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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양양지방의 영(嶺)

    Ⅰ. 머리말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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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필여령은 강원도 양양군 서면 오색리와 인제군 인제읍 가리산리를 잇는 영로(嶺路) 이다. 양양군 서면 오색리 44번 국도 오색령 정상 근처인 필례령 입구에서 접속하는 왕복 2차로이다.

    필여령(弼如嶺) 북쪽에는 소솔령(所率嶺)이 있었는데 소솔령은 오색령(五色嶺)의 옛 이름으로 지금은 한계령(寒溪嶺)이라 한다.

    오색령과 필여령 정상은 불과 1km 거리로 44번 국도를 이용한 상경(上京) 시에는 반드시 필여령 입구를 지나야 하는 단일로(單一路)로 고 문집이나 지도에서 오색령을 중심으로 필여령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어 오색령이 분명한 위치를 점해야 필여령의 위치도 분명히 밝힐 수 있었기 때문에 인용하는 문헌의 중첩을 피할 수 없었다.

    다만, 고지도에서 오색령 남쪽으로 거의 같은 위선(緯線)에 서쪽으로는 한계산(寒溪 山)이 표기되어 있고 동쪽으로는 필여령 대신  연수파(連水坡)가 표기된 지도가 있어 확인한 결과 연수파(連水波)는 박달령(朴達嶺) 즉 단목령(檀木嶺)과 같은 위치임을 밝 혀 둔다. 

    옛날에 지도를 만들 때는 방격법(方格法)을 활용했는데 이는 모눈종이와 같은 격자 망에 사물은 채워 넣는 것으로 17∼19세기에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 등 많은 지 도에  활용되었다.  방격법의  모순을  보완하고자  평환법(平圜法)도  사용하였는데  먼저 12방위를 표기한 후 10리 간격으로 동심원을 그린 후 중앙부터 지형지물을 배치하고 중심으로부터 모두가 반지름 거리로 정확성을 기하였다. 특히 조선 영조 때 학자 정 상기(鄭尙驥)의  백리척(百里尺)  도입은  정밀도를  높였는데  100리를  1척(尺)으로  축척 하여 표기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에도 불구하고 고지도는 오차가 커서 거리 개념은 현재의 축척 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다만, 영(嶺)의 순서라든지 당시 주변의 다른 지명과 환경을 비교하고, 다른 지도와 고문서의 기록 등을 참고하여 정리하면서 정확성을 기하고자 하였다. 

    양양부(襄陽府)에서 오색령의 거리에 대해 50리∼70리까지 다양한 기록이 전하는데 지금의 도로를 실측하니 약 27km이다. 필여령까지는 26km이니 정확히 65리이다. 오 색령을 차로(車路)로 만드느라 늘어난 거리를 감안(勘案)한다면 당시 거리는 약 50리(20km)에서 55리(22km) 거리가 적당할 것이다. 

    당시 오색령은 소동라영(所冬羅嶺)이 폐쇄되어 미시파령(彌時坡嶺)으로 옮겨간 이후 한양(漢陽) 500리로 향하는 비공식 영로(嶺路)로 사무로 가는 관원이나 양반들이 행차 하는  길로  사용되었고  필여령은  보부상(褓負商)들이  소금과  어물을  지고  넘던  길로 그 성격이 사뭇 달랐다. 

    오색령로 양양 방면의 마지막 마을인 오색2리는 지금의 한계령 휴게소에서 9km나 떨어져 있다. 그러나 필여령의 인제 방면은 영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필례약수 주변에 음식점과 온천, 민가가 있다. 또한 영을 내려가는 내내 마을과 민가를 만날 수 있으 며 마의태자 전설부터 피난지 이야기 등 사람 사는 이야기가 전한다. 

    필여령에 대하여 고찰하면서 관련 고문서가 대부분 관내의 모든 영을 포괄하여 설 명하고 있어 영(嶺)별로 글을 쓰다 보니 중복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으며 지형상 인 제군의 자료도 활용하였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