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양양군의 산불
페이지 정보
본문
양양지방은 산림구조, 지형과 기후 특성상 산불 발생의 개연성(蓋然性)이 높다. 즉 산림이 울창하고가연성(可燃性) 낙엽 등이 많이 쌓여 있으며 경사가 급하고 기복(起伏)이 많은 산지로 연소 진행 속도가
빨라 산불 발생 시 급속히 확산(평지의 8배)되었다.
양양의 역사속 산불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1589년 기유년(己酉年)과 1804년 갑자년(甲子年) 1859년 기미년(己未年)이 알려져 있다.
또한 지난 1965년 4월 발생 한 현남면‘삼형제봉(三兄弟峰) 산불’ , 1972년 4월 발생한 현북면 ‘면옥치리 산불’ , 1980년 5월‘설악산 관모봉(冠帽峰) 산불’의 공통점은 봄철 건조기에 계절풍이 겹친 강풍(순간최대풍속 30m/s)을 동반한 산불로 3건의 산림소실 면적은 평균 846ha이었다.
산불이 발생하면 대형으로 확산될 수밖에 없었던 요인은 산악형(山岳形) 산림으로 산불 발생 시 즉각적인 지상 접근이 곤란하며 연기와 고온 및 난기류, 진행 방향 급변으로 근접 진화가 어렵고, 특히, 운송 수단의 제한(制限)으로 진화 장비와 인력의 출동이 늦어져 초동진화가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推定) 된다.
가. 조선왕조실록의 산불
1) 기유년(己酉年) 산불
성종 20년(1489년) 강원도 관찰사 이육(李陸)이 아뢰기를“2월 24일에 산불이 나서 양양부(襄陽府) 주민 2백 5호와 낙산사(洛山寺) 관음전(觀音殿)이 연소(延燒)되고, 간성 향교(杆城鄕校)와 주민 2백여 호가 일시에 모두 탔는데 오직 사람과 가축은 상하지 아니하였고 민간에 저장한 곡식이 모두 재가 되었으니, 청컨대 통천(通川)의 전세(田稅)를 옮겨 받아서 주도록 하소서”하였는데, 그대로 따랐다.
2) 갑자년(甲子年) 산불
순조 4년(1804년) 3월 12일 신축일(辛丑日) 강원감사 신헌조(申獻朝)가 이달 3일 사나운 바람이 크게 일어나 산불이 번졌는데, 삼척(三陟)·강릉(江陵)·양양(襄陽)·간성(杆城)·고성(高城)에서 통천(通 川)에 이르는 바닷가 여섯 고을에 민가 2,600여호, 원우(院宇) 3곳, 사찰 6곳, 창사(倉舍) 1곳, 각종 곡식 6백석, 배 12척, 염분(鹽盆) 27좌(坐)가 불에 타고, 타 죽은 사람이 61명이었다고 나열해 보고하니, 임금이 크게 놀라고 딱하게 여겨 따로 구휼(救恤)을 더하라 명하였다. 그리고 교리(校理) 홍석주(洪奭周)를 위로하고 타이르도록 어사(御史)를 임명하여 보냈다.
3) 기미년(己未年) 산불
철종 10년(1859년) 설악산 동쪽 동해안 일대에 불의의 대화재가 발생하여 양양부(襄陽府)에 551호, 통천군 472호, 간성군 486호가 전소하니 수천 명의 이재민이 집을 잃고 거리에서 혹한에 떨고 있을 때, 정원기(鄭元基 : 양양읍 기리)는 아들 우용(禹鎔 : 進士)과 상의 곡식 천석(千石)과 거금 천량(千量)을 내놓아 불쌍한 이재민을 구휼(救恤)하였다. 이에 이재민들은 용기를 내어 농경을 시작했고 은혜를입은 주민들이 이 사실을 조정에 상소하니 철종께서 많은 재물을 거듭 베풀어 백성을 구휼하고 화재로인한 나라의 재난을 극복하게 한 공로를 가상히 여겨 가선대부 중추부사겸 오위장(嘉善大夫 中樞府使兼 五緯將)의 관직을 특별히 하사하고 철종 11년(1860년, 경신 12월)에 가선대부중추부사겸오위장불망비(嘉善大夫中樞府使兼五緯將不忘碑)라 양각(陽刻)으로 주조(鑄造)한 철제 비석을 하사(下賜)하니, 주민이 자진하여 강현면 석교리에 비각을 건립하고 철비를 설치하여 기려왔다.
