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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양양문화33호

    3월 - 양양은 도원경의 별천지가 아니런가?

    페이지 정보

    조회 831회

    본문

    일찍이 양양의 선인들은 양양 땅에는 동남으로 60리 구간에 이상향[(理想鄕) utopia]이 전개되어 있다고 예언한 글을 양주읍지(襄州邑誌)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 기록하여 놓았다.



    ◆ 양주읍지 고적편에 실려있는 ‘회룡굴’.


    원문 <回龍窟:在府六十里吳晩翠億齡有友人同在洛下一日告別而去十年不知去處吳公爲關東方伯巡過海上其友人艤舟於永郞湖上遂與之邂逅吳公曰君方住何處答曰吾家在於彌矢嶺底華岩寺之洞口又在於襄陽府四十里回龍窟吳公遂與之偕往쭞蘿穿石入一窟中日月明朗第宅宏麗且有歌童舞女吳公曰君何力辦此答曰如此者亦數十區其後吳公再到尋覓終不知其處云詳見辛參奉敦復鶴山雜錄未知其處>


    번역문 <회룡굴은 부에서 60리에 있다. 만취 오억령이 벗과 같이 지내다가 하루에 이별하고 떠나니, 십년 동안 거처를 알지 못하고 지내다가, 오공이 관동관찰사가 되어 해상을 순시하며 지나다가, 우연히 영랑호 배를 대놓은 곳에서 벗을 만나게 되었다. 오공이“그대 사는 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벗이 답하기를“내 집은 미시령 아래 화암사 동구인데 또 양양부에서 40리 지점 회룡굴이라”하니, 오공은 그를 따라 함께 간다. 댕댕이 덩굴을 휘어잡고 돌을 헤치며 한 굴에 들어서니, 해와 달이 맑고도 밝고, 저택은 크고 화려하며 또한 남녀 아이들이 노래와 춤으로 맞이한다. 오공이 묻기를 “그대 무슨 힘으로 이를 마련하였는가.”하니, 벗은“이 같은 것이 또 수십 곳이라”대답한다. 그 후에 오공이 재차 와서 찾아보았으나, 끝내 그곳을 찾지 못하였다. 참봉 신돈복의 학산 잡록을 상세히 들추어 보았으나 그곳을 알 수가 없었다.>


    이 글은 조선 숙종 연간(1674~1720)에 대사성, 대사헌, 병조판서. 강원관찰사, 경기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특히 1695년 1월 28일 강원관찰사를 사임 할 때에 숙종대왕으로부터“일편단심이 빛나다(一片丹心炳)” 시 한편을 하사 받은 오도일(吳道一)이 남긴 글이다.

    이와 유사한 글은《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천지편(天地篇) 지리류(地理類) 낙토가작토구변증설(樂土可作쭞쭞辨證說)〉등 몇 편의 글이 전해진다.


    이 글에 등장한 인물 오억령은 선조조~광해군조(1567~1623)에서 대사헌. 형조판서 등 조정의 고위직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 양양땅 60리에 회룡굴과 같은 별천지가 수십곳(數十處)이라 하였다.


    선견지명이 있는 옛 어른들의 예언은 우리 후손들이 반추(反芻)하면서 그 깊은 뜻을 헤아려 우리에게 축복을 주는 것이라면 적극 방도를 찾아 우리와 우리 후손들의 광영(光榮)을 위해서 설계하고 전력투구(全力投球)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 약진 도상에 있는 우리 양양의 군세는 미약하고 인구는 비록 적지만은 우리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선망하는 고을이 아니겠는가?


    1. 하늘과 바다 산 하천 대자연의 풍광은 정말 빼어나게 아름답다.

    2. 서울양양고속도로 개통으로 전국이 일일생활권이다.

    3. 양양국제공항 개설로 이미 지구촌의 하늘길이 열려있다.

    4. 일출의 명소 60리 청정해변은 사철 인파가 출렁이며, 죽도를 위시한 모든 해변에 서퍼(surfer)

    들이 몰려든다.

    5. 오색케이블카가 설치되면 우선 전국의 누구나가 양양을 찾는다.

    6. 동해북부선 철도가 부설되면 앞으로 남북교역의 중심역할을 하게 된다.

    7. 이미 양양남대천은 르네상스의 서막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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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도일 초상화>



    ◆ 우리 양양군민의 과제


    우리 군민 모두는 각자가 하는 일과 분야에서 자부심을 갖고 책임을 다할 때 회룡굴과 같은 새로운 문화가 열릴 것이며, 민생의 안정을 위한 복지행정을 펼치고 양양의 번영과 약진을 위하여 군민의 화합이 지상과제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숙종24(1698) 7월 19일 공조참판 오도일(吳道一)이 면직을 원하자 오도일을 양양부사(襄陽府使)로 보직하도록 명하다. 라는 기사가 있으며 1700년부터 대제학, 한성부판윤을 엮임 한 후 병조판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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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룡리 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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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랑호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