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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양양문화27호

    문화원 회원 교육(특강) - 양양학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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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문화원 회원 교육(특강)


    양양학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강원도립대학 교수 양언석


     

    서론


    오늘, 양양문화에 관심 있는 여러분들과 함께 해서,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내년이 양양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지 600주년이 되는 해로, 양양군과 문화원이 정명 600주년 행사를 준비하는 것으로 알 고 있습니다. 정명 600주년을 통해서, 앞으로, 미래의 600년을 준비하고, 그리고 양양의 정체성을 찾는 중요한 행사입니다.
    이 행사의 성공은, 문화원 회원 여러분들의 관심에 달려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10년후 쯤 양양의 모습은 어떨까?
    시골에 노인들이 거의 돌아가시고 반쯤은 폐허가 된 고을로, 유령의 마을이 될 것인가. 아니면 우수한 양양의 문화에 자부심을 갖고, 고향으로 돌아와 폐교가 부활되고,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양양을 찾는 사람들로 번화한 즉, 조선조처럼 번화한 양양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명 600주년의 행사는 양양이 변화할 수 있는 골드타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조선조에 양양은 대단하였다. 조선왕조의 외친, 즉 조선왕조의 뿌리로, 나라에서 직접 관리를 했고, 금강산으로 가면서 양양에서 자고 가고, 돌아오면서 아름답고 우수한 문화를 간직한 양양에서 회포를 풀었던, 돈이 붐볐던 고을로, 번화한 곳이었다.(기생)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문화가 미래인 시대에, 양양의 우수한 문화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600년을 즈음하여 저는, 지역 발전에 중요한 지역학, 즉, 양양학이라는 명칭을 쓰고 싶습니다. 이제는 양양학을 학문으로 정착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의 제목은 양양학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역발전에 중요한 지역학의 시점에서, 양양학은 역사, 인문, 지리, 교육, 문화, 관광, 환경, 산업 등을 연구하여 미래발전을 모색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양양학이 중요한데, 그 중, 역사와 인문, 지리, 문화, 관광분야만이라도 정명 600주년을 맞아 준비해 보았으면 한다.
    양양은 오랜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의미 있고 흥미로운 담론을 간직한 고을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성공한 지역이나 우수한 문화에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문화가 미래의 시대에, 양양의 우수한 문화인 이야기가 우리의 기억과 삶과 생활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오늘의 양양문화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양양의 문화 정책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작은 소망이 있다면, 이런 강의를 통해서 새롭게 변화 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 다.
    사례를 들면서 양양학 분과 중에서 역사, 교육, 관광, 환경, 정신문화 측면에서 사례를 들면서 이 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1. 지리적 관점


    양양은 우수한 문화와 함께 풍요로움으로 인해 일찍부터 문명의 삶을 살았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즉 풍수에 의하면, 대저 살 곳을 택할 때, 처음에는 지리(땅의 생김새와 형편)을 살펴보고, 그 다음에는 생리(생활하는 습성), 인심(백성의 마음), 마지막으로 산수(산과 물)을 돌아본다. 이 네 가지 요소 가운데 한 가지만 없어도 살기 좋은 곳이 못된다. 지리가 아름답고 생리가 좋지 못 하면 오래 살 곳이 못 되며, 생리가 좋고 지리가 못하여도 역시 오래 살 곳이 못된다.
    집터는 산소자리와는 달라서 물이 있어야 재산이 생긴다. 그러므로 물이 고여 있는 물가에는 부유한 집과 명촌과 번성하는 마을이 많다. 비록 산중이라도 역시 시냇물이 모여드는 곳이라야 대를 이어 오래도록 살 터가 된다, 그 예로 풍수를 가장 중시하는 사람들이 스님이다. 절터를 정할 때, 풍수를 봅니다. 신라는 불교국가였고, 양양은 불교의 성지였다. 그 이유는 정치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풍수가 좋았다. 의상이 당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처음으로 양양에 낙산사를 창건한 것은 풍수가 좋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기 좋
    은 곳에 신도 존재한다.

     


