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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양양에서 영서를 잇는 백두대간의 영(嶺)

    3. 필여령 접근로의 변화(상행선 기준)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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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1917년(대정6)에 총독부에서 발행한 지도를 보면 양양군청에서 필례(必禮)령과 오색령 까지  접근하는  길이  현재와는  사뭇  다르다. 특히  1915년(대정4)에  측도(測圖)하고  1917 년에 제작을 완료하였으니 1915년 현재를 표기한 지도를 보면 아래와 같다.



    ■ 대정4년측도 동6년제판(大正四年測圖同六年製版) 조선총독부 지도 

    양양군청(郡廳) ⇒  서문리(西門里) ⇒  임천리(林泉里) ⇒  향현(香峴  : 상평고개) ⇒ 상촌리(上村里 : 상평리) ⇒ 장승리(長承里) ⇒ 흑간리(黑澗里 : 양양 철광) ⇒ 소량치(所良峙 : 서늘재) ⇒ 가라피리(加羅皮里) ⇒ 한령(寒嶺 : 빨 딱고개) ⇒ 백암리(白岩里 : 현 오색1리) ⇒ 마산리(馬山里 : 현 오색1리) ⇒ 오색리(오색1리 관터) ⇒ 약수리(藥水里 : 현 오색2리) ⇒ 형제현(兄弟峴 : 만 경대와 용소폭포 탐방지원센터 사이에 위치) ⇒ 금표암(禁標岩) ⇒ 44번 국 도 흘림골 입구 ⇒ 필례(必禮) ⇒ 오색령(五色嶺 : 현 한계령)


    ▶ 옥동집(玉洞集)에 향현(香峴), 한령(寒嶺), 형제령(兄弟嶺)이 기록.

    - 향현(香峴)은 상평고개(上平峴)를 말함. 향재라고도 부름, 한령(寒嶺)은 빨딱 고개, 형제현(兄弟峴 : 상기 참조).

    -『옥동집(玉洞集)』: 문익성〔文益成, 1526(중종 21)~1584(선조 17)〕지음, 1873년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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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6〉「양양읍지도」에는 소량치(所良峙)를 선을치(仙乙峙)로 표현



    ▶ 관동읍지(關東邑誌) 양양부(襄陽府) 도로(道路)편에 서늘재 기록

    - 관문에서 서쪽으로 량치(凉峙 : 서늘재)까지 20리, 양치에서 인제 방향 오색령까 지 20리이다. 관문에서 서남쪽으로 서림리까지 30리, 서림에서 구룡령까지 40 리, 구룡령에서 강릉 인암계까지 30리이다.


    ▶『여도비지(輿圖備志)』권15, 양양도호부 영로(嶺路)조에 관아에서 서쪽으로 30리에 소량치(所良峙)가 있으며 오색령으로 통하는 도로이다.

    ⇒ 량치(凉峙)는 한자 그대로“서늘재”이나 소량치(所良峙)는 존재를 나타내는 허사 (虛辭) 소(所)를 빼면, 량치(良峙)로 발음이 같고 방향도 같지만 거리에서 10리 정도 차이가 난다. 그러나 당시의 거리 개념에 비추면 둘다“서늘재”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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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7〉양양 서면 가라피 소량치(所良峙) 입구



    ■ 한계고성(寒溪古城)

    오색령(한계령)에서  인제  방면의  옥녀탕  위쪽에는  신라말  축성한‘한계고성(寒溪古城) 터’가 있는데 몽골 침입 때 원나라에 빼앗겼다가 다시 탈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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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7〉양양 서면 가라피 소량치(所良峙) 입구



    ■ 금표암(禁標岩)

    조선 시대에는 호환(虎患 : 호랑이에게 당하는 피해)이 두렵고 산적이 들끓어 해가 지 면 이 영을 넘지 말라고 금표를 새겨 두었는데 이를 새긴 바위를 금표암(禁標岩)이라 한 다. 지금은 금표암을 찾을 수 없으나 44번 국도 용소폭포탐방지원센터와 흘림골탐방지원 센터 사이에 금표교(禁標橋)가 있어 위치를 짐작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