나. 1960~1980년대 산불
1) 현남면 삼형제봉(三兄弟峯) 산불
1965년 4월 15일 11:50 무렵에 현북면 어성전리에서 발생한 산불은 현남면 상·하월천리‘삼형제봉’과 정자리로 번져 1,134ha의 산림소실 피해가 있었다. 발화 원인은 미상으로 4월 18일에 진화되었다. <동부지방산림청, 2009>
『한국일보』 1965년 4월 17일 사회면에는“양양에 산불 80여 농가 대피, 산림계장 순직(山林係長殉職)”라는 제목으로 산불소식이 실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注文津에서 朴永信 記者】15일 밤 11시 50분께 동해안「삼형제봉」
(襄陽郡 縣南面 仁邱里)과 ‘명주사’ 사찰림에서 일어난 산불은 건조하고 메마른 임야 1백 20여 정보를 태우고 16일 하오 5시 현재 맹렬한 기세로 번지면서 인근 마을을 위협하고 있다. 주민 80여명이 두 차례에 걸쳐 맞불을 놓으면서 진화작업에 나섰으나 실패 어성전리(漁城田里) 산림계장 황용조(黃容祚)씨는 불길에 싸여 순직했다. 하월천리(下月川里) 80여 농가는 긴급 대피했다.
1965년 4월 17일‘삼형제봉’산불이“새벽 4시경 현북면 어성전리‘가잔동’방향에서 강한 바람을 타고 넘어온 산불로 마을 전체가 매운 연기에 휩싸여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였고, 바람은 얼마나 강했는지 작은 돌덩이가 날아갈 정도였다. 주민 100여 명을 긴급히 동원하여 방화선 구축과 맞불을 놓는 등 자체방어에 애를 쓰며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한편 현북면 어성전리 황영석이“그날은 바람이 얼마나 심하게 불었는지 불붙은 솔방울이 눈짐작으로 2~3㎞씩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며 어성전리 주민들은“화마로부터 가옥을 지키려고 지붕에 멍석을 덮고 물을 뿌리느라 밤잠을 설쳤다.”고 말하였다. 인명피해 발생상황에 대해서 현북면 어성전리 황병구의 증언에 의하면, 황용조(黃容祚 당시 43세 前 어성전 마을 이장 겸 산림계장)의“장례 절차는 고인의 생가(生家)에서 현북면민장(縣北面民葬)으로 치르고 산불진화 공적을 기려 당시 농림부에서는 농림부장관 표창장을 추서하였다.”고 말하였다.
2) 현북면 면옥치리(綿玉峙里) 산불
1972년 4월 27일 19:50경 양양군 현북면 면옥치리에서 발화한 산불은 실화(失火)로 법수치리 이○○외 1명이 논·밭두렁을 소각하다 발생하였다 이 산불은 어성전리 외 7개 마을로 확산되었다. 산림 1,180ha를 태우고 피해액 15,061천원(당시 금액)이 발생하였다. 4월 30일 22:25에 진화되었다. <동부지방산림청, 2009>
【束草·江陵】28일 오전 10시경 양양군 현북면 면옥치리 뒷산 강릉영림서의 조림사업지구에서 원인모를 산불이나 초속 34m의 강풍을 타고 이웃 어성전리, 원일전리 뒷산을 휩쓸고 29일 오전 10시 현재 불길은 거센 남서풍을 타고 장리·명지리·대치리 뒷산까지 번져 계속 동남쪽으로 퍼지고 있는데 이미 남북 12㎞에 걸친 국유림 240정보 사유림 25정보 (경찰집계)의 소나무·잡목 등 1만여 그루가 불탔다.