    2. 역사적 배경


    * 양양은, 삼국시대부터 오랜 역사와 문화의 중심이었고, 지난날 관광과 문화의 중심이었 던 양양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문화가 있다. 그런데 그 문화가 무엇인가?
    조선조 왕조(1392년 창건)를 보면, 조선왕조를 창건하면서 우리 지역을 특별히 관리해 왔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왕조의 외친이기 때문이다.
    태조6년(1397) 1월에 양주를 임금의 외친본관이기 때문에 부로 승격시켜 양주부라고 하였습니다.
    태종13년(1413) 예에 따라 양주부를 왕조의 외친이라 하여 양주도호부로 승격하였습니다.
    태종16년(1416) 양주를 양양이라고 개칭하여, 양양도호부로 명칭을 변경하고, 조선왕조에서 특별히 관리해 왔습니다. 왜 이곳을 양양이라는 지명으로 개칭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말하는 동해신묘와 조선왕조의 외친이라는 이유에서 유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동해의 신을 모시는 해가 떠오르는 고을로, 조선왕조의 태동이라는 의미로 양양이라는 명칭을 나라에서 정하였다.
    동해신묘의 명칭도 저는, 고려사에 처음 사용한 대로 동해신사라고 해야한다. 지역문화에서 명칭 변경은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잘못되었다면 정정하는 것이 양양의 정체성을 찾는 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왜 동해신묘라고 했는가? 그것은 17-18세기 유교문화가 불교와 불교같이 귀신의 세계를 폄하하는 시대적 사조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의 뿌리를 양주에서 양양으로 개칭하고 자신의 뿌리를 양양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유교와 불교의 차이 1)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유가는 답을 줄 수 있지만,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답 을 줄 수 없다. 2) 제사 3)유교는 현실-도덕사상
    *조선왕조 창건이 1392년으로, 많은 사건과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5년 후 양양에 대해서 외친으로 부로 승격시킨 것은 조선왕조의 뿌리를 양양에서 찾고자 하였습니다. 조선왕조 태조와 태종이 600백 년 전에 양양을 어떤 마음으로 왕조의 뿌리로 인식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조선왕조 이성계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 앞으로 600년을 준비해야 합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양양 연혁조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실록권일, 총서 낙산 관음굴에서 기도하여 도조인 이선래를 낳다.
    조선조 태조실록에 의하면 익조(이성계 증조부)가 양양에 거주한 지 수년이 지났지만 자식이 없자 부인 최씨와 함께 낙산의 관음굴에 기도하였더니, 밤 꿈에 한 승복을 입은 중이 와서 고하기를“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마땅히 이름을 善來라고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얼마 안가서 아이를 배어 과연 의주에서 아들을 낳았으므로 마침내 선래라 했으니 이 분이 도조이다. 관음굴은 지금 강원도 양양부에 있다. 이때 익조가 안변에 왕래하였는데 또한 화주와 함주에도 왕래하였다.
    낙산사 관음굴은 이성계의 조부인 도조의 후사를 점지한 기도처로 해마다 강향사를 보내어 제사 지내게 하고 사전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낙산사는 궁중불교의 도량으로 이름 하였다. 세조는 낙산사에 행차하여 사찰을 중수하고 홍예문을 축성하였다. 이때부터 이성계의 증조부인 익조와 부인이 여기서 빌어 도조를 낳았다고 하여 아기빌이 굴로 알려졌다. 그러므로 낙산사는 조선왕조의 출생지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성종 실록에 의하면 정희왕후(세조비)가 일 년에 쌀 백 섬씩 낙산사에 하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 양양이 조선왕조의 外親인가?

    이안사
    이안사는 이성계의 고조부로 전주의 유력 세력가였다. 이때는 몽고군이 침략하였던 고종 후반기이다. 이때 이안사가 전주관아의 관기 한 명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지주사가 전주에 안렴사로 부임하는 산성별감을 접대하기 위해 그 관기로 하여금 수청을 들게 하였다. 평소에 지주사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안사가 화가 무척 났다. 왜 많은 기생 중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기생으로 하여금 수청 들게 한다고 하여, 문을 박차고 들어가 술상을 엎어 버렸다. 이에 후환이 두려워 가족을 거느리고 삼척 미로면으로 도망을 옵니다. 삼척에 산지 1년도 못되어 아버지(이양무)가 돌아가셨다.
    이에 묘자리를 찾아다니다가 몹시 피곤하여 잠시 쉬고 있는데 이때, 한 스님이 동자승을 데리고 나 타났다. 주위를 모두 살펴본 후에 인적이 없는 것을 알고 확인하고“大地가 吉地로다”하였다. 이안사가 나무 밑에 앉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모르는 도승은 동자에게 이곳이 제대로 발복하려면 開土祭를 소 백 마리를 잡아서 제사 지내야 하고 관은 금으로 만든 것을 싸서 장사를 지내야 한다. 그래야 5대손 안에 왕자가 출생하여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는 왕이 된다.
    가난한 살림에 소백마리와 금으로 된 관을 만들 수 없었다. 고민 끝에 백소(흰소)로 대신하고 금관은 귀리 짚이 황금색이라 대신하였습니다. 이렇게 삼척에서 자리를 잡아갈 무렵 자신과 갈등이 심했던 전주의 지주사가 관동의 안렴사로 오게 된다는 말을 듣고 다시 가족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도망가 다가 양양에 머물게 되었다. 이 때, 부인 최씨와 낙산사 관음굴에서 기도하여 도조가 탄생하였다.
    양양이라는 지명은 참 좋은 이름- 동해 신이 살았고, 해가 떠오르는 조왕조가 탄생한 곳이다. 좋은 이름이란 1) 부르기 좋고(음의 조화)기억하기 좋은 이름, 2) 좋은 의미, 3) 개성이 있어야 한 다.(양양에 산다. 양양하게)



    3. 관광


    * 양양의 문화적 자부심은 무엇인가?


