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국사] 위치와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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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국사(城國寺)는 강원도 양양군 서면 오색리 산 1-25번지(약수길 132) 남설악(南雪嶽) 주전골(鑄錢谷) 등산로에 자리한 대한불교관음종(大韓佛敎觀音宗, 본사는 서울 낙산의 묘각사) 소속의 절이다.
성국사(오색사) 인법당 전경
성국사는 9세기 이전부터 존재하던 절이었으나 절의 창건전말(創建顚末)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성주산파(聖住山派)의 개산조(開山祖)인 무염선사(無染禪師 800∼888년)가 13세(跨一星終)에 설악산 오색석사로 출가하여 능가선(楞伽禪)의 대가인 법성선사(法性禪師)를 스승으로 모셨다는 기록이“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선생이 지은 『고운집(孤雲集)』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사지에 있는 국보 제8호인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에 전(傳)한다.
사명(寺名)에 대하여는 최치원(崔致遠)의『고운집(孤雲集)』에 설악산(雪嶽山) “오색석사(五色石寺)는 오색 돌이 있는 까닭에 이름한 것이다.(五石寺有五色石故名也)”라는 기록이 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설(說)이 있는데“불교가 청·황·적·백·흑색의 오방색을 정색(正色)으로 삼고 있으므로 이들 다섯 가지 색에서 절 이름이 유래 되었다.”하며, 이 절이 위치한 곳의지명을 오색리라 하였으며, 절 아래에 있는 약수도 오색약수라 하였다.라고 전한다.
통일신라(統一新羅) 시대에는 법당 자리(址)와 초석들 그리고 오색리 3층 석탑(9세기 건립으로 추정)과 부재들로 보아서 법등을 크게 밝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高麗) 시대에도 자기 파편, 장대석과 건물의 부재들로 보아 중창 불사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특별한 기록은 찾지 못하였다.
조선(朝鮮) 시대와 일제(日帝) 강점기(强占期)까지 이름이 현곡사(玄谷寺)였는데 “그 옛날, 오색령(五色嶺)을 넘나들던 나그네의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했다.”하고, 현대에 들어 성국사란 이름을 어느 교수가 지었다고 전한다.”
(속초 향토사학가 박익훈 선생 낙수집에서) 또한『현산지』에는“오색천(五色川) 상류에 현곡사(玄谷寺)가 있었는데 현재는 폐사(廢寺)되었다. 이 곳에 탑(塔)이 현존하여 오색석사(五色石寺)로 추정된다.”는 기록을 보면 조선 시대에는 현곡사로 불리기는 하였으나 한동안 폐사지(廢寺址)로 방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2년 학루당 황운영 주지(鶴樓堂 黃雲永 住持) 스님이 사찰을 찾아와 불사에 진력하다가 1999년에 열반하였다. 오색석사의 규모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설악의 깊은 골짜기와 접근로, 현 절터의 규모(500평 정도)로 보아 중찰(中刹) 이하의 사찰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참고로 사찰로 가는 길은 오색약수터 앞 약수교에서 주전골 등산로 방향으로 800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산길이라 도보로 약 20분 정도 소요된다.
이 지역은 수복지역(收復地域)으로 해방 후에도 한동안 우리 정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여 1960년대 말에 들어서야 오색석사지(五色石寺址)로 추정되어 졌을 뿐이다.
안타깝게도 1968년 3층 석탑을 보물로 지정할 당시에는 사명(寺名)을 확정하지 못하고 “양양 오색리 3층 석탑”으로 명명하였으며, 현재의 사명인 성국사(城國寺)는 불충분한 근거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 등록되어 사용되고 있다.
오색석사 계단 장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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