이불로 면옥치리와 양양군 현남면 죽정자리 등 군내 벽지(僻地) 주민들이 모두 대피했고, 경찰 예비군 주민 등이 총동원돼 철야 진화작업에 나서고 있으나 강풍에 불길이 마구 번져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
3) 설악산 관모봉(冠帽峰) 산불
1980년 5월 9일 19:40경 양양군 서면 장승리‘관모봉(冠帽峰)에서 처음 발생한 산불은 입산자 실화로 추정될 뿐 정확한 화재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 순간 최대풍속은 30m/s의 강한 바람을 타고 급속히 번져나가 대형 산불로 확산되었다. 이 산불로 산림 224ha가 소실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끼치고 5월 11일 20:00경에 진화되었다. <동부지방산림청, 2009>
산불이 나자 양양군은 양양읍 화일리(마을회관)를 비롯하여 강현면 석교리, 둔전, 물갑리 등 4개소에진화 대책본부를 분산 설치하였다. 전공무원 비상동원령을 내려 산불진화 작업에 임하도록 조치하였다. 관내 소방대원 및 예비군, 주민 등 5,000여 명이 동원되어 산불현장에 투입되었다. 당시의‘관모봉’산불진화작업에 참여하였던 양양읍 남문리에 살고 있는 전창선(전 양양군청 공무원)은“당시의 공보실 담당구역은 양양읍 화일리 소재 영혈사(靈穴寺)였다. 그런데 불길이 강풍을 타고 무섭게 넘어오자 영혈사를 화마로부터 지키기 위해 사투를 하였다. 영혈사 뒤편 산자락까지 불길이 내려와서는 이상하리만치 스스로 잦아들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1980년 5월 12일 7면에“연 나흘 불탄 설악산 350여 정보 태워”란 머리 기사로 당시의 진화작업과정에서 발생한 어려움과 인근 시·군에서 협력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보도하였다.
【襄陽 史相吉기자】국립공원 설악산 동북쪽의 외곽 해발 1천여m의 관모봉(冠帽峰) 기슭에서 국내 최대 규모의 산불이 나 연 나흘 동안 강풍을 타고 불길이 번져 국유임야 3백 50여 정보가 불탔다. 9일 오후 7시경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화일리 영혈사 뒷산 관모봉(해발 1,050m) 국유림에서 원인모를 산불이 나 이 일대와 설악산 칠성봉 남쪽 기슭까지 휩쓸어 아름드리 소나무·잣나무·참나무 등 침엽수림 3백 50여 정보를 태우고 57시간 만인 12일 새벽 4시경에야 진화작업과 때마침 내린 비로 불길이 잡혔다.
불이나자 동부영림서와 양양군은 양양읍 화일리를 비롯, 강현면 석교, 둔전, 물갑리 등 4개소에 진화대책본부를 분산설치, 속초 주문진 강릉 등지 소방차 10대 일반차량 1백20여 대와 소방대 의용소방대 1백여 명 및 예비군 주민 등 5천 3백여 명을 화재 현장에 투입했으나, 9일 오전부터 계속 불기 시작한 초속 30m의 강풍과 험준한 산세 때문에 가까이 접근이 어려워 제대로 진화 작업을 못하여 불은 인근 산악으로 크게 번졌었다.
특히, 이 산불은 6·25때 격전지였던 영혈사 북쪽 기슭으로 번지자 30여 년 동안 매몰돼있던 지뢰와 수류탄, 포탄 등 각종 폭발물이 산발적으로 터지면서 위세를 부리는 바람에 진화반은 접근조차 못해 더욱 불길의 확산을 막지 못했다. 진화대책본부는 불이 계속 번지자 10일 오후에는 화일, 장승리 등 부근 6개 마을 1천 3백여 명의 주민들을 장승국민학교에 긴급대피 시키고 불길을 차단하기 위해 화일리 일대 삼림에 미리 맞불을 질러 폭10m 길이 5백여m의 방화선을 만들어 진화작업을 펴는 등 진땀을 흘렸다.