    낙산사, 동해신사, 향교, 조신 이야기 등 매우 다양하다. 그 중에서 저는 양양도호부 관아.
    *양양도호부(襄陽都護府) 관아(官衙) 재건. 양양도호부 관아 설립은 이 지역의 역사랜드마트가 될 수 있고, 관광콘텐츠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조선왕조가 특별히 관리했던 조선조 양양도호부 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양양도호부 건물이 재건된다면 양양인들이-속초시민들이 문화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고, 설악권에 서 중심 고을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하여 양양분들이 별로 고민이 없다. 왜 그럴까? 문화교육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우수한 문화를 가지고 있어도 교육이 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문화원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 한 것은 지역문화의 우수성을 교육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문화에 자부심을 갖고 사랑하게 된다.
    양양도호부 관아 건물은 궁궐처럼 동서남북에 문이 있고, 아름답다. 門樓가 자연과 어울리는 풍경이고, 문루의 이름 또한 문학작품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성안에는 연못이 있고 연못 가운데 정자가 있었다.(청연당이라는 동헌, 객관의 문루 태평루, 동쪽 성문인 한수루, 남쪽 성문인 현산정, 도호부 가운데 연못에 위에 있는 정자 애연정)
    도호부 관아 복원을 통해 영북지역 전통문화 중심도시인 양양의 역사성을 복원하여 문화적 자긍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고려 목종 10년(1007) 10월에 348간의 성(城)을 축조하고 성문 4개를 설치하였다.1)
    기록2)과 구전에 의하면 양주성 축성을 계기로 성내(城內)에서 성황신을 봉안하여 단오제의 주신으로 모신 전통이 그대로 복원되어 지금의 양양 현산문화제로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왜 현산이라는 명칭을 쓰는지?
    문화제에 모시는 신의 존재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다.
    천년 이상 된 성황당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정체를 모른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어느 성황사나 모시는 주신이 있다. 그 주신이 누구인가?
    양양군지(2010)에 보면, 고려 목종10년(1007)에 양양읍 성내리를 중심으로 양주성을 축성하고 매년 침입해 오는 외적들과 항전을 계속하면서 향토를 수호하고 이 후 양주성을 동서남북에 4대문을 내고 성내에 성황사를 짓고 춘추로 치제를 하였으며 선조25년(1592) 이후 매년 5월 5일 제의 뿐만 아니라 성황굿을 성대하게 하였다. ... 현산문화제 기간 중에 장군성황제가 열렸는데 15시경 고치물제부터 시작하여 장군 성황당에서는 양양군수를 초헌관으로 하여 성황제를 지낸다.
    참으로 아쉽다.(성종 11년(992)-成廟別號-중국지명을 무분별하게 사용하였다.)-사실 강릉도 중국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강릉인들은 그런 말을 자랑스럽게 사용하지 않는다. 왜 자존심 때문 에...



    4. 교육


    *고려시대 주목할 만 한 분은 근재 안축선생이다. 안축(1287-1348)은 원에서 과거급제를 하고 고려에 돌아와 충혜왕 때, 강원도 존무사로 파견되어 양양에 학교를 세워 인재양성에 힘썼다. (신라 때 문선왕동이라는 신라의 학교터가 남아있었다고 한다-당연하다. 왜냐하면 신라 화랑도들의 중심 수련장에 학교가 없었을 리가 없다. 그 자리에 향교를 세웠다.) 안축의 생각은 학교를 만들어 인재를 양성하면, 집에는 재주와 학문 있는 자손가 있고, 마을에는 어질고 후한 풍속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 하였다. 이처럼 안축의 학교 건축으로 오늘, 양양의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고을마다 미풍양속이 전해오고 있다. 그러므로 안축 같은 분을 선양사업을 해야 한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관동와주에 담겨 있다. 후에 내시의 미음을 사 파직. 경기체가인 관동별곡이 있고, 양양에 향교를 처음으로 세워 양양의 풍습과 교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런 분을 선양해야 한다.



