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채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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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서선리 이순형 78세)
사례 1 ◆ 수복이후의 초창기 채광
일제가 양양에서 철광(탑동, 도목항, 논화항, 가재골)을 개발하여 채광을 하다가 해방되고 북한정권이 탑동에서 철광석을 캐서 탑동에 있는 고구찌[갱구:坑口] 의 슈트[높이가 약 100여m,수직으로 90°]로 떨궈서 네루의 길이가 약 800m인갱도로 철을 싣고 도목항으로 운반하면 다시 철도를 이용 북한 청진으로 철을 운반하였는데 그때 북한정권 시절에는 광업소 소장을 광장(鑛長)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내가 6~8살 쯤 되었으니까 아마 1940년경에 일제가 선광장 입구 오아삥 부근인 자리에서 광산 개광기념일인지 뭐하는 행사인지 만국기를 쭉 내걸고 씨름과 유도경기 등을 하기도 했는데 유도경기에서 서선리 손희재씨가 일본 인과의 유도경기에서 상대방을 제압하여 통쾌하게 이기는 일도 있었다.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이 휴전되고 수복이 되자 1953년 상공부에서 채광을 시작하였다. 한국군 1101야전공단에서 콤퓨레샤를 탑동에 1대에 인부6명, 도목항에 1대에 인부 6명 배치하여 고구찌(갱구)와 갱도(坑道)가 무너진 곳을 동발이[坑內支柱木]를 세워서 받치고 청소도 하면서 철광석을 캐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초창기에는 일제와 북한이 쓰던 착암기가 굴속에 방치하였던 것을 수리하여 사용하였고, 광부를 채용하였는데 운반부 6패(12명), 감독, 잡부 등 30여명이 철광석을 탑동에서 캐서 도목항으로 운반하였는데, 그 당시 노무자는 고무신을 신고 일을 했으며 통다비[통일화], 그리고 장화는 아주 귀했다.
그후 상공부 운영체제의 광업소를 대한철광에서 인수하니 상공부에서 낙하산 인사가 내려왔는데 영월 상동광산에서 온 사람들이 더 높게 인정받았다.
초창기에는 장승리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사무실은 판자를 이용하여 탑동에 지었고, 도목항은 사무실도 없었고 원 사무실은 강태석씨 사랑방을 채광과로 사용하였고 탑동을 개발하면서 일정 때 사용하던 자리에 사무실을 지어 사용하 였다.
탑동의 채광도 1~2년만에 채광이 끝나고 양양항으로 옮기게 된 1957~58년에 양양광산이 급속도로 커지게 되었다.
임금은 48,000원 받았는데 그때 막걸리 한잔에 20원이었다. 양양항, 논화항, 도목항의 근무 조건은 비슷하지만 항장의 결정에 따라 일하는 곳이 변하였다.
도목항은 한달에 1명꼴로 사망자가 생겼다.
사례 2 ◆ 10여명의 착암조수를 양성
70년대 수항은 100여m 내려가면서 채광하였는데 10년 동안 데리고 일을 하였던 조수 10여명을 숙련공으로 만들었으며, 항내 착암공으로 일하면서 기술은 인정받았다. 항장의 권한이 막강하여 항장의 눈 밖에 나면 일자리가 자주 바뀌 었다.
어느 때인지 착암 조수가 기계로 일을 하고 있었고 운반부원이 흙을 담고 있었는데 갑자기 소리가 크게 나더니 흙더미가 무너지면서 일하던 사람이 흙더미에 매몰되어 사망하는 일도 생겼다. 사람이 사망하더라도 항장이 책임을 지지 않지만 윗사람의 눈초리를 받게 된다.
착암 및 광산 개발에 관한 좋은 방법 등을 제안하면 상장과 상품을 시상하는데 속옷 등을 받았다. 또 원가를 줄이기 위해 싼 화약을 사용하면 일하는 사람 에게는 위험성이 높아진다.
사례 3 ◆천양회사와 덕대
광산에서는 천양회사나 다른 회사에 하청을 주기도 하였는데 책임과 감독은 양양 광산에서 하였다. 본사의 권한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인사권 및 하청업자 선정권은 본사에서 가지고 있었다. 천양회사가 하청을 나가면서 덕대에 비슷한 형태로 하청을 주었다. 덕대에서 나오는 철을 빻아서 분석실로 가면 철의 혼합 률이 나왔는데 분석실에서 기준치를 정함에 따라 금액의 차이가 컸다. 이때 소장의 힘이 크게 작용한다.
사례 4 ◆ 해외건설 면접관 이명박 대통령
70년대에 현대건설에서 동남아시아에서 도로 건설을 하는데 기술자를 선발한 다고 하였다. 착암 기술자는 많지 않아서 양양 관산 기술자들이 응시하였다. 그때 착암기술자인 나도 응시하여 선발되어 해외로 도로건설 현장에 터널을 뚫는 현장으로 나갔다가 들어왔는데 그때 현대건설 서울본사에서 면접을 보는데 면접을 본 면접관이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사례 5 ◆ 탑동 마을의 사택
서선리 윗마을에 탑동 광산이 있다. 왜정 때에도 탑동에는 광산 사택이 약 50호 이상 있었는데 목욕탕과 이발소 가게 등이 갖추어져 있었으며 해방 후 이사택건물을 뜯어서 서면사무소, 서면지서 그리고 현재 상평에서 범부 다리로 가기전의 부근에 임시 학교건물 3~4실을 지을 때 사용했다고 한다. 6.25 한국전쟁후 수복되어 탑동에 광산이 한창 번성 할 때 30~40채의 작은 노무자의 집들이 있었으며 큰 아이들은 상평학교에, 작은 아이들은 장승분교로 걸어서 다녔으며, 분교에는 1, 2, 3학년까지 다녔는데 학년 당 2개 반씩 6학급이 편성돼 있었다.
사례 6 ◆ 광부의 여가 시간
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그맘때 광산이 최 호황기로 한참 잘 나갈 때 극장도 있었고 양양시내에서 광산까지 시내버스가 하루에 10회 정도 왕복 운행 할 정도로 광산마을이 활기가 넘쳤으며 광산에 딸린 인구가 아마 2만을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광산 업무가 끝난 후에는 같이 일하던 사람들끼리 경주 불국사 등지로 장거리 여행도 가고 당일로는 신흥사 하조대로 여행도 가고 갱변에 나가 천렵도하고 상평에서 돼지를 잡아먹는 즐거움도 있었다.
