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사이트 내 전체검색
전체검색 닫기
양양문화원
HOME 문화원소식
  • 자료실
  • 낙산사 시문
  • 자료실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낙산사 시문

    양경우

    페이지 정보

    조회 419회

    본문

     

    ○ 관음굴(觀音窟)      제호(霽湖) 양경우(梁慶遇) 126)


    부처님 전 향로에 자단 향 사르니 紫檀燒罷佛前爐

    소나무에 이슬 떨어질 때 외로운 학이 우네 松露翻時獨鶴呼

    새벽달 가을 산은 고요한데 門掩秋山五更月 

    고승은 문 닫고 수정 구슬 한 없이 돌린다오 老僧輪盡水晶珠


    『江原道誌』


    ----------------------

    126) 양경우(1568,선조 1~?)의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자는 자점(子漸), 호는 제호(霽湖)·점역재(點易齋)·요정(寥 汀)·태암(泰巖)이다. 아버지는 충장공 양대박(梁大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 양대박이 창의하자, 아우 양형우(梁亨遇)와 함께 아버지를 보필하였다. 양경우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고경명(高敬命)에게 갔는데, 고경명은 양경우에게 기무를 맡겼다.

    1595년(선조 28)에는 격문을 돌려 군량 7천 석을 모으는 공을 세우니 조정에서 참봉에 제수하였다. 1597 년(선조30) 정유재란 때에는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공을 세웠다. 그 해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죽산현감· 연산현감을 거쳐 판관이 되었다.

    1616(광해군 8)에는 중시(重試, 조선시대에 당하관 이하의 문무관에게 10년마다 한 번씩 실시하는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로 승진하였고 이어 봉상시첨정에 이르렀다. 그 뒤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배웠다. 문집 『제호집(霽湖集)』은 『양대사마실기(梁大司馬實記)』와 함께 묶어 간행되었다. 조정에서 이조참의를 추증하였다. 정조 때에는 정려(旌閭)를 내렸는데 거기에는 ‘부자충의지문(父子忠義之門)’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