    5. 화랑도의 중심수련장


    양양관아의 건물에 관한 기록은『현산지(峴山誌)』공해(公●-공관)조에 명칭과 위치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3) (군인수도 기병 등 1169명이 주둔)
    *영동지역 중에서 양양은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구역이고 군사적, 교통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고구려가 강성할 때는 고구려의 영토였고 신라가 강성할 때는 신라에 속하였다. 그리고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국가적으로 특별한 관심지역이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상적으로는 불교이고, 지역적으로는 양양을 중심으로 한 영동지역이다. 영동에서 양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삼국을 통일 할 최고의 지형이다. 그래서 신라는 영동지역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삼국을 통일할 중심지역으로,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종교, 즉 불교를 통해 一心할 수 있는 지역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막강한 군사력의 고구려가 그 이후에 양양을 중심으로 이 지역을 한 번도 되찾지 못했다. 그것은 신라의 정책이었다. 고승들과 당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다투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여 이곳을 불교의 성지로 만들었고, 화랑들의 중심 수련장으로 화랑이면 누구나 이곳을 순례하며 지형을 배우고, 국토사랑을 배우게 되었다.
    *�삼국시대부터 불교의 성지이고 화랑들의 중심 수련장이었다.
    신라는 불교국가로, 이상적인 인간은 화랑이나 승려가 되는 것이었다.
    화랑들의 중심 수련장으로 그 유적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화랑들의 규모는 3백 명에서 3천 명 정도로, 구성은 국선인 화랑 1명과 그 밑에 승려 2-3명, 그리고 화랑도로 되어 있다. 유명한 승려들과 화랑도는 15-18세 정도, 수련 기간은 3년 정도이다.
    우리 민족의 이상형인 화랑으로, 이 화랑이 조선조 선비로 전통이 이어진다. 화랑은 그 명예에 어울리는 교육방법이 있었다.
    1) 相磨以道義, 2) 相悅以歌樂, 3) 遊娛山水의 도를 중시하였고 풍류를 즐기며 자연과 벗하였다.
    화랑들의 교육방법은 첫째가 상마도의이다. 도(道)와 의(義)를 연마하였다. 둘째가 상열가락이다. 가무(歌舞)을 통해 서로 소통하는 훈련이다. 셋째가 유오산수 이 명산대천(名山大天) 을 다니면서 천지기운을 받는 수련이다. 가장 이상적인 한국형 인물은 화랑이었다. 이 화랑이 조선조 선비로 이어진다. 오늘날도 하나의 전통으로 이어진다.
    어떤 교육= 산-웅장함과 경건함, 바다-열정적임 힘, 호수-고요함 양양에도 화랑들의 자취가 많이 남아있다.
    원일전리에 가면 화랑소가 있다. 화랑소란 신라 화랑 원일이 이 소에서 놀다간 후로 이 소를 화랑 소라고 부른다. 어쩌면 이 원일랑이 찾았던 곳을 원일전리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영랑호에 화랑들이 노닐었던 곳에 정자가 있습니다. 또 기록에 의하면 경포대와 한송정은 낭도 3 천명이 각기 소나무 한 그루씩 심어 푸르름을 자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양양문화는 무엇인가? 양양이라는 이름값은 하고 있는가? 한번 쯤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 다. 또 어떤 문화를 후손에게 물려 줄 것 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미래는 문화의 시대이다. 문화가 경제의 중심이 되어 삶의 질을 결정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 중요한 것은 문화적 전통으로, 전통은 물려받으면서 동시에 창조하는 것이다. 어떻게 창조하느냐에 따라 양양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인접한 강릉은, 시와 문화원에서 전통문화유산을 마음껏 지원하여 발전하고 있다. 속초는 아주 작은 전통문화유산이라도 있으면 창조하고 만들어 간다. 그런데 양양은 도처에 산재해 있는 문화유 산도 관리하고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양양문화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양양문화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우수한 문화유산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6. 인물


    * 연암 박지원


    1) 조선조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양양부사를 지낸 연암 박지원은 부임하고 돌아갔을 때, 여러 사람 이 모여 지방수령의 녹봉을 화제 삼아 어느 고을이 많고 어느 고을이 적다는 등 서로 비교하는 말들을 하는 것을 들으시면서 그저 참고 계셨다. 양양부사를 그만두고 돌아오신 후 이웃에 사는 여러분들과 자리를 함께 하셨을 때이다. 그 분들은 이전에 다스리던 고을 녹봉이 많고 적음에 대해 서로 이야기 하다가 아버지더러 양양에서는 얼마나 받았는가 묻자, 아버지는 농담으로 1만 2천 냥을 받았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그게 정말이오. 그렇고 말고! 그분들이 반신반의하며 자세히 말하기를 청하자 웃으면서“바다와 산의 경치가 1만 냥의 가치가 있고, 녹봉은 2천 냥이니 넉넉히 금강산 1만 2봉과 겨를만 하지 않소!”이 말에 좌중이 모두 크게 웃었다. 산과 바다의 경치가 일만 냥의 가치가 있고 록봉은 이천 냥 이었다고 경관녹봉론(경관자산론)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유형무형의 경관을, 경제적 가치로 환원한다면, 양양과 설악산, 그리고 바다의 가치는 무한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곳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곳인지 느끼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느낄 수 없다면 양양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자연과 문화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었으면 합니다.
    문화는 그만큼 대단한 것이다. 우리 후배들이 양양문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양양의 미래는 아름답고 행복할 것입니다.
    (연암이 양양에 와서 약 7개월 정도 부사를 지냈습니다. 왜 7개월 정도 밖에 못 했을까?
    이곳의 무서운 텃세 때문이었다. 이것이 속초라는 지명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연암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연암은 조선조 대표적인 실학자이지만 실학과는 많은 차이가 나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의 문학적 재능만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연암이 양양부사로 부임 했을 때는 이미 세상에 뜻이 없고 하루하루 억지로 세상을 보내고 있었다. 이곳에 와 보니까 텃세가 말이 아니었다.)