소장 이하 간부급들은 광산에 있는 술집에 가면 소문이 나기 때문에 속초 또는 설악산, 낙산 그리고 기사문리로 많이 나갔다.
<사진 1> 초창기 광부 이순형씨 구술 모습(20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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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서선리 이일형 80세)
사례 1 ◆ 광산취직과 광산사고
50~60년대에는 양양에 취업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공무원 하던 사람들도 광업소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임금은 100만원 정도였다. 광산에 취업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나는 탑동에 형님이 있어 군에 갔다 와서 형님에게 부탁을 하였다. 임시로 들어가서 힘들어도 광업소에 인맥을 통해서 운반부로 일하 다가 고입이 되는 길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운반부에 들어갔다. 양양에서 탑동 까지 버스가 다녔는데 그 버스를 타고 출퇴근했다.
맨 먼저 들어가니까 기선장(항에서 구르마로 광석을 실어 부린 적치장)에서 일을 했는데 한 달 생산량이 배당되어 1번, 2번, 3번으로 정해져 있었다. 나는 광석을 광차에 담아서 운반하 였다. 우리가 실어다 선광장 넓은 곳에 놓으면 아침에 여자들이 엄청나게 많이 와서 폐석은 폐석대로 철광석은 철광석대로 골라서 두어 시간 지나면 광석이 다 없어졌다. 그만큼 여자 인부들이 많았다. 선광하는 여자가 많을 때는 몇 백 명까지 근무하였다.
남자들은 약 300명(1개조100명), 여자는 200명이었다.
1번은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근무하고, 2번은 오후 4, 5시부터 밤 10시까지 근무한다.
<사진 2> 철광석 운반 1957년경
사례 2 ◆ 광부가 자꾸 죽어나와 광산 다닐 마음이 없어
조정록이 착암부로 근무했는데 항에 들어가서 운반부가 실어낼 광석을 만들어 내야하는데 광석이 무너져 빠져 나오지 못했다. 많은 돌을 위에서부터 걷어 내야 하는데 할 수 없이 밑에서 돌을 빼게 되니 사람은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돌은 많고 애간장이 타들어 갔다. 결국 밑에서부터 돌을 빼내어 사람을 꺼냈다.
하지만 사람은 죽었다. 그 후 다시 광산에 다닐 마음이 없어졌다.
탑동에서 도목항으로 발령을 받아 유덕순이랑 갔다. 도목항 항장은 이종훈 이었다. 아침 8시에 작업배치를 했다. 도목항의 굴은 5개였는데 그 안에 여러 개의 줄기가 있었다. 1중단, 2중단.....6중단까지 있었는데 유덕순은 1번으로 들어 가고 나는 2번이어서 집으로 왔다. 오후에 2번을 나오니 유덕순이 죽어서 나왔다. 나는 탑동에서 그런 일을 당하고 나왔는데 또 다시 그런 일이...... 그렇게 해서 내가 일하는 동안 열에 아홉 번은 될 것이다. 그 바람에 속초경찰서도 몇번 불려 다녔다.
사례 3 ◆ 노다지로 때리니 돈이 되네
도목항에 와서는 착암공 일을 하며 구멍을 뚫어서 화약을 재워가지고 발파를 하면 광석이 떨어져 나온다. 광산에서 착암공은 알아주는 직책이다. 그때 국영 기업체이기 때문에 대학교(한양대학교나 인하공대)를 졸업하고 3개월, 6개월 실습하고 발령을 받고 감독 주임을 했다. 그래서 아주 끝 발이 좋았다. 착암기계 공은 먼저는 조수를 두고 했는데 원 맨 돌이라고 해서 혼자서 하게끔 하게하고 ‘밑에서 구멍을 뚫어 놓고 위에 올라와서는 노다지로 때려 가지고 위에서 많이 캤다. 한방만 터드리면 온 산이 무너지니까 화약을 쪼끔 쓰고 엄청나게 쏟아지 니까 큰 이익이다. 그렇게 착암공 일을 하면서 돈도 많이 받고 그랬다.
사례 4 ◆ 감독도 죽는 상황이니
3번을 나와서 작업장을 알려주어서 작업장에 가서 조수랑 앉아서 덴조 없이칠 려고 하는데 감독이 오길 바라고 있는데 생전에 감독이 오지 않아, 얼마동안 기다리다보니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 그만큼 위험한 작업장이었다.
그 당시 도목항은 수평으로 1.5km 정도는 들어가야 현장에서 철이 나왔다.
현장에 가면 관물함이 다 있는데 슬리퍼를 신고 버스를 타고 올라와서는 옷갈아입고 신선놀음이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한 몇 시간 하다보면 나오게 되지, 토요일 일요일만 되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하고 촌에 가서 돼지를 돈을 주고 거기서 잡아 먹는 즐거운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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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속초조양동 이종욱 78세)
사례 1 ◆ 끗발은 착암공이 최고다
처음 임시직으로 들어가면 광차에 쇳돌 실어가지고 운반을 하는 일 밖에 안시켰는데 고입이 되어야 채광을 하고 착암은 오야가 했다. 나는 착암부 조수로 일을 하다가 총무과에서 채광 시험을 보았는데 광업소 연수원에서 보았다. 보통 3년이 지나야 시험을 보는데 나는 6개월 만에 보았다. 착암을 하다가 사고가 나서 중단이 되면 누가 안 갈려고 하면 청부를 맡아서 착암을 했다.
도급은 일이 힘든 곳을 회사원이 잘못하는 데를 청부(도급)를 뗀다. 기계 잘하는 사람, 발파 잘하는 사람에게 도급을 주었다. 도급은 삭꼬 내려 짖는거(지하로 내려 뚫는 것)하고 통천 올리는 것(하늘로 올려 뚫는 것)이 있는데 광석 물량은 중요하지 않고 뚫는 거리에 따라 깊이 m 수에 비례하여 임금을 받았다.
