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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의 역사

    1. 양양군의 수해(水害)

    페이지 정보

    조회 307회

    본문


    가. 조선왕조신록으로 보는 역대 수해(水害) 기록


    역대『조선왕조실록』중 수해(水害)만을 살펴보면 첫 번째 기록은 태종 4년(1422년) 7월 25일(陰曆) ‘대신을 흥국사(興國寺)와 낙산사(洛山寺)로 보내 기청회(祈晴會 : 날씨가 맑기를 기원)를 베풀었다’는 기록을 보면 이는 오랜 장마가 있었던 기록으로 추측된다.  이 밖에도 1600년도에 4번의 큰 물난리 피해 보고가 있는 등 8번의 피해가 신록(新錄)에 등장하는데, 특히 1605년 7월 초대형 수해 (태풍)가 강원도와 경상도일대를 휩쓸고 지나갔는데 그 피해상황이 『선조실록』189권, 선조 38년(1605년) 7월 23일 을미(乙未) 3번째 기사에 강원도·경상도의 수재 상황을 열거하다. 라는 왕조실록의 양양부 기사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양(襄陽)은 부내(府內)의 백여호의 대소 인가가 재산과 가축이 일시에 물에 잠기고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 부모와 자녀, 또는 부부 형제 온 가족이 물에 빠지거나 산사태에 압사하여 여염 거리에는 통곡하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해변에는 시체가 즐비하게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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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실록


    襄陽則府內百餘戶大小人家財畜, 一時漂沒, 渰死人物, 或父母子女, 或夫妻兄弟, 有全家淪溺者, 有沙汰壓死者, 閭閻街路, 哭聲徹天, 濱海之間, 積斃相枕。高原則人家漂沒者, 一百七家, 牛馬雜畜, 亦多溺死 。

     

    날짜가 모두 음력임을 감안(勘案)한다면 장마철보다는 태풍철에 몰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록되지 않은 수재가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1) 조선왕조실록 역대 수해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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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1900년대 이후 수해(水害) 기록


    1) 병자년(丙子年) 포락(浦落)


    병자년(丙子年) 포락(浦落)은 1936년 병자년 7월 말부터 9월에 걸쳐 강원도를 강타한 물난리를 가리킨다. 1925년 을축년(乙丑年) 수해 때 강원도에서는 80년 만의 대참사(大慘事)를 당했지만, 1936년 병자년 포락에 비할 바가 아니다.

    1936년 8월 26일부터 29일까지 통천에서 삼척까지 폭우가 동해안을 강타했다. 강릉시는 준공한 후 얼마 되지 않은 제방이 터지고 강릉 남대천의 강릉교가 무너질 정도로 시내가 물에 휩쓸려 수천 명의이재민이 발생했다. 양양은 한밤중에 제방이 터지며 남대천이 범람해 양양읍내가 싹 쓸리며 천 명에 가까운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현산공원에 있는 위도비(慰悼碑)에는 사망 584명, 부상 500명, 가옥과 농경지 침수 또는 유실 등 많은 수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2) 9ㆍ13 수해(水害)


    ‘9·13  수해’는 갑오(甲午)년인 1954년 9월 12일부터 36시간 동안 초속 23m  이상의 강풍과 980mm의 강우량을 동반한 태풍의 엄습으로 양양군 전 지역에 수해가 발생하여 사망 32명, 중상 18명, 경상 25명, 가옥 유실 135호, 가옥 파괴 704호, 가옥 침수 1,195호, 선박유실 102척, 선박파괴 85척, 도로유실 500여 곳 등 이재민 900여명이 발생한 수해다. 

    특히, 육군(陸軍) 제1101야전공병단(野戰工兵團)이 새로 건설한 남대천 목재(木材) 교량(橋梁)이 완전히 유실되었으며, 당시 남대천 하구의 도평(島평) 뜰에 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포 36문, 탱크 2대, 군용 천막 2동이 매몰(埋沒) 또는 유실(遺失)되어 복구에 3개월이나 소요되었다고 한다. 


    3) 사라(SARAH)호 태풍(颱風) ⇒ 열대성 저기압 5등급


    1959년 9월 15일부터 18일까지 발생해 우리나라에 큰 피해를 준 태풍『사라』는 최대 풍속 85m/sec로 제주도와 영남지방을 비롯한 전국에 큰 피해를 주었으나 일찍이 동해로 빠져나가면서 양양지역은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4) 루사(RUSA)


    『루사』는 2002년 8월 30일부터 9월 1일 사이에 엄청난 양의 비와 바람을 동반하고 영동지방을 강타하여 최악의 재난을 불러왔다. 2002년 8월 31일 하루 동안에 1904년 한반도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래 1일 최고 강수량이 쏟아졌는데 강릉이 880㎜, 양양이 851.5㎜를 기록했다. 이로 인해 양양은 콘크리트로 가설된 서면 용천리 입구의 용천교(龍泉橋)가 떠내려가는 등 막대한 피해(被害)를 당했다.  당시의 피해액이 양양군 1년 예산(1,291억원)의 4배가 넘어 국가에서‘재난지역 선포’라는 초강수를 두는 사태가 발생하 였다.

    태풍 루사로 인해 사망 23명, 부상 18명, 도로유실 66km, 교량 파손 및 유실 63개소, 제방 유실 15km, 농경지 유실 1,821ha, 수리시설 파손 137개소,  건물 파손 및 침수 2,672동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복구하는 기간만 2년 이상이 소요되었으며 복구 비용은 총 5천 93억원이 소요되었으며, 지방비 부담 가중으로 200억원의 부채를 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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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풍 루사 피해상황

     

    5) 매미


    2003년 9월 12일부터 13일까지 우리나라에 상륙한『매미』는 순간 최대 풍속이 무려 60m/sec의 무서운 태풍이었다. 루사 피해를 제대로 복구하지도 못했는데 또다시 비와 바람을 몰고 와 농경지 침수와 유실로 복구 기간의 연장은 물론 다시 한번‘국가 재난지역으로 선포’가 되는 피해를 입었다.

    양양지방에는 2003년 9월 12일 새벽 3시부터 9월 13일 새벽 5시까지 26시간 동안 최고 438㎜가 내려 건물 32동(전파1, 반파2, 침수 29) 농경지 유실 197.8ha, 농작물 99ha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재산피해는 총 407억원으로 도로 교량 등이 94건에 388억원, 사유시설이 19억원의 피해를 입었다.


    6) 태풍 에위니아로 인한 설악산 집중호우(集中豪雨)


    2006년 7월 15일 태풍‘에위이나’가 몰고 온 물폭탄을 설악산 오색지역과 장수대에 집중적으로 309mm를 퍼부면서 116,371백만원의 피해를 입었다.

    특히 이날 오색지역에는 오전 8시부터 1시간 동안에 122mm 폭우가 쏟아지면서 흘림골 입구에서 100톤이 넘는 바위가 44번국도에 떨어지고 도로 곳곳이 유실되면서 교통이 두절 되고 통신이 마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