판(位版)은 동해지신(東海之神)이라 쓴다. 동해는 강원도 양주(襄州:양양)동쪽에 있다.”라고 했다.


제사재계(祭祀齋戒)는 제사 전 5일에 집사관은 3일 동안 산재(散齋:심신을 정결히 함)하는데 정침(正寢:제사지내는 몸체의 방)에서 유숙하고, 2일 간 치재(致齋:심신을 정결히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 함)하는데, 1일은 마루에서 1일은 제실에서 지낸다. 무릇 삼갈 적에는 평소처럼 일을 보되 금기사항(禁忌事項)은 다음과 같다.


- 함부로 술을 마시지 말 것.
- 문상과 병문안 하지 말 것.
- 파·부추·마늘·염교(돼지 파)를 먹지 말 것.
- 더럽고 악한 일에 참예 등 말 것.


치재를 할 때에는 오직 제향일만 행하는데, 이미 재계해 놓고 그르친 사람이 있으면 대리로 교체한다.



● 동해신묘의 잘못된 이전 설


태조 3년(1394) 고려에서 조선으로 고치고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천도함에 따라 방위가달라졌다.
세조 2년(1456)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양성지(梁誠之)가 시무책(時務策)을 제시 할 때 동해신을 강릉에, 서해는 인천에, 남해는 순천에, 북해는 갑산에 이제(移祭)하고 일대의 사전(祀典:제사지내는 예의에 관한 법도)을 새롭게 할 것을 상소하니 임금이 듣고만 있었다.
그 후 4해(四海)중 어느 신사(神祠)도 이전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강릉시청의 인터넷 공식홈페이지인“디지털강릉문화대전”등의 동해신묘 이전 설 내용을 보면,“동해신묘는 당초 강릉도호부 정동진(正東津)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조선 성종(成宗) 21년(1490)에 강릉대도호부 안인진에 주둔하였던 수군만호영이 양양도호부 대포진(조산)으로 이전되는 시기에 이전하였다.”는 것이다.
그 연유를 살펴보면 1968년 양양교육청 발간「향토지」와 1976년 양양문화원 발간「향토지」에“묘(廟)가 본래는 강릉에 있었는데 성종 21년 경술(1490)에 수군만호영을 강릉으로부터 대포성(양양읍 조산리)에 이전할 때에 같이 이건하였다는 설이 전파한 것이 아닌 가 본다.”라고 잘못 추정 하였을 뿐이다. 그 외 허균의 문집인「성소부부고(惺所覆●藁)」중‘중수동해용왕비문(重修東海龍王碑文)’등을 각각 인용하여 마치 동해신묘가 강릉에서 양양으로 이전한 것으로 강릉원주대학교의 모교수가 주장하였는데 이를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
그럴만한 이유는 동해신묘가 고려 개경의 정동인 양양에서 한양의 정동인 강릉으로 옮겨졌다면 서해신단은 풍천에서 인천으로, 남해신사는 나주에서 순천으로 함께 옮겨졌어야 이치에 맞을 것이다. 또한 한양의 정동인 강릉의 동해신묘를 정동이 아닌 양양으로 이전하였다는 것은 더더욱 이치에 맞지 않다.
당시 강릉은 대도호부로 동해신묘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었어야 함에도 한 건도 주장할 수 있는 전거(典據)가 없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스스로 왜곡하였다고 인정한 것으로써 지금까지 인터넷 매체를 통해 잘못 알려진 자료들을 모두 삭제하고 더 이상의 불필요한 논쟁을 불식시켜야 한다.



● 동해신묘의 시설규모와 훼손


동해신묘는 남한 유일의 중수기사비가 남아있는 사적지이다.
『관동읍지』양양부 단묘편과『여지도서』강원도 양양군 단묘(壇廟) 편에 의하면 동해신묘의 시설규모는 정전 6칸, 신문 3칸, 전사청 2칸, 동·서재 각 2칸 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의하여 일제 통감부 훈령으로 1908년 12월 26일 당시 양양군수 최종락이 강제 훼철 하였다고 하는데 구전에 의하면 훼철 후 3일 만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 후 80여 년이 지난 1993년 양양군의 자체예산으로 정전 1동만을 복원하였고, 두 동강 나 버려진 동해신묘중수기사비도 수습(收拾)하여 시멘트로 접합 현 위치에 복원해 놓았다.


● 동해신묘의 문제점과 향후과제


<문제점>
동해신묘는 관찰사가 별제와 상제로 제향한 곳인데 유림(儒林)은 동해광덕용왕신(東海廣德龍王神)을 모시고 매년 새해맞이 동해용왕(東海龍王) 제향(祭享)을 매년봉행하고 있는데 이는 모순이며, 그 외 미흡한 사항이 상존하고 있음에도 보완하지 않고 있다.


<개선사항>
동해신의 위패만 모시고 상설은 모두 철거해야 함.
전통제례로 회복하되 절충의식으로 보완 봉행 필요.
동해신묘를 국가사적으로 승격시켜 원형 복원해야 함.
동해신묘 뒷길은 폐쇄하고 내삼문과 울타리를 설치해야 함.
현재 동해묘(東海廟) 편액을 동해신묘(東海神廟)로 교체해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