대략 1m에 한 공수니까 거의 하루 일당을 받았다.
사례 2 ◆ 한 발작자국 차이가 생사를 가른다
올려 뚫는 거랑 내려 뚫는 거랑 둘 중에 내려 뚫는 게 더 힘들었다. 물이 생겨서 펌프로 물을 퍼내면서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내려 뚫을 때는 도화선으로 발파를 안 하고 전기발파를 해야 하는데 물이 있으니까, 그게 기술이다. 작업을 하다가 한발자국 더 나가면 떨어져 죽으니 한발자국 차이에 생사를 가르기도 했다.
큰 돌이 떨어지는 건 쇠 철장대를 가지고 툭 툭 툭 때려보면 떨어질 돌인지 아닌지를 알고 캐거나 부스거나 하여야 한다.
항내 사망자는 초보가 많았으며 배테랑 들의 사망사고는 거의 없었다.
근무시간이 끝나면 그냥 집으로 가는 사람은 거의 없고 술집에 모여 하루를 풀고 “나 오늘 죽을 기 살았어”하면서 힘들고 위험한 일을 풀고 집으로 갔다.
착암공들은 운반부원들이 술도 사주고, 회식도 자주 해주었는데 착암공은 한시간 일하면 되는데 시간이 남으면 운반부의 일도 거들어주고 하니까.
기계 착암공은 착암뿐 아니라 발파작업도 많이 한다. 막장이 두 개 있는데 둘이서 다니면 발파적업을 하는데 굵은 돌을 화약으로 재워서 깨는데 한 사람이두 번밖에 못 달게 되어 있는데 그렇게 하면 광산 일이 안된다.
사례 3 ◆ 시신위에 쌓여있는 광석을 폭파하고 시신을 수습했다
사고가 발생하면 구조대원이 투입하여 사체를 처리하는데 경찰서장과 수사경찰 회사 사장도 함께 들어간다.
어둡기 때문에 간드레 가스 등을 달고 들어가는데 긴장되고 무섭고 땀이 질퍽하게 흐른다.
갱 속에서 낙반사고 등으로 사망자의 시신이 큰 광석 더미에 깔리면 광석덩이는 금만 가게 폭파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광석과 함께 시신이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시신수습이 어렵게 된다.
따라서 시신을 누르고 있는 광석에 흙을 덮고 화약을 적당량을 넣어 폭파하 는데 그때 모든 사람들은 밖으로 내 보낸다.
폭파 후 돌을 들어내면 움츠렸던 시신이 팔이 확 펴지게 되면 구조대를 놀라게 하기도 하는데 그래서 평소 항내에서는 절대 금주지만 시신을 구조할 때는 술을 적당량을 먹어도 허용된다.
시체를 수습하여 병원에 오면 의사가 사망진단서를 발부하면 경찰이 확인하여 공상처리하거나 상처가 심하면 다른 병원으로 후송한다. 시체는 다 처리한 후에 가족에게 인계한다.
사례 4 ◆ 도화선 하나 때문에 사고를
막장이 두 개 되는데 나는 10개를 재워놓고 다른 쪽에는 5개를 재워놓았어.
돌에다 화약을 넣고 진흙으로 덮어 0.5m짜리 쓰는데 심지 길이가 0.5m짜리는 금방 터지거든 나는 5개를 넣고 다른 한 사람은 11개를 넣었어. 나는 불을 붙이고 빨리 나왔는데 같이 들어간 사람은 11개를 재웠는데 미처 나오지 못해 빵빵하고 터져 들어가 보니 죽었잖아. 심지를 끊다 보면 안 끊는 수가 있어 안 끊으면 11개 재웠는데 10개는 끊어놓고 한 개는 안 끊어놨지. 그러니까 주머니에 칼을 꺼내 끊고 불을 붙여야 하는데 시간이 엄청나게 걸린 것이다.
사고 후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회사에서 걸리는 것도 ‘왜 규정대로 하지 않고 두 개만 붙여야 하는데 여러 개를 붙였느냐였다.
근데 회사에서는 경찰서에 갈 때 말을 맞추지. 두 개밖에 안 붙였다고 그러라고 했는데 사인이 안 맞아 심지가 덜 끊어졌거나 불을 붙이다 중간에 꺼졌거나 불이 꺼지면 라이터를 켜서 다시 붙여야 하니까 그게 꺼지면 다시 켜지 말고 뛰어나와야 하는데......
내가 나오라고 소리 질렀는데 안 나왔다. 그 사람은 다 하고 나오려 했는데 시간이 너무 걸린 것이겠지. 심지에 불을 못 붙이고 나오면 그게 망가지니까 다하고 나오려고 한 거야. 시간 계산을 하면 되지만 상황이 닥치면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다.
사례 5 ◆ 과장보다 많은 월급, 논 한 평에 400원
착암공의 월급은 엄청나게 많이 받았는데 그때 과장급 월급 수준으로 받았고, 마지막 퇴직할 때 엄청 많이 받았는데 시시한 과장급 월급 2배로 받았다. 그 돈으로 땅 사고 집사고, 가게를 차렸는데 그때 운반부들은 퇴직금이 6~70만원을 받았는데 나는 150만원을 받았어. 지금 돈 가치로 1억 5천만 원은 넘는 돈이다.
당시 논 1평에 400원이었다.
퇴직을 신청하고 정상적으로 항내에 들어갔는데 정신이 해이해져서인지 한막장을 해놓고 화약을 재워놓고 불을 붙여야하는데 한 막장 하고 뒤 툭 불거진데 더 뚫고서 거기도 화악을 붙여 놨거든 그리고 불을 붙이고 나왔다. 12발이면 12발소리를 듣고 끝나는데 뒤에 화약이 더 재워놓은걸 잊고 들어갔는데 그때 터져서 돌이 튀어서 손이 매랜도 없이 다쳤다. 그래도 공상을 못 냈다. 공상을 내면 퇴직금 돈이 적어진다. 퇴직을 해야 하는데.... 그래서 회사에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개인적으로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았다. 광산은 조금만 방심하면 죽거나 다치게 됨을 잊어선 안 된다. 굴속에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했다.
