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오색령 2등 도로 개착을 위한 노력의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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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申報, 1922. 12. 6.)에 의하면 양양군에서는 오색령 도로를 2등 도로를 만들기 위해 “오색령 통과 기성동맹규약(五色嶺 通過 期成 同盟規約)”을 만들어 3개년에 걸쳐 완성하기 위하여 총공사비 중 15만원24)을 기부하 는 조건으로 목표를 세우고 규약을 만들었다.
이 규약에 따라 1922년 12월 6일부터 양양 오색령로를 2등 도로로 개착(開鑿 : 산 을 뚫거나 땅을 파서 길을 냄)해야 한다는 진정서(陳情書)를 영서에서는 춘천을 시작 으로 홍천, 인제, 양구가 연쇄적으로 강원도에 제출하였고, 영동에서도 강릉, 삼척, 울 진 등이 오색령 도로 개착(開鑿)을 찬성한다고 한목소리를 내었다.
당시 강원도로부터 오색령 도로 직로(直路)를 위한 답사 하명(下命)이 있자 1931년 11월 8일 양양군수 박재수(朴在洙)는 군내 관민유지(官民有志) 45명을 대동하고 조침 령(鳥砧嶺)을 통해 인제군 현리를 경유(經由)하여 인제군청을 방문 인제군수 김극일 (金極一)과 원만한 협정을 마친 후 오색령 도로를 시찰하고 11월 14일 귀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932년 3월 15일에는 인제군 북면 주민 800여 명이 연서로 날인하여 인제읍에서 기린을 거쳐 양양으로 관통하는 도로는 불가하니, 인제군 북면 원통리를 중심으로 오 색령(五色嶺)을 관통케 해달라고 인제군청과 강원도에 진정서를 제기하였다고 동아일 보에 보도되었다.
그러나 2등 도로로 고시된 경성(京城)∼오리진선(五里津線)이 경성(京城)∼간성선(杆 城線)으로 변경된 후 우리군과 주변 7개 군의 진정에도 불구하고 오색령 직통노선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1938년 12월 1일 「조선도로령」에 의해 춘천∼간성선이 65번 국도 가 되면서 양양∼인제 간은 국도에서 제외되었다. 그러자 ‘양양 4개면(양양, 서, 손양, 강현)은 연합으로 오색령 도로를 수선(修繕)하여 탐승객(探勝客)의 불편을 조금도 없 게 할 예정’이라는 기사가 매일신보(1938. 12. 6.)에 전해온다. 결국 양양군민의 16년 간 노력이 물거품이 되자 부역(負役)을 통해서 자력으로 당장 도로 수선을 하겠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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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공사비 20만원으로 설계 된 것이 1932년이니 양양에서 목표한 금액 15만원은 1940년 환율로 쌀 80kg 1가마 가격 이 22.68원이니 6,614가마나 되는 엄청난 금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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