    2) 아전들이 곡식을 훔치고 빼돌려, 관가의 창고가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았다. 환곡의 방출과 수납은 전부 허위였다. 이것은 관례였다. 아전들에게 사사로이 써버린 관곡을 갚으라고 하면 아전들이 그때마다 도리어 달아나겠다고 위협을 했다. 그래서 불러 놓고 이야기 했다. 관아의 창고가 텅 비어 있어서 고을 원이 무엇을 하겠는가? 달아나고 싶다면 모두 달아나서 한 사람도 남지 않도록 하여라.
    나도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장계를 올려 죄를 청한 후 돌아가 처분을 기다리겠다.
    그리고 마침내 공무를 전혀 보지 않고 조그만 방에 거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전들이 빼돌린 곡식을 도로 회수 하지 못 한다면 한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으로 자처 할 수 없다.
    얼마 후 연암은 녹봉을 떼어내 아전들에게 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직무를 수행하지 않으면서 녹봉을 받는다는 것 부끄러운 일이다. 너희들이 각자 따로 훔친 곡식을 갚고자 한다면 끝내 갚지 못할 것이다. 누가 많이 내고 적게 냄을 따지지 말고 함께 힘을 모은 다면 티끌이 태산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아전들이 회의를 했습니다. 원님이 포흠을 갚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가 갚지 않는다면 원님을 볼 면목이 없다. 마침내 아전들은 갖고 있던 물건을 팔아 포흠을 갚아 나갔다. 그리고 나서서 연암은 동헌에 나와 공무를 보기 시작했다.


    3) 신유년(1801-65세) 봄에 벼슬을 그만두고 상경하였다. 그 이유는 신흥사의 스님, 창오, 거관이라는 중이 궁중과 결탁하고 대군, 왕자들과도 관계가 있었다. 또 그런데 관속을 구타해서 사람을 살해했다. 이에 분개하여 감사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그런데 감사는 꺼리는 바가 있어 눈치를 보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에 연암은 궁속과 중들에게 제압되는 고을 원이 아전들과 백성들을 어찌 다스린단 말인가! 이에 상경하여 병을 핑계로 사임하셨다.


    4) 양양에 대한 인식
    고을의 폐단이나 백성들의 고질이 모두 고치기 어려운 형편인데 두어 달 지내는 동안에 비로소 바람마저 매우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몰아치는 폭풍과 비릿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하면 곧 기왓장을 날리고 고래나 악어의 울음 같은 거센 파도소리가 베갯머리에서 들리는 듯 하니 돌이켜 고향 집이 생각나도 수천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곳은 한 때의 구경꾼들이 지팡이 짚고 나막신 신고 명승지로 찾을 만한 땅은 될 수 있지만 노경에 노닐면서 몸을 보양할 곳은 전혀 못 됩니다. 더구나 하인 하나도 데리고 있지 않고 중처럼 외롭게 살고 있는 신세입니다.
    *연암의 문장론-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어린 아이가 놀다가 갑자기 귀가 울리자 신기하게 여겨 동무에게 속삭이기를 이 소리 들리니?
    피리소리, 생황소리가 별처럼 동그랗게 들리는데? 그러나 동무가 귀에 맞대고 아무리 들어봐도 아무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하자 그 아이는 딱하다는 듯이 남이 들어주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리고 한번은 시골사람과 함께 자는데 그가 코를 크게 골았다. 빈수레가 털털거리듯 숨을 들이 쉴 때는 마치 톱질하듯, 내 쉴 때는 돼지가 쌔근거리는 소리를 냈다. 함께 자던 사람이 흔들어 깨우 니 그가 버럭 화를 내며 내가 언제 코를 골았느냐고 도리어 화를 냈다.
    *이처럼 귀울림처럼 자기 혼자만 아는 것을 남이 몰라주어 늘 걱정이고, 코골이처럼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 글을 쓴다고 하였다.
    *황장목(임금의 관을 만들 때, 쓰이던 재질 좋은 소나무)과 환곡 때문에 날마다 머리를 썩이고 있습니다. 지인들이 남은 황장목으로 연암의 관을 만들자고 했을 때, 연암은 그 황장목으로 마을의 다리를 만들었던 관리였다.
    소나무의 생태와 그 중요성
    양양에는 소나무가 유명해서 그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해 금표를 세웠습니다. 원일전금표, 어성전 금표, 법수치리금표(1996년까지 존재), 장리금표(1999년까지는 존재했었다) 등 한 지역에 가장 많은 황장금표가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참 아쉽다.
    양양은 소나무의 고장이다. 양양의 소나무가 재질이 가장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강릉은 이미 솔향이라는 슬로건을 사용하고 있다. 양양에서는 송이축제 때, 소나무 축제도 같이 했으면 한다.
    새로운 원장님과 군수님이 오셔서 정명600주년을 기념으로 군청 앞에 소나무를 심었고, 낙산에도 소나무를 심어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10년 후쯤 그 소나무들은 양양의 명물이 될 것이다. 상상해 볼 수 있다. 백년 후쯤 수백 년 된 소나무 가로수가 드리우진 양양의 거리는 세계적인 관광도시가 될 것이다.
    우리 문화를 선비문화라고 한다. 선비들은 지조와 절개를 중시하였다. 그 지조와 절개를 소나무에 비유한다. 소나무는 비가 오나 눈이오나 항상 푸르름을 간직한 채 조금씩 조금씩 성장한다. 비가 오나 눈이오나 푸르름을 간직한 채 조금씩 자라는 소나무를 보면서 은근과 끈기를 배웠다. 그래서 조윤제 박사는 우리 민족성을 은근과 끈기라고 말한다. 이처럼 소나무는 우리 민족정신을 상징해 왔 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가로수가 소나무에서 외국에 보기 좋은 프로타너스나 은행나무, 벚꽃나무, 미루나무 등으로 바뀌면서 우리의 의식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왜 그랬을까?
    예를 들어 서울같이 오백년 도시에 소나무가 가로수로 드리워져 있다면, 양양같이 천년 이상 된 도시에 수백 년 된 소나무가 드리워져 있다면 세계적인 관광의 도시가 될 것이다.
    소나무보다 프로타너스 같은 화려한 나무를 보고 자란 세대는 은근과 끈기보다는 조급함과 화려 함, 그리고 사치스러움을 배우게 된다. 우리 조상들은 가난했지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았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경제적 여유는 있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러면 여유있는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의 차이는 무엇일까?=김삿갓 배, 서거정 태평한화골계전-절병부인

