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嶺)을 집필(執筆)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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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에는 많은 고개가 있으나 길과 마을이 산업화 되는 과정에서 어떤 것들은 확·포장 되었거나 높이가 낮아져 옛 모습과 달라졌고, 어떤 것들은 사용되지 않아 기억에서마저 점차 사라지고 있다. 고개마다 적지 않은 애환과 이야기를 담고 있는 바 《양양학연구소》에서는 관내의 모든 영(嶺)과 치(峙)를 정리해 보았다.
우리말과 한자어에는 고개나 언덕을 부르는 명칭112)이 다양한데 명칭만으로는 언 덕의 크기나 모양을 짐작하기 어렵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택리지에서 “영이 란 등마루 산줄기가 조금 나지막하고 평평한 곳을 말한다. 이런 곳에다 길을 내어 영 의 양쪽과 통한다. 나머지는 모두 산이라 부른다.”라고 설명하여 영(嶺)과 산(山)을 구분하였다.
이 책을 집필할 때 처음에는 44호선 국도와 56호선 국도를 중심으로 백두대간을 넘어 동서로 통하는 영로(嶺路)를 조사하였으나 나중에 그 범위를 넓혀 7호선 국도 인근의 남북으로 연결되는 언덕도 정리하여 보강하였다. 또한 마을 내에 있거나 마을 간에 있는 작은 고개도 망라하였다.
정리하다 보니 고개 이름 자체가 마을 이름이 된 곳도 적지 않게 보인다. 서면 내 현리에는 마을 중간에 ‘안고개’가 있는데 이를 한자로 표현하여 내현리(內峴里)가 되 었고 손양면 송현리는 소나무가 울창한 언덕이 있는 연유로 송현리(松峴里)가 되었다. 현북면 대치리는 사방이 큰 산으로 막혀 있어 마을을 벗어나려면 높은 재를 넘어야 했는데 이런 특성을 감안하여 대치리(大峙里)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치(峙)가 들어간 다른 마을 이름은 면옥치리(綿玉峙里)와 법수치리(法水峙里) 등이 있다.
과거 양양부(襄陽府)에서 서쪽 고을로 통하는 영로는 총 6개가 있다. 이들 영로를 소개하면서 영로의 쓰임뿐만 아니라 영을 매개로 사람 사는 이야기를 발굴하여 전하 고자 하였다. 오색령이 역로(驛路)로였던 것으로 오인하여 소동라령(북암령)과 동일한 영이라는 인식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역사 속에서 영의 이름이 변하면서 의미도 완전히 달라진 것도 있었기에 고증을 통해 확인하였으며, 문헌마다 전하는 거리와 위치가 조금씩 달라서 현장을 찾아가 현 대의 지도를 바탕으로 오류를 바로잡았다.
이렇게 모든 영의 흔적을 찾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할 수 있어 늦었지만 다행이라 고 생각한다.
모쪼록 양양문화원 부설 《양양학연구소》에서 1년여에 걸쳐서 옛 문헌을 찾고 우 리 연구소의 이종우 고문 등 여러분의 증언을 바탕으로 고증하여 완성한 책자가 양양 을 이해하고 과거를 추억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024. 11. .
양양학연구소 연구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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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영의 개념 중 언덕(峙)은 땅이 비탈지고 조금 높은 곳, 고개(峴)는 산이나 언덕을 넘어 다니도록 길이 나 있는 비탈진 곳, 재는 길이 나 있어 넘어 다닐 수 있는 높은 산의 고개, 령(嶺)은 재나 산마루로 높은 산의 줄기로 넘 는 곳, 산마루는 산등성이의 가장 높은 곳을 말하며 이 밖에도 등(嶝), 등강(嶝崗), 산등성, 언덕배(빼)기, 꼬개, 꼬 등패기, 고등(皐登), 고댕이, 등마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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