산림청도 10일 오후 4시경 산화경방헬기 1대를 현지에 보내 소화분말을 공중살포 했으나, 강풍으로 불을 막지 못하고 철수하고 말았다. 불은 화일리를 중심으로 직경 15㎞인 둔전·물갑·서선·논화·장승리 일대 국유림과 국립공원 설악산 칠성봉 남쪽기슭(7정보) 임야를 태우고 11일 자정부터 바람도 자고 불길이 바위등성이에 가로막혀 수그러지기 시작했고 때 마침 내린 비로 기세가 꺾여 새벽 4시경에 완전 진화되었다.
다. 2000년대 산불
1) 양양읍·강현면 산불(1차 : 2005. 4. 4.)
건조주의보와 강풍주의보가 내려진 가운데 2005년 4월 4일 23:53분 무렵에 실화 또는 방화로 추정되는 산불이 석벽산 도로변인 양양읍 화일리 야산에서 발생하였다. 이 산불은 순간 최대풍속 22.5m/s의 강한 바람을 타고 급속히 번져나가 동쪽으로 빠르게 연소되면서 대형 산불로 발전하여 산림 973ha, 주택 163동(전소135동, 반소 28동)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또한 천년고찰 낙산사 경내를 태우는 등 많은 재산피해를 입히고 4월 6일 진화된 산불이다.
가) 산불발생 및 확산(擴散)과정
2005년 4월 4일 23:53 무렵 1차 산불발화 당시는 순간최대풍속 22.5m/s의 강풍주의보가 발령 중이었으며 상대습도 또한 25% 내외로 건조주의보도 내려진 상태였다.
양양 지역의 지형여건은 태백산맥을 경계로 서고동저형의 낮은 구릉을 이루고 있어 산불이 발생하면 바람 등 기상적인 영향을 받아 산불이 확대되는 특징이 있다. 산불 피해지역의 고도는 100m이하가 전체의 82%로서 경사도 20°미만 지역이 66.6%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산불 피해지역의 임상은 불에 잘 타는 소나무림 79.1%, 잣나무림 0.2%, 낙엽송림 2.4%를 차지하고 있었다.
산불의 확산과정은 분석 결과 크게 두 단계로 구분된다. 1차 산불은 4월 4일 23:53 산불이 발생 한 후부터 4월 5일 07:52 동해안까지 확산된 다음, 10:20에 산불진화대책본부에서 진화(鎭火)를 선언한 시점까지이다. 2차 산불은 4월 5일 13:00에 재발화(再發火)하여 용호리, 낙산사 등을 전소(全燒)시킨 후 4월 6일 08:00시 무렵 완전진화(完全鎭火)될 때까지이다.
따라서 산불의 확산 방향도 이 두 단계에 따라 확연히 차이가 존재했는데, 첫 번째 단계에서는 강한 편서풍(偏西風)의 영향으로 발화지점부터 산불확산 종료 지점인 동해안까지 동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거의 직선 형태에 가까운 좁고 긴 타원형으로 확산된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이때 습도가 20%미만으로 매우 건조하였으며, 순간최대풍속이 22.5m/s로 소방헬기가 진화작업을 못 할 정도의 강풍이 분 조건에서 풍향이 4월 5일 03:00에는 서풍, 서남서풍이 불어 산불의 동쪽으로 확산된 방향과 일치하였다.
그러나 2차 산불의 풍향은 서풍, 남서풍 등이 불규칙하게 불어 더 이상 확산될 공간이 없는 동쪽을 제외하고 남쪽, 서쪽, 북쪽 세 방향으로 불규칙하게 산불이 확산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확산 형태는 2000년 강원도 삼척산불과 비슷한 형태로써 4월 영동지방에 부는 강한 편서풍 의 영향으로 빠르게 동해안까지 확산된 다음 인화(引火)될 산림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동쪽을 제외하고, 다른 세 방향으로 확산되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양양산불의 평균 확산속도는 발화점에서부터 동해안에 근접해 있는 7번 국도까지 5.2㎞ 거리를 7시간 59분만에 진행했기 때문에 0.65㎞/h로 분석되었다. 최대 확산속도는 약1.7㎞를 1시간 25분 만에 진행하여 약 1.2㎞/h로 분석되었다.