<사진 3> 이종욱 착암공과 상장(19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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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연창리 임준모 70세)
사례 1 ◆ 착암공의 대형사고
수항에서 발파하면서 굴진하면 운반부가 운반해 간다. 240m내려가고 광맥을 찾으면 수평으로 가면서 채광을 한다. 광맥을 따라 굴진하다보면 수직 상승 또는 하강하며 굴진한다. 수직으로 뚫은 지점은 게지(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수평으로 뚫은 지점은 걸어서 들어가는데 수항의 레벨은 240m, 300m, 400m 로 되어있었다.
운반은 광차에 실어서 10m정도 조구가 보이면 10m 밑에서 받아서 이송하고 다시 빈차로 올라온다. 기계착암공으로 보직이 바뀌면 특수 수당이 나오는데 초기(73년)에는 10만원이었는데 말기에는 7~80만원이었다.
어느 10월 12일 점심식사 후 운반부 추○○와 작업 중에 발파 지점을 확인후 돌아 섰는데 그 후로는 기억이 없다. 눈을 떠보니 옆에 돌이 떨어져 있고 몸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추○○는 감독(김○○)에게 보고하여 착암부 모두 데리고 나왔다. 들것이 없어 운반부의 등에 업혀 사다리를 내려가는데 다리는 너덜 너덜하여 질질 끌려 휴게실로 옮겨졌고 항장에게 보고가 되었다.
광차에 실려 300게이지를 타고 올라와서 용달차 비슷한 차에 실려 속초 영동 병원에 갔는데 다시 속초 의료원으로 이동하여 진료를 받았다. 허리는 심하게 다친 것뿐 아니라 장이 파열되었다고 했다.
엠블런스를 타고 강릉 동인병원으로 후송되어 수술을 받았는데 갈비뼈가 부러진 후 폐가 찔렸단다. 중환자실에서 보름을 지나고 서울의 한양병원으로 옮겼다. 6개월을 지나고 뼈가 엉겨 척추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했다. 다시 인천 중앙 병원(산재병원)으로 옮긴 후 신경전문의에 의해 척추에 핀을 꽂고 수술을 했다.
사고 후 하반신 불구가 되어 광산사고 후 지금까지 국가 산재 연금을 받고 있는데 초창기에는 60만원을 받았고 지금은 약 300만원과 아내의 간병비 100만원 받는다. 그때 같이 일을 했던 동료들이 서로 내왕(연락)을 잘 하지 않고 지내는데 그들도 막상 나를 대하면 안쓰럽고 애처로워서 그리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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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오색리 김호섭 63세)
사례 1 ◆ 최초 북한땅굴 발견한 을지무공 유공자가 광산땅굴 광부를
최초 북한 땅굴을 발견한 공로로 제대하면서 가고 싶은 직장을 말하라고 하여 그때 양양에는 좋은 직장이 없어 여기 저기 알아보다가 양양광산이 제일 나은것 같아서 입사하게 되었다. 김씨는 입사 처음 경비실에서 근무하였는데 임금이 적어서 선광과로 옮겼다가 다시 채광과로 옮겨 15년을 근무하였다.
사망사고 소식을 들으면 술도 많이 마시고 항에 들어갈라치면 머리가 쭈뼛쭈뼛 서기도 했다. 그러다 채광을 하다가 돌이 떨어져 허리를 다쳤고 로다로 광차에 광석을 싣는 일을 하였다.
발파를 하는데 동바리가 무너져 두 명이 죽고 김철호 감독이 와서 현장 검사를 하던 중에 지주가 물러앉아 감독을 포함하여 여럿이 다쳤는데 돌이 어깨를 스쳐서 피가 나고 걸어 다니기 힘들었다. 그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있다.
1971년 입대하여 일등병으로 6사단 19연대 1대대 2중대 근무시절 밤 보초를 서는데 11시 20분 ‘공 공 공’ 하는 소리가 들려 분대장에게 지하에서 나는 소리라고 분대장, 중대장, 대대장에게 보고하고 땅굴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굴 아니면 광산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실이 보고가 되어 소리가 나던 곳을 파 내려가니 북한 땅굴이었다. 연대 장이 돈을 3만원을 주며 나가서 술도 한잔 하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꽃다 발을 주었다. 그 꽃목걸이를 목에 걸고 헬리콥터를 타고 휴가를 받아 양양에 들어서서 낙산을 지나 정암리 도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나를 환영하기 위해 양양 남자, 여자 고등학교 학생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학생들이 물치 비행장까지 도착하려면 시간이 아직 남았다고 하면서 조종사가(중령) 우리 집을 안내하라고 하여 현남면 인구집 근처까지 가니 때마침 동생이 나와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는데 정말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기수를 돌려 물치 공항에 내리니 양양군수 원낙희 군수가 환영을 나왔다. 양양 남녀 고등학교 학생들이 환영식을 해 주었다. 군수 찝차를 타고 양양초등학교 교무실까지 와서 환영을 받았다.
그때 병장 계급장을 달고 부대에 복귀하여 부대 생활은 아주 편하게 보냈다.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 군단장 표창도 받고 뒤에 대통령훈장을 받기 위해 연대장 차를 타고 청와대로 갔다. 여의도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축하 속에 훈장을 받았다. 땅굴에 관한 상을 받은 사람은 77명이었고 나는 가장 높은 을지무공 훈장을 받고 국가유공자가 되었고 광산을 퇴직하고 현재 오색 그린야드에 근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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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범부리 이형섭 74세)
사례 1 ◆ 탑동에서의 채광
군대 갔다 와서 임시부로 들어갔는데 운반부에서 둘이 광차를 밀고 선광장에 가서 부어주면 선광부 여자들이 폐석과 광석을 골라냈다. 한번 발파를 하면 보통 15에서 18광차정도 나오는데 그걸 몽땅 치워주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 발파를 한다. 큰 덩어리는 해머로 깨고 더 큰 광석은 기계로 구멍을 뚫어 한 번 더폭파를 한다. 그러니까 한 교대 지나서 운반부가 치우면 그 다음 교대가 기계로 하고 발파하고 치워내고 그러니까 한 교대 쉬어서 하는 것이다. 따로 실어주는 사람은 없고 내가 홉바에 담아 광차에다 실어 밀고 나온다.
