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태평실 및 선광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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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연창리 백태균 82세)
사례 1 ◆ 반공포로 출신이 근무한 태평실
평안남도 덕촌 출신으로 반공포로로 나와서 57년도부터 군사 혁명 때 까지 재직.
55년도 양양광업소 초대 사장 백홍석(평안남도 덕천 출신)이 전역과 동시에 상공부에서 초대 사장으로 왔다.
55, 56년에 철을 캐기 시작했고, 일본에 유태화가 우리나라 대사인데, 그때는 철을 일본사람들이 사가지 않아 산더미처럼 쌓아놓기만 하지 수출은 하지 못했다.
일본 미쓰비시에 수출을 하지 못하게 되어 문을 닫을 지경까지 다다르게 되었으나 수출 활로가 없어서 사람을 줄였다.
영주에서 노무자 100명을 받았지만, 임금을 돈이 아닌 쌀로 내주었다.
58~9년도에 다시 수출활로를 찾았으며, 노동자는 지속적으로 일하게 되었다.
한때에는 선광장에서 철을 실은 차가 태평실로 오면 무게를 달아보고 톤수가 미달되거나 초과되면 태평실 앞에 있는 철을 어레이[철사로 만든 삼태기]로 퍼담아서 차에다 발판을 놓고 타고 내리면서 규정 톤수를 채워서 보냈는데 나중에는 그냥 무게만 달아서 차를 보냈다. 철은 통상 한 학구에 2Ton 정도 나갔다.
차 드나드는 만표를 했고 20톤 짜리 태평으로 차량 무게 측정을 하였다. 태평실에서 부조리에 대한 그런 일은 할 수가 없었다.
<사진 21> 당시 철광석을 하역하는 모습(1957년경)
사례 2 ◆ 대포 외항에 화물선이 좌초되다
태평실은 2교대. 12시까지 8시간 근무한다. 늦게 들어와도 저녁 6시면 끝이 났고 태평실과 연관이 있는 속초 사무소도 광석 취급하는 곳이 있었는데 그 당시, 속초 출장소에 하역을 하고, 배에 실어서 묵호까지 가는 루트와, 속초 부두 에서 대포항까지 작은 배에 철을 싣고, 본선(일본가는 배)에 적재를 했다. 대포앞 바다에 철을 싣는 배(5000Ton)가 암초에 걸려서 물에 빠진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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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서문리 한종성 83세)
사례 1 ◆ 이북서 피난 나온 노무자들
회사에서 국가 유공자라고 해서 입사하게 되었다. 내 몸이 좀 불편하니까 업무에 있어서 일하는데 불편함이 없는 자리로 옮겨주니까, 일하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상이군인 경비들과 노무자들을 포함해서 2~30명이 같이 근무했다.
광업소 일하면서 노동자들이 월급일 이전에 가불을 해가서 술집에서 술 받아 먹고, 그러다가 돈 없으면 가서 외상으로 먹고, 다음 월급날 되면 외상값 갚 거라 다시 가불하고 그랬던 사람들이 많았다.
사례 2 ◆ 남녀가 눈이 맞아 소문이
수선부들이 선별하는 걸 그땐 손으로 다 골라냈다. 폐석을 여자들 양쪽에 마주서서 폐석을 골라내지만 남자들도 그 모퉁이에서 벨트를 조정하는 일을 하면서 서로 어울려 일을 했다. 그 속에서 남여가 서로 눈이 맞아 누구누구와 연애 한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난다. 이북사람들도 더러 있었고, 당시 피난 나온 사람 들도 있었다.
우리 아군들이 압록강 까지 갔다가 후퇴할 적에 대부분 휩쓸려 나온 사람들 인데 월남한 사람들도 여기 광산 사람들과 똑같이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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