이러한 최대 확산속도는 1996년 강원도 고성산불의 1.0㎞/h보다는 빠른 속도이며 2000년 삼척산불(1.6㎞/h)과 2004년 속초산불(2.0㎞/hr)보다는 낮은 수치였다.
2005년 산불피해 현장 (사천리)
나) 산불대책본부의 진화지휘(鎭火指揮) 상황
▷ 진화활동 상황
4월 4일 23:53경에 발생한 산불이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야간에 확산되자 01:10경 산불발생 상황을강원도 상황실에 보고하고 주민대피 및 가옥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예방조치를 우선 실행하였다.
4월 5일 08:00경 화일리 등 12개 리의 주민 950명의 대피를 완료하였으며, 09:00경 유관기관 회의 를 통해 진화 대책을 수립하였다.
이후 헬기 20대(산림청 13, 기타 7), 소방차 16대, 진화인력 4,294명을 투입하여 4월 5일 10:50경 소방당국에 의해 공식적인 최종진화 발표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12시경부터 시작된 강풍에 의해 13:00경부터 재발화하여 강풍을 타고 2차 확산을 하게 되었다. 특히 이날 2차 확산에서는 서풍에 의해 해안가 쪽 선형으로 확산되던 산불이 주변의 산림으로 방사형 산불로 진행되면서 진화자원의 집중적인 운용이 어렵게 되었다.
산불이 산발적으로 확산되어 농촌 민가와 주요 사찰인 낙산사를 위협하다가 14:00경에는 천년고찰 낙산사가 불에 타면서 강현면 용호리 일대 가옥도 대규모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날 진화 작전은 일몰과 함께 헬기 기동이 어렵게 되자 소강상태로 이어졌고 4월 6일 06:00부터 시작된 지상진화대원과 헬기 진화에 의해 08:00경 완전 진화를 발표하게 되었다.
▷ 산불피해 내역
공식 집계된 피해 상황은 피해액 39,395백만원으로 이재민이 163가구 418명, 주요 재산피해는 주택163동(전소 135, 반소 28), 낙산사 경내 22건(석탑 2, 동종 1, 전각 17, 시설물 2), 창고 및 부속사 309동, 소상공인 69동, 농기계 650대(트랙터 2, 경운기 43, 콤바인 11, 이앙기 37, 관리기 10, 기타 536), 농작물 9.58ha, 군사시설 12건, 가축 3,551마리(한우 2, 닭 1,852, 오리 1,006, 기타691) 수산시설 8종, 공공시설 4개소 등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다) 천년고찰(千年古刹) 낙산사 피해 현황
2005년 4월 4일 23:53에 발화한 산불이 밤샘 작업으로 간신히 진화되었으나 4월 5일 오전부터 다시 시작된 강풍으로 재 발화되어 산불이 강현면 물갑리, 금풍리, 적은리, 방축리 일대를 타고 급속도로 동쪽으로 확산되면서 대형산불로 번져 오전 07:46경에는 낙산사의 위험이 예상되어 소방헬기지원이 요청되었다.
이어서 08:10경부터 낙산사 소실을 막기 위한 진화장비 및 진화인력, 소방차 등이 긴급지원 되었으나 화마(火魔)는 15:40경‘낙산사’를 덮치게 되었다.
낙산사 홍예문이 소실과 함께 붕괴(崩壞)되었고 곧이어 원통보전, 근행당, 심검당 등 경내 주요 요사채 건물이 동시에 화마에 휩싸이면서 16:35경에는 요사채(주지실, 매점) 등이 소실되었다.