탑동은 그렇게 길지 않았고 논화항은 약 300m 정도 되었다. 처음 들어가는 사람은 못 찾아 나온다. 굴속이 거미줄 같아서 한번 들어갔다가 나오라고 하면 길을 찾지 못했다. 탑동은 광차가 약 20대, 광차 1대에 2명씩 전체 40명이었고 착암공은 두 사람 한 조로 여기서 뚫고 저기서 뚫고 했다. 일하는 사람들은 서문리, 양양, 조산 그런데서 왔고 처녀들이 더 많아 서로 눈이 맞아 결혼도 했다.
외 사촌형이 서면 파출소 지서장으로 있어서 착암공을 배우라고 착암부 조수로 보내주라고 하여 거기서 뒷심부름 다 해주고 착암을 금방 빠르게 배웠다. 그래서 착암부 정식이 되었다.
사례 2 ◆ 철광엔 진폐증 환자가 없다
착암부에서 광석에 구멍을 뚫고 화약을 너무 많이 넣으면 광석이 다 깨져 나오고 적게 넣으면 너무 적게 나오니까 평균 1m에서 1m20cm를 뚫을 수 있을 만큼 (약 16~20개)의 화약을 넣는다. 그리고 2~3시간이면 끝났다. 갱도에 떠 있는 광석 가루가 폐로 들어가면 폐가 나빠져 진폐증 환자가 생긴다고 마스크를 쓰고 한다. 하지만 철광 착암부들은 석탄광업소처럼 진폐증 환자가 거의 없다.
착암부가 발파로 위험하긴 해도 착암 작업을 끝내면 먼저 나와서 씻고 기다 리고 있는다. 그때 물이 적어서 물은 사용하지 말라고 했을 때 빨리 할라고 마른 가루를 막 털어내고 가래를 뱉으면 가래가 새까맣게 나온다.
사례 3 ◆ 군 미필자로 쫓겨나다
5.15혁명이 나고 군 미필자는 강제 징집하였다. 양양광업소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모든 직장에서 군 미필자들은 죄인 취급을 당하여 퇴직금도 받지 못하고 쫓겨났다. 억울하여 춘천에 제소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사례 4 ◆ 선광장 여자 노무자에게 팔씨름을 지다니
양양 선광장에 서문리 사는 처녀가 팔씨름을 잘한다고 해서 출근해서 팔씨름 한번 하자고 했어. 나도 팔씨름 어디 가서 한번 도 지지 않았거든 근데 그 여자 한테 졌다니까. 그러고 나서 그 여자한테 회사에서 월급을 더 많이 주었다고 하더라고.
사례 5 ◆ 작업복도 다려 입고 화장도 예쁘게 한 여자들
그 당시 내가 광산 다닐 때 사내 결혼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서넛 정도 되었다.
선광장에서 일하는 여자 노동자는 멋을 부리기 위해 작업복을 다려 입고 화장을 예쁘게 하고 일하러 가는 아가씨들이 많았다.
광업소에서는 미인대회도 있었는데 미인대회에 입상한 처녀는 많은 총각들이 사귀려고 시도하였고 그중 범부리 이형섭씨는 서문리에 사는 미인대회 입상자 에게 결혼하자고 하였는데 이 아가씨 집에서는 반대를 하였지만 인연이 되어 결혼에 성공하여 여러 총각들의 부러움을 샀다. 여자들은 대부분 결혼을 하면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었다.
선광장 자체에서 노동자의 의욕을 불어 넣기 위해서 당일동안 하조대, 설악산 등으로 놀러 가기도 하였다.
사례 6 ◆ 갈천 구룡광산으로 돈 벌러 갔다
구룡광산에 특별착암부로 해서 집사람하고 같이 갔는데 갈천에 집을 얻어 살았다. 구룡령 옛 길에 있는 광산인데 철을 캐서 삭도(케이블카)로 옳겼다. 월급을 간조라 고 다발로 주었는데 그렇게 많이 벌어서 땅도 사고 그랬지.
구룡광산 작업환경은 양양항에 비해 턱없이 좋지 않았다. 거기에는 통천을 할수 있는 사람이 없었는데 굴속에 광맥이 이상하게 7~8도 가량 기울려져 있었다.
광산에서 술 좋아하는 사람들은 유유상종이라고 자주 만났다. 그래서 매달 가불하고 딸린 식구가 있으니까 잔업도 하여 돈을 만들어야 했다. 고참 들이 젊은 사람들을 데리고 다녀서 20살도 안된 사람들은 아가씨들이 동생, 동생하며 가까이 했는데 젊은 청년들은 부끄러워 술잔도 겨우 받았다. 고참 들이 젊은 사람들을 술집에 데리고 다니며 술 마시는 법을 가르쳤다.
월급을 타면 술집에 많이 다녔는데 일을 같이 하던 동료가 나를 데리고 가는 거야. 그러니까 그때 나는 20살도 안됐는데 술집 여자들이 나보고 동생 동생 그러더라고. 그래서 얼마나 창피했는지 나도 남자인데. 그 형뻘 되는 사람들과 다니면서 술 마시는 법도 배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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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장승리 미나미골 김종구 65세)
사례 1 ◆ 채광감독의 일과
광산에 자격증이 모두 7개인데 (항내, 항외, 기계, 발파, 착암, 쇠석기. 외1개) 자격증이 없으면 감독을 할 수 없었다. 또 안전에 대한 자격증은 필수였다. 당시에는 통풍이관계가 원활하지 않아서 발파를 하고 난 다음에 앞이 안보여요.
앞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2인 1조가 되어 광차를 밀고 수 십대가 광석을 운반 하는데 광차가 보이지 않으니까 육성으로 광차! 광차! 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거리 측정이 안 되는 거예요. 광차가 뒤에 와서 치면 광차 연결 밤바라고 해서 그게 꼭 장딴지 아래를 치게 되어있어 다리가 부러진 사람도 많고 나도 한번 부러 졌지. 그게 잘못 치면 생명도 위태롭게 된다. 하지만 각자 작업량에 대한 욕심 때문에 흙먼지가 눈앞을 가려도 들어가게 된다. 광차 사고는 매월 10건 정도 났다. 그만큼 열악한 환경이었고 당시 먹고사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막장 인생이라고 한탄을 하면서 작업을 계속했다. 하루 세끼를 어떻게 먹느냐가 문제였다.