    우리 조상들의 시를 보면,
    나비와 청산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서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 자고 가자

    어느 것에 구애됨 없이 해탈의 경지에서 청풍유수와 같이 자유자재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풍류이 고 멋이다. 장주의 꿈, 청풍유수와 자연과 동화되어 살아간다면 하루를 살더라도 영생을 얻을 수 있 다.
    소나무와 같이 여유를 주는 또 하나는 우리나라 한복이다. 긴 한복의 치마와 여유 있는 옷고름을 보면 너무 길어서 불편했을지 몰라도 우리민족에게 여유있는 삶을 주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아주 짧고, 꽉끼는 옷을 입은 우리는 각박할 수 밖에 없다. 우리를 백의민족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니다.



    7. 소나무와 충절의 고장


    양양은 절개의 고장이다. 지조와 절개를 상징했던 소나무는 양양인에게 3.1독립운동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소나무는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해 왔습니다. 양양의 문화적 자부심 가운데 하나는, 독립운동이 가장 강렬하게 일어났던 충절의 고장이다. 충절의 고장답게 가로수가 수백 년 된 소나무가 드리워져있다면 세계적인 관광의 도시가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소나무의 고장 양양!으로 인식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양양을 소나무의 고장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 연암 박지원의 말처럼 황장목의 고장으로 그 전통을 이어가고 싶다. 그래야 소나무를 통해서 양양의 정체성과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양양이 소나무의 고장이고, 충절의 고장이고, 선비의 고을로 우수한 문화를 자라는 양양의 학생들에게 문화교육이 되어야만 양양이 발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문화원의 의무이자 책임 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양의 정신문화는 화랑도의 중심 수련장이었던 양양, 그리고 소나무를 통한 절개가 근대사의 항일운동으로 찾아 볼 수 있다.
    다른 금표도 있었다. 낙산사 금표(대사간 안관후가 성종에게 아뢰기를“신이 전날 낙산사에서 구로를 열어 금표를 치우도록 청하였는데 지금까지 하명을 듣지 못했습니다”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낙산사 금표는 100보에 불과하고 해수는 지극히 넓은데 하필 100보 안에서 고기를 잡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구로는 절에서 거리가 멀지 아니한데 대개 양양을 왕래하는 사자들이 기생을 탐하여 오래 머물면서 간혹 횃불을 들고 밤길을 다니다가 불을 내어 연소될 염려도 없지 않으니 만일 구로를 다시 연다면 내가 기생을 없애버리겠다고 하였다.
    이에 안관후가 말하기를“기생이야 있고, 없고 관계가 없으나 양양에 기생이 있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인데 이제 만일 기생을 없애버린다면 후세에 반드시 절을 위해서 없앴다고 할 것입니다.”하자
    왕이“내가 불교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런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낙산사에서 조선왕조의 후광으로 금표를 세워 못된 짓을 하니까 양양의 유림들이 금표를 바다에 던졌다고 한다.
    동해신사금표, 하복리 태봉금표, 금표가 많다는 것은 신성한 지역이 많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 다.



