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 일제강점기“오색령”2등 도로 개착(開鑿)을 영동·영서는 함께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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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민이 주도적으로 오색령 2등 도로 개착(開鑿)을 추진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1922년 12월 6일 양양군민들은 오색령 2등 도로 개착(開鑿:산을 뚫거나 땅을파서 길을 냄)을 위한 기성동맹규약(期成同盟規約)을 만들었는데, 모두 17개 조항(條項)이며, 구성원(構成員)은 회장단과 평의원 50여 명이며, 임기 2년으로 하는 실천규약(實踐規約)을 만들어 천명(闡明)한 바 있다.
본 기성동맹규약 제1조의 내용에서 양양군의 흥망 문제인 양양~인제 간 오색령 2등 도로 개착은 향후 3년안에 완성하기로 목표를 세운 점으로 볼 때, 우리 선조들의 간절한 소망과 강력한 추진 의지를 보여준 것이 다. 이에 따라 영서의 4개 군(춘천·홍천·인제·양구군)의 유지 들에게도 전해져, 진 정서(陳情書)를 강원도청에 잇따라 제출하였고, 영동에서도 강릉 ·삼 척 · 울진군의 역장동성( 亦將同聲)협찬(協贊)한 결과 강원도에서 오색령 2등 도로 개설을 승낙한 사실이 조선총독부 매일신보(每日申報)에 보도되었다.
<그림 1> 양양직통의 필요로 춘천에서도 진정 양양오색령통과 기성동맹규약 1조~17조 (매일신보 1922.12.6.)
매일신보 기사를 통한 영동·영서의 오색령 도로 진정 상황(眞情狀況)
■ 양양 직통의 필요로 춘천에서도 진정 (1922. 12. 6.)
당시의 매일신보 춘천발(1922. 12. 6.)에 의하면 경성오리진선(京城 ~五里津線)이 간성선(杆城線)으로 변정(變定)됨에 따라 양양의 진정위원(陳情委員)들이 급히 상도(上道)하여 오색령 도로 개착의 당위성을 홍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춘천 입장에서는 간성(杆城)만 개통되고 양양은 개통치 아니함 보다 양양으로 개착(開鑿) 함이 춘천 지역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인정하여 춘천 읍내 유력자 다수가 춘천군청(春川郡廳)에서 집회하고 만단협의(萬端協議)한 결과 오색령 도로 개착을 위한 진정위원을 선정하여 강원도청을 방문하여 진 정서를 제출하였다.
■ 오색령 도로 개착(開鑿)과 홍천군민의 희망 (1923. 2. 8.)
양양 직통인 오색령 2등 도로 개통에 대하여는 홍천군민도 희망하는바, 군유지(郡有志) 김성원(金 聲遠) 외 64명은 연명하여 도에 진술서까지 제출하였다. 특히 홍천군과 양양군과는 고래(古來)로부터 밀접한 관계가 있는바, 물물교환 상통은 자연의 영향이라 하겠으나 대시장(大市場)인 원주와 양양의 경유지로써 본선로(本線路)는 경제적 또는 문화적으로 보아 급속 개통의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진술서를 도에 제출했다.
<그림 2> 오색령 도로 개착과 홍천군민의 희망(매일신보 1923.2.8.)
■ 오색령 도로 개착(開鑿)과 인제 군민의 진술 (1923. 2. 10.)
인제군 발전을 위하여 경성(京城, 서울)으로부터 동해안에 달하는 강 원도 횡단도로 개착(開鑿)에 관해 인제 군민이 올린 진정내용을 요약하면, 인제군은 교 통이 타군에 비하면 열세이다. 특히 물자 이 출입(移出入)의 경우 양양시장에 반출되고 해산물 잡화 등의 필수품은 전부 양양군으로부터 이입(移入)되는 현상임으로 본 도로가 개통되어야 산업진흥과 지방개발 및 기타 편의를 증진케 된다.
<그림 3> 오색령 도로 개착과 인제군민의 진술 (매일신보 1923.2.10.)
■ 오색령 도로 개착과 양구군민의 희망 (1923. 2. 17.)
양양 직통인 오색령 이등도로 개착에 대하여는 양구군민도 찬동 희망하는바, 그 진술서 내용을 요약하면, 양구군은 본도 중부 산간의 벽지로 교통 불편의 소치로 군세가 부진하다. 경성으로부터 동해안에 달하는 도로개통에 관하여 본 군민도 다년 숙망 하기 진술하니 어감찰(御監察)하여 주시기를 바란다는 진술서를 제출했다.
■ 오색령 2등 도로 개설을 승낙한 사실이 매일신보에 보도되다. (1931.11. 21.)
양양군민이 10여 년을 두고 열망하던 서로 개척 문제(西路開鑿問題)에 대하여 양양과 인제 양 군 사회(襄 陽麟蹄兩郡社會)에 호소식(好消息)이 전해졌다. 본 도 당국으로부터 해직로답사(該直路踏査)의 하명(下命)이있으므로 양양군수 박재식(襄陽郡守 朴在洙)이 인제군청을 방문하여 인제군수 김극일(麟蹄郡守金極一)과 직접 만나 원만한 협정을 마친 후 오색령 도로를 시찰하고 동 14일 귀청(同十四日歸廳)하였다고 매일신보에 보도되었다.
오색령 명칭으로 환원해야 하는 당위성과 항거의지(抗拒意志)의 표출
위와 같이 오색령 2등 도로 개착(開鑿) 승낙 소식은 양양군민의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영동·영서가 함께 노력해 얻은 결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저지른 왜곡된 지명 한계령을 청산하지 못하고 지연됨에 따른 군민의 저항의지(抵抗意志)를 표출(表出)하기 위해 지난 2016년 9월 한계령 정상 양 양방면에“백두대간 오색령”이란 대형 표지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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