임금은 본인 노력에 달려 있었다. 자기 책임량을 하고 그 후에 도급을 많이 하면 공무원 봉급보다 많았고 책임정도하면 비슷한 보수를 받았다.
사례 2 ◆ 먹고 살려면 인내를...
추운 겨울 눈이 많이 내려 병반 출근이 밤 11시에 출발하는데 현장으로 안가고 엉뚱한 방향으로 간적이 있다. 눈 때문에 길이 전부 없으니까 엉뚱한 제방 둑으로 가서 굴러 떨어진 적도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사는 방식이 너무 처량했고 그래도 먹고 살아야 되기 때문에 그 한심한 생각을 꾹 참고 인내하면서 출근을 했던 그런 생각이 나고 그랬다.
사례 3 ◆ 여탕 구멍에서 눈을 찔렸다
70년대 후반 목욕탕이 발전실 옆에 있었는데 그 발전실에서 나오는 온수를 이용하여 목욕탕을 운영했다. 그때 여탕과 남탕 사이에 널판 짝으로 막았는데 널판에 옹이구멍이 뚫어져 있어요. P모씨가 여자 쪽을 넘겨보다가 눈을 찔렸다.
남탕 쪽에서 들여다보고 막아놓고 했는데 그 소문이 여자들에게 알려져 여자들이 벼르고 있다가 구멍을 열면 꼬챙이로 찔렀던 것이다. 목욕탕에는 양양에서도 목욕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영화관도 속초나 강릉보다 프로가 빨리 내려와 이 지역 영북권 에서는 거의다 장승리 광산촌으로 먼저 영화구경을 왔다.
사택은 건물이나 외관상으로 특이한 게 없었는데 사람들은 특이한 게 많았다.
8도에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사니까 각자 사는 방식이 천태만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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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상평리 윤용호 82세)
사례 1 ◆ 험난한 광업소 취업의 길 고입 월급에 절반인 임시부 월급
60년 4월에 입사했는데 종업원이 약 1,300명 정도 인데 지인의 소개가 없으면 들어갈 수 없었다. 처음 임시로 들어가서 일을 잘 못하면 “너 내일부터 나오지 말아!” 하면 그만이야. 일을 잘한다 싶으면 입사시켜 주었다. 그러니 능력이 부진하고 빽이 약하면 다음엔 안 받았다. 어떤 사람은 6개월 만에 입사가 되고 어떤 사람은 9개월 만에 입사가 허락되었다. 그건 대학을 졸업하고 와서 연수해서 보직 받은 젊은 사람한테 잘 보이면 고입이 빨리 되었다.
고입 월급은 45,000원인데 임시부는 그 절반이었다. 그때 돈 45,000이면 큰돈 이었다. 고입은 위험수당, 야간에 일하면 심야수당, 또 일요일에 일하면 노는날 일한다하여 자기 기본수당에 60% 그래서 월급이 많았다.
착암공도 바로는 안 되고 숙련공 밑에서 조수를 하고 그 숙련공이 작업 중에 공대출신들이 와보고 그 광업소 내에서 채광과장이 제일 생산과장이고 그분이 제일 높은 분이니까 일주일에 한 번씩 항내를 현장답사를 하고 그러면 대학 나온 분들이 실습을 끝내고 보직을 받아가지고 광부들의 점수를 매기게 되었다.
처음 굴을 뚫을 때는 가까워서 좋은데 레일 길이가 6m 이니까 점점 들어갈수록 힘들어진다. 운반하는 사람들은 같은 발파를 해 놓았는데 7~8광차 나오는 곳도 있고 14~15광차 나오는 곳도 있어서 발파의 기술의 표시가 나는 것이다.
감독한테 잘 보여야 하기때문에 그때 담배가 진달래인데 담배를 사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일요일이면 이색적인 먹을 것을 갔다가 주고 그랬다.
지질이 안 좋고 암반이 안 좋으면 동발을 하는데 7~8발짜리 동발을 해야 하는데 가지러 가기 싫으니까 11~12발 짜리를 잘라서 쓰는 거야. 그럼 4~5발밖에안 남으니 그걸 어디다 쓸데가 없어 감독이 와서 보고 4~5발짜리 저렇게 쓰면 짧게 남은건 어떻게 할 거야고 했다.
사례 2 ◆ 위조된 작업일지
작업일지를 보면 딴 사람들은 이렇게 굴을 뚫고 들어가다 쇳돌 광맥이 끝이 나면 더 이상 가야 쇳돌이 없으니까 옆 천정 꺼를 털어 먹느라고 경사지게 들어가서 제일 밑에서도 수평으로 캐 놓고 없으면 다시 5m를 수직으로 올라가서또 다시 수평으로 파 들어가서 광석을 캔다. 이렇게 다 해먹다보니까 이제 천반 놓은걸 털어 먹어야 하겠으니까 이제 고참 된 사람들은 그 위험한데 가서 구멍을 다 뚫어놓는데 나중에 대 발파로 내려 깨서 파먹고 그렇게 했다.
그 안에서 뚫는 피트라는 것이 제일 짧은게 1m짜리가 있고, 1m20cm가 있고그 다음에는 1m50cm가 있고 그 다음에 4m가 있다. 하다 보면, 4m를 끝까지다 뚫다 보면 작업을 하면 바람이 약해가지고 준비를 하고 해도, 15~16개 밖에못 뚫었는데, 다른 교대 근무자들은 20~21개씩 뚫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니 하루에 5구멍씩 적게 뚫었으면 한 달이면 150구멍을 덜 뚫은 것이다. 그래서 주임은 체면이 안 섰었거든. 그러기에 ‘천공 작업일지를 다시 확인하고, 장전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랬거든 그러더니 이 양반이 내려와서 다른 두 교대에서 한 걸 찔러 봤는 데 제 길이를 다 뚫지 않아서 이게 들어가다 말고 하니까, 결과적으로는 작업일지가 항장뿐 아니라 채광과장한테까지 올라가는데, 이렇게한 달 동안 그렇게 속였으니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 책임을 물어 우리 항 주임이 해고가 되었다.