    8. 불교문화


    * 의상대사가 당에서 귀국하여 처음으로 양양에 낙산사를 창건
    도의선사가 진전사에서 가지산문의 개시조로서 대한 조계종의 종조로 추앙받는 스님으로 진전사에서 40년 동안 불도를 닦았다. 그리고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1206-1289)이 진전사에 출가하여 (14세) 8년간 수도 하였다.
    (천년사찰 신흥사-원효가 말한 불교를 통한 일심으로 사찰을 중심으로 지역주민이 함께 할 수 있는 신성한 지역에 사찰을 창건하였다.(백제 660, 고구려 652년 멸망)
    향성사(신흥사) 652 창건(*낙산사 671년), 698년 불로 전소 3년간 폐허, 701년 의상이 선정사로 개칭-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3존불 모심.


    * 원효와 의상의 담론
    원효는 이런 노래를 부르고 다녔습니다. “누가 나에게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려는가?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다듬을까 한다!”이 노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태종 무렬왕이 듣고,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 현명한 아들을 얻고 싶구나. 나라에 현자가 있다면 나라에 이익이 클 것이다.’생각하였다. 그래서 왕이 의도적으로 과부인 요석공주와 잠자리를 만들어 설총이라는 자식을 낳았다.
    반면 의상은 두 번째 당나라에 가면서 원효와 헤어진 후 홀로 험한 뱃길로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다. 당 등주에 도착해서 그곳의 州長인 신도인 유지인의 집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 때, 그 집의 선묘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의상에게 첫 눈에 반해버렸다. 선묘 아가씨는 의상스님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젊의 구도자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갑자기 道心을 발하여‘세세생생에 스님에게 귀명하여 대승을 배워 익히고 큰일을 이룩하겠습니다.’
    제자는 반드시 시주가 되어 필요하시는 생활품을 받치겠습니다라고 큰 소원을 세웠다. 의상스님은 지엄의 문하에서 오랫동안 화엄학을 공부한 다음 문무왕 11년(671)귀국했다. 선묘 아가씨는 한 마리 용으로 변하여 신라 땅까지 스님을 따라 왔고, 스님이 머물던 부석사에 오래도록 살면서 스님을 도왔다고 한다. 하지만 원효는 요석공주가 찾아왔지만 다시 만나지 않았다. (설총의 화왕계)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을 치유해 줄 뿐 아니라 모든 중생들의 소원을 해결해 주는 보살이다. 낙산은 인간의 고통과 슬픔이 없는 공간으로 설정하였다)의 진신이 해변가 어느 굴 안에 산다는 말을 듣고 이곳을 낙산이라 했다.
    의상은 재계 후 칠일 만에 방석을 새벽에 물위에 띄웠더니 용천팔부의 시종들이 굴속으로 안내해 들어가므로 공중을 향해 참례하니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내준다. 의상은 받아갖고 물러나오니 동해의 용이 또한 여의주 한 알을 바치므로 의상이 받들고 나와서 다시 칠일동안 재계하고 나서 이에 관음보살의 참모습을 보았다.


