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었던 양양에 불교 문화가 불같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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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은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었다.
1. 삼국시대 양양지방은 고구려에 속하여 익현현 (翼峴縣) 또는 이문현(伊文縣), 신라 경덕왕16년 (757)에는 익현현을 익령현(翼嶺縣) 이라 개칭하여 불렸던 우리 양양에는 통일신라대의 와편 등의 유물이 출토된바 있는 석성산성(石城山城)이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신라와 고구려의 접경지역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바로 이 석성산성은 오늘날 양양군 임천리 상수도사업소가 있는 석성산이며, 현남면 포매리와 견불리 일원에는 신라 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임천리 석성산성 남벽모습
2. 고구려의 변방 장수가 신라 19대 눌지왕 34년 (450) 가을에 실직[삼척]의 들에서 사냥을 하다가 하슬라성[강릉] 군사의 공격을 받아 죽었으며, 신라 20대 자비왕 11년(468년) 봄에 고구려가 실직성을 습격하니 그해 가을 9월에 신라에서는 하슬라 사람들을 동원하여 니하(泥河)에 성을 쌓았다.[지금의 현남면 포매리와 견불리 일대의 신라 산성으로 추정된다.]
후포매리 신라산성
3. 신라에서는 24대 진흥왕 29년(568년) 겨울에 달홀주(지금의 고성)를 설치하고, 29대 태종무열왕 5년 (658년) 3월에 실직을 북쪽 진지(北鎭)로로 삼았다.
4.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신라와 고구려가 양양을 사이에 두고 수시로 빼앗고 빼앗기는 전운(戰雲)이 가시지 않는 변방이었음을 알 수 있다.
5. 6세기 후에는 신라의 영토가 되면서 고승대덕들의 발자취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수려한 산과 하천, 호수 그리고 동해의 자연환경은 화랑도의 도량을 이룸으로써 신라문화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이다.
양양에는 불교의 문화가 불같이 일어났다.
오늘날 양양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불교 문화도 이 시기에 불같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아 진다.
진덕여왕 6년(652년)에는 자장율사가 신흥사의 전신인 향성사(香城寺)를 창건한 이래, 문무왕 11년(671년)에는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창건하였고, 신문왕 9년(689년)에는 원효대사를 창건주(創建主)로 한 영혈사가 창건되었다. 이 시대가 양양불교의 황금기라 하겠다.
이를 전후하여 양양에는 대사찰이 연이어 창건되었는데, 강현면 둔전리의 진전사, 서면 황이리의 사림사(억성사·선림원), 서면 오색리의 오색석사, 서면 서림리의 서림사 등도 신라의 고찰이었으니, 이때 양양지방은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
으며, 양양은 불교의 정토(淨土) 문화가 꽃피게 된 것이다.
사적 제495호 낙산사 일원 전경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을 근간으로 불교 설화가 양양사람의 정서를 읽게 한다.
한 지역의 문화를 알아보는데 가장 근간(根幹)이 되는 것은 그 지역의 설화일 것이다.
설화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 같이 들을 수 있는 열린 구조의 문화양식으로 민중적 향유의 폭이 넓어서 설화를 통하여 당시 사람들의 삶과 오늘의 현실을 재인식하는 틀을 마련할 수 있다.
설화 속에는 면면히 이어온 조상들의 정신과 삶의 모든 방정식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양양에는 삼국시대의 불교 설화뿐만 아니라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수많은 인물의 설화가 전승되고 있지만, 가장 오래된 설화는 신라의 의상과 원효로 대표되는 불교 설화일 것이다.
주지하는바 원효와 의상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고승이었다. 이들이 남긴 발자취는 양양지역 곳곳마다 어리어 있고 그것이 여러 설화를 낳게 하였다.
“삼국유사”의 3권에 기록되어 있는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洛山二大聖 觀音 正趣調信)”은 역사의 기록물로서 또한 하나의 설화로 구전되고 있으니 낙산의 이대성 의상과 원효, 정취전(正趣殿)을 낙산사의 경내에 세 운 범일, 괴로운 인생을 한 마당의 꿈으로 깨닫게 한 세규사의 승려 조신의 설화가 전승되면서 양양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앞으로 기회가 주어지는 데로 낙산사에 얽힌 설화를 양양사람들의 정서를 살펴 전개해 보리라.
삼국유사 권3 (낙산 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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