논화항 안쪽에 사람이 안 나가는 곳인데 일주일에 두 번 경비가 돈다. 주임 아들이 개인 광업소에 취직을 했는데 그래서 착암기를 가져간 건지 그랬는데 그때 경비를 상이용사들이 섰다. 우리 주임이 채광과장한테 ‘물체가 이동됐습니다.’라고 보고 했다. 그런데 잠복근무를 하던 3명이 주임이 가져가는 걸 잡았어요. 주임이 자기가 가져가 놓고는 나한테 덤텡이를 씌우려 했던 것이다.
사례 3 ◆ 먹는 것이 급급해서 광산을...
그때는 저마다 먹고사는 게 급급해서 내가 광산에 가야 우리 식구가 산다. 힘든 걸 모르고 살았어요. 지금은 잘 먹고 잘 사니까 뭐 힘들다 누구 흉도 보고잘 한다 못한다 말하지만 그때는 누구 말할 게 없었다. 그래 다른 사람들은 오직 내가 이거 안하면 우리 식구 죽는다는 그런 결심으로 댕겼고 이 지역 노무 자들에게 고입반 시켜준다고 막 쥐어 땡겼거든요. 그래서 나한테 와서 3개월씩 연수하던 분들이 보직을 받고 나니 일꾼들 출근역 사람들 중간에서들 고참 들이 다 붙잡네. 이제 3개월 기한부로 그래서것을 폐지해 달라고 하는데 그런데 가담하면 안 되겠어서 대학교 졸업하고 보직 받은 분들에게 ‘제가 여기 몇 사람 이렇게 가르쳐온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도 저기 가담하면 안 되지 안느냐고’ ‘ 아, 가담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 사람들한테 ‘그 사람들이 붙잡으면 별도로 가져오지 말고 빈 몸으로 걸어오라’ 말해주었지. 그 후 그 사람들은 3개월 만에 고입이 되었다. 그 후부터 나를 생산요원들을 보호해 주고 굴 안에서 쓸 자재 쓰고 참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도 받고 그랬지.
사례 4 ◆ 수색을 논하면 → 수색은 무색이다
처음 들어가니까 조건 나쁜 데는 둘이 8광차만 책임량이야. 그래 8광차만 하면 시간 될 때까지 놀수 있다. 그리고 조건이 좋은 사람들은 굴 안에서 6시간 노동인데 1시간 반 동안에 다 하고서 산에 다니면서 버섯도 따고 송이도 따고 그때가 재미있었는데, 그런데 내가 즐겁고 좋은 것은 화약 치우고 바로 일을 해야 하는데 바로 화약을 함부로 못 맡기니까 화약주임이 약시기를 기본만 가르 쳐줘 그 작업장내에서는 화약취급자격증을 주고 그럴 때 이제 난 고참 쪽에 속하니까 놀러 다니고 그랬는데 과장이라는 분이 그래 ‘윤용호씨 퇴근할 때까지는 작업장 이탈하지 마세요.’라고 산에 다닌다고 말할 때에는 내 자신이 그 말을 받아들이면서도 잘못된 느낌을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어느 날 일주일 강의를 하더니 시험을 본다고 그래요. 그래서 동료와 셋이서 산에 댕기다 내려오니 과장이 호통을 치는 거야. ‘왜 시험 볼 때 안보느냐고.
거기 몇 사람들이 하는지 그 사람들 벌써다 지정을 되어가지고 우린 들러리로 하는거 뭐 하러 시험을 보느냐. 나는 거기 해당이 안 되어서 포기했다니까 그런 말이 어디 있냐고 했다. 시험장에 가니 칠판에 ‘수색(水色)을 논(論)하라.’ 문제는 저거니까 답을 하라 이거야. 그래서 내가 구두로 수색은 무색이라 했지.
사례 5 ◆ 밀가루냐 쌀 닷 말이냐
철광석을 운반하는 사람은 조건 좋은 데가 3번이 안돼요. 그래서 기본 댓 수를 얼마 정해놓고 그 외에는 얼마든지 해도 그걸 도급 단가로 그 사람들을 주면 그 사람들이 사회에 나가서 밀가루라도 사 단가을 것 아니냐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디어를 보완하고자 한 달에 한번 씩 여러 사람들의 종합적인 의견을 듣더라고요. 도급으로 줘도 괜찮다고 한 달 만근을 하면 쌀 닷 말을 더 주든가 그렇지 않으면 도급단가로 더 주든가 우린 가족들하고 그 것이 제일 급하니 돈하고 쌀이 좋다고 했다. 말에게 보수를 많이 주면 아무말을일을 해도 힘들지 않다고 했지요. 그 말이 광업소 소장님서부터 그게 굉장한 파급력을 가졌으니까 누가 본다고 일하고 안본다고 일면 쌀그 그런 사람이 없었다.
사례 6 ◆ 논화리 가재골 광산 굴속에서 전해오는 이야기
6.25 한국 전쟁이 한창일 때 논화리 마을 주민들이 가재골 굴속에 피신하고 있었는데 그날은 국군이 오더니 ‘그 안에 사람들이 없느냐’고 물어서 ‘예 있습 니다.’, ‘몇사람 있느냐?’ ‘12명 있습니다.’, ‘제일 나이 많은 사람이 몇 살이냐.’ 그래서 ‘○○살입니다.’ 했더니 모두 세워놓고 한 사람씩 나오라고 하고서는 몸을 다 털고 조사를 하는데 어느 아주머니 뒤에 있는 네분 중 중간에 있는 남자가 벌벌 떨고 있기에 그 여자가 ‘왜서 그리 떠슈?’하니 내가 여기 당증이 있어서 죽었다고 하면서 말도 못 하더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 당증을 손에 받아 쥐고 구겨가면서 앞으로 나가니 군인이 왜 먼저 나오느냐고 묻기에 내가 오줌을 못 참아서 오줌을 누려고 굴 안으로 더 들어가면 도망간다고 할까봐 먼저 나왔다고 하니 거기 앉아 누라고 해서 거기에 앉아서 오줌을 누운 다음 구겨진 당증을 ○○안에다 넣어 감추었다. 그래서 그 사람도 살고 모든 분들이 무사 했는데 논화리 박씨네 가문의 그 며느리 때문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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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남문리 최병호 78세)
사례 1 ◆ 배구선수 항장
1961년 10월 23일부터 1992년 1월 15일까지 근무하였고 1993년에 폐광이 되었다.