홍련암(紅蓮庵) 일대로 불길이 번지자 17:40경에 홍련암 사수를 위한 소방헬기 추가지원이 요청하였으나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다행히 4월 5일 18:00경 낙산사 내 불길은 수습되기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1469년(예종 1) 제작된 높이 158㎝, 입지름 98㎝. 낙산사 동종이 2005년 4월 5일에 발생한 낙산사 경내 산불로 인하여 용해(溶解)되어 문화재에서 지정(1968년 12월 19일에보물 제479호로 지정) 해제되는 비운(悲運)을 맞이하였다.
2005년 낙산사 산불피해 현장 (범종각)
라) 낙산사 원형복원(原形復元)
천년고찰의 문화재가 소실되자, 강원도와 문화재청, 양양군이 긴급 문화재복구를 위한 ‘낙산사복원추진위원회’와 낙산사 ‘건물복구자문지원단’을 구성하여 긴급 복원계획이 수립되었다.
우선 칠층석탑(원통보전∼사천왕문)의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른 자문과 고증을 거쳐 가람배치 설계가 마무리 된 후 본격적인 건물복원은 2006년도부터 시행되었다.
소실된 보물 동종은 실측 조사한 기존자료를 토대로 재현품을 제작하고, 칠층석탑은 정밀보존처리를, 기타 지방문화재(홍예문, 공중사리탑, 홍련암)는 발굴조사와 복원·보수를 병행하여 추진되었다.
1차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관계전문가의 자문과 고증을 통하여 원통보전은 고려말∼조선초기 다포식건물로 복원하였으며, 문화재 수리기술자와 기능장들이 직접공사에 참여하였다.
원통보전 사업비는 19억 5천여 만원의 예산으로 2006년 10월에 착수하여 2007년 9월에 완공되었다. 그 외에 종각복원 및 취숙헌, 선열당, 심검당, 홍예문 등 복원이 완료되어 2007년 11월 16일에 1차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낙산사 2차 발굴조사 결과와 금당인 원통보전의 건물 양식을 고려하여 주요 요사채는 조선 초·중기 형식의 초익공(初翼工), 주심포계(柱心包係) 이익공(二翼工) 등의 포(包 : 지붕의 하중 분산 부재)형태를 고려한 가람배치로 3년여의 공사 끝에 총 15,491백만원을 투입하여 17세기 후반 단원 김홍도의 ‘낙산사’도를 바탕으로 복원되었다. 2009년 10월 12일 오전에는 복원을 기념하는‘회향식(回向式)’이 금당(金堂)인 원통보전(圓通寶殿) 앞에서 열렸었다.
이로써 잿더미로 변했던‘낙산사’가 4년 6개월간의 복원공사를 거쳐 화마의 상처를 씻고 천년고찰 최고 전성기 시절이던 300여년전의 원형 그대로 복원되었다.
낙산사 피해복구 후 모습
2) 2005년 현남면 주리(酒里) 산불
가) 산불발생 및 확산과정
양양군 현남면 주리에서 2005년 4월 28일 15:35경 전선의 합선(合線)으로 추정되는 산불이 발생하
여 동쪽으로 확산되며 168ha의 산림피해와 주택 12동을 태우고 4월 29일 09:00 무렵 진화되었다.
나) 산불대책본부의 진화지휘 상황
대형산불이 발생했다는 신고가 접수되자 산불현장 지원을 위해 군수를 현장지휘본부장으로 부군수를 상황실장으로 하는 양양군 산불진화대책본부를 설치하여 산불진화에 총력을 기울였다.
산불진화를 위해 산림청헬기 9대, 군헬기 5대, 소방헬기 4대 등 총 18대의 헬기와 소방차 140대, 진화차 22대, 제독차 28대, 기타 진화장비 1,000점을 동원하였다.
출동 인원으로는 공무원 847명, 경찰 510명, 소방서 882명, 군인 7,700명 등 총 10,373명의 지상 진화인력을 동원하여 4월 29일 09:00 무렵 산불을 완전진화하였다.
-
- 이전글
- 1. 양양군의 수해(水害)
- 24.02.28
-
- 다음글
- 참고문헌
- 24.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