처음에는 2개월간 항내에서 굴진 청부를 맡게 되었는데 수직 100m 수평
50m에서 개척하는 업무를 하면서 성실한 업무로 임시부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임시부에서 2~3년간 일을 하다가 정식 근무자가 되었다.
1964~5년도 양양광업소 연수원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교육 및 시험을 통해 자격증을 취득이 가능했다. 노조 지부장은 출장비만 받아도 가족이 먹고 살만큼의 비용이 나왔다.
광산 노조는 임금문제, 복지 후생 문제 등을 회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였다.
양양광업소 노조는 예전의 모든 노조들이 다 그러하듯이 회사에서 혜택 가능한 부분을 모두 받고, 본사와 결탁을 하고 행동을 했다.
회사 계장급 이상은 맹원에서 빠지고 그 외의 노무자를 포함한 직원은 맹원으 로써 맹비를 내고 맹원들은 좋은 정보를 노조에 알리기도 했다. (맹원 = 조합원) 현장근무 하고, 본사에서 월 1회 정도 내려와서 결과를 보고 해주고, 노조위 원장이 본사로 올라가서 임금 상승폭을 조절하고 와서 보고해 주었다.
사례 2 ◆ 양양항장때 3명이 사망
낮에 술을 마시고 저녁에 출근하는 사람에 대한 사고 위험성이 높았음. 돌에 맞거나, 흙더미에 묻히는 경우, 갇혀있는 사람을 구조해 내는 와중에 다치는 사람 등 업무 및 인명 구조 중에도 사고가 많이 발생 하였고, 따라서 사고 미연 방지와 사고 확장 방지 교육을 하였다.
인명사고가 나면 사체를 꺼낸 이후 사나흘 정도의 시간동안 절단 사망 및 신체파열 부분 등을 우리가 전부 수습하였다.
양양항장으로 있을 때 3명의 사망사고가 발생하였고, 양양항 에서는 감독 1명을 포함해서 약 7~8명 정도 사망사고가 발생하였다.
<사진 4> 당시 배구선수로 활약한 최병호 항장(1970년경)
사례 3 ◆ 양양광업소 운동부의 활동
양양광업소에는 배구는 67년도에 축구는 61년 이전서부터 1~2년간 했고 야구는 63~4년도에 사무직원들이 친선경기를 했다.
양양광업소의 체육대회는 매년 7월1일 개광 일에 시행하고 채광, 선광, 총무가 팀을 이루며 전체 공휴일로 정한다.
근처 거주 가족은 모두 참가하고, 과 별로 특별 음식물 준비하여, 장승분교에 모여서 했으며, 종목은 배구, 축구, 마라톤(양양시내 로터리 왕복 코스)하였고, 마라톤은 최용규(현재 강릉거주)감독이 우승을 한 적이 있다.
사례 4 ◆ 서울과 울산으로 직장대항 배구대회 출전
4H 재건 촉진회의 서울 직장대항이 있었는데, 대한항공 빌딩의 대한철광 팀, 인천 중공업 팀 등 6~7개 회사가 모여 체육대회를 실시하였으며, 양양광업소 2 명을 포함해 대한철광 본사 직원들이 대회에서 1등을 하게 되었음.
울산 광업소에서도 울산 시내 직장 대항이 있었는데 경찰 등 7개 회사 간 체육대회에서 울산광업소 팀(양양광업소 2명을 포함)이 1등을 하였다.
사례 5 ◆ 걸어서 퇴근 시에 호랑이를 접하다
표창장은 노조위원장, 군수, 도지사, 전국광산노동조합장 등을 상을 받았다.
밤에 통근버스를 놓치면 캄캄해서 막대기를 들고 길을 찾으며 퇴근을 했고, 겨울철에 술을 마시고 퇴근하는 길에 동굴 등에 들어가 빙판에서 미끄러지면 방향을 잃게 된다. 예전에는 철길 왼쪽에 사람이 피할 수 잇도록 사람 왼편에 키하나 정도의 높이의 틈새가 있었는데, 그런데 사람이 광산에서 내려오다가 죽었 는데 상평에서 호랑이를 만나서 죽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평소에는 땀이 나지 않는데, 어느 순간 섬뜩하면서 진땀이 많이 났었고, 눈썹에 진서리가 낀 것으로 보아, 호랑이를 본 듯하다고 하였다.
사례 6 ◆ 위조 월급봉투와 봉급 가로채기
광부들은 단합대회를 한답시고 자주 모여 술을 마신다. 봉급날은 납작한 봉투를 가져다주거나 아주 적은 금액을 주어 살림살이가 어려웠다. 어떤 광부는 다른 봉투를 만들어 비자금을 만들기도 하였다. 봉급날은 술집 마담들이 경비실 앞에 죽치고 기다리다. 봉급을 가로채는 일도 있다. 그래서 인감증명원을 제출 하고 인감도장을 찍고 월급을 내주었다.
가정 살림을 돕기 위해 남편이 광산에 일하러 간 사이에 남의 일을 해 주거나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파는 부인들도 있었다. 돈을 알뜰하게 살림을 산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2대에 걸쳐 일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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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최병호 부인 조방원여사 77세)
사례 1 ◆ 정성을 다하는 광부들의 아내들
결혼 초기 시절에는 시계가 없어서 밤에는 도시락을 싸주기 위해 밖에 나가 하늘의 샛별을 보고 밥을 지었으며, 애기가 울면 남편이 잠을 설칠까 봐 저녁에 바깥에서 애기를 달래며 재우고, 시계가 있는 집에서 시간을 물어보고 통근 버스시간(밤 12시)을 맞춰 집에 들어와 남편의 잠을 깨워 출근 준비를 해 드렸다.
<사진 5> 최병호 항장 표창장(19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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