    * 여의주가 진짜일까? 그리고 어디에 있을까?
    고려사권27, 원종14년(1273) 기록에 의하면, 마강이 귀국하게 되어 대장군 송분으로 하여금 함께 가게 하였다. (그런데) 왕후가 일찍이 낙산사 관음여의주를 얻어 보고자 하였으므로 송분이 가는 편에 이것을 보내었다.
    (관음보살이 하는 말이 座上의 산마루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다. 법사가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대나무 땅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시니 그 둥근 얼굴과 고운 바탕이 마치 천연적으로 생긴 것 같았다. 대나무가 도로 없어지므로 그제서야 비로소 관음의 진신이 살고 있는 곳임을 알았다. 이 때문에 그 절 이름을 낙산사라 하고 법사가 자기가 받은 두 구슬을 성전에 봉안하고 그곳을 떠났다.)
    그 뒤 원효대사가 뒤를 이어 관음보살을 참례하려 하였다.
    처음에 남쪽 교외에 이르자 논 가운데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법사가 희롱삼아 벼를 달라고 청하자 여인은 벼가 잘 영글지 않았다고 대답한다.(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인다는 의미에서 아직 원효가 도가 부족하다는 의미이다) 또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니 월수백(생리대)을 빨고 있는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자 더러운 물을 떠서 준다. 법사는 그 물을 엎질러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들 가운데 있는 소나무 위에 파랑새 한 마리가 그를 불러 이야기한다. 제호스님 그만하십시오, 그리고 갑자기 보이지 않았는데 소나무 밑에는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법사가 낙산사에 이르자 관음보살상의 자리 밑에 전에 보았던 신 한 짝이 있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전에 만나여인이 관음보살의 진신임을 알았다. 이에 당시 사람들이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했다. 법사는 성굴로 들어가 다시 관음의 진상을 보려하였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떠났다.
    *�원효에 대해 부정적인 것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유사는 일연스님이 썼는데, 일연 스님이 진전사로 출가하여 들은 이야기로 낙산사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고, 일연스님은 정통성을 중시한 스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체유심조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원효의 깨달음은 여인의 물을 받으면서 허위임을 증명되었다. 물은 원래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는 청정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인간은 물을 통해 더러움을 입히지만 물은 몇 걸음만 옮긴다면 본래 물이 가지고 있는 순수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스스로 자정능력 을 가진다. 그래서 물은 물이다. 물이 더럽다고 말한 의미는 더 정진해야 한다는 의미.
    원효와 의상이 함께 거닐었던 낙산사에서 신흥사의 순롓길 순례나 원효의 의상 중심의 불교축제 도 ...
    이처럼 의상과 원효대사는 당대 최고의 고승으로 우리 지역과 관계있는 인물이다.
    삼국유사 권3, 낙산 이대성관음, 정취, 조신조에 전하는 조신전은 우리 소설사에서 최초의 소설이 라고 한다.
    *조신전 옛날 신라가 서울이었을 때, 世逵寺(지금의 흥교사)의 장원(농장)이 명주에 있었는데, 본사에서 조신을 보내어 장원을 맡아 관리하게 하였다. 조신이 장원에 와서 태수 김흔공의 딸을 좋아 하여 아주 반하였다. 그래서 여러번 낙산사 관음보살 앞에 가서 남몰래 그 여인과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로부터 몇 해 동안에 그 연인에게 이미 배필이 생겼다.
    그래서 그는 불당으로 가서 관음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원망하여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생각하는 마음에 지쳐서 잠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갑자기 김씨 낭자가 기쁜 낯빛을 하고 문으로 들어와 활짝 웃으면서 말하였다.
    “저는 일찍부터 스님을 잠깐 뵙고 알게 되어 마음속으로 사랑해서 잠시도 잊지 못했으나 부모님의 명령을 이기지 못하여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외가 되기를 원해서 온 것입니다.”이에 조신은 매우 기뻐하여 그녀와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녀와 40여년을 살면서 자녀 다섯을 두었다.
    집은 다만 네 벽 뿐이고 좋지 못한 음식마저도 계속 먹을 수 없었고, 마침내 모습이 말이 아니어서 식구들을 이끌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밥을 얻어먹었다. 이렇게 10년 동안 산과 들로 돌아다니니 옷은 찢어지고 몸도 가릴 수 없었다. 마침 명주 해현령을 지날 때, 15세 되는 큰아이가 갑자기 굶어죽자 통곡하면서 길가에 묻었다. 남은 네 식구를 데리고 살면서 그들 내외는 늙고 병들었다. 게다가 굶주려서 일어나지 못하니 10살 된 계집아이가 밥을 빌어먹었는데 다니다가 마을 개에게 물렸다. 아픈 것을 부르짖으면서 앞에 와서 누웠으니 부모도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다. 부인이 눈물을 닦으면서 갑자기 말하였다.
    “내가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어 입은 옷도 깨끗했습니다. 한 가지 맛있는 음식도 그대와 나누어 먹었고, 옷 한 가지도 그대와 나누어 입었지만 집 나온 지 50년 동안 정은 친밀해졌고 사랑도 굳게 얽혔으니 두터운 인연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는 쇠약한 병이 해마다 더해지고 굶주림과 추위도 날로 닥쳐오는데 남의 겹방살이나 하찮은 음식조차도 빌어서 얻을 수 없게 되었으며 수 많은 문전에 걸식하는 부끄러움이 산더미보다 무겁습니다. 아이들이 추워 하고 배고파해도 미처 돌봐주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부부간의 애정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붉은 얼굴과 예쁜 웃음도 풀위의 이슬이요, 지초와 난초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입니다.
    이제 그대는 내가 있어 더 누가 되고, 나는 그대 때문에 더 근심이 됩니다. 가만히 옛날 기쁘던 일을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바로 근심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대와 내가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뭇 새가 다 함께 굶어죽는 것보다 차라리 짝 잃은 원앙새가 거울을 향하여 짝을 부르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추우면 버리고, 더우면 친 하는 것은 인정에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행하고 그치는 것은 人力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수가 있는 것입니다. 원컨대 서로 헤어지기로 합니다!”
    조신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각각 아이 둘씩 나누어 데리고 장차 떠나려고 하는데 여인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고향으로 갈테니 그대는 남쪽으로 가시오.”
    그리하여 서로 작별하고 길을 떠나려 하는데 꿈에서 깨었다. 꿈에서 깨어 보니 타다 남은 등잔불은 깜빡거리고 밤도 이제 새려고 하였다. 아침이 되었다. 수염과 머리털은 모두 희어졌고 망연히 세상 일에 뜻이 없어졌다.
    괴롭게 사는 것도 이미 싫어졌고 마치 한 평생의 고생을 다 겪고 난 것과 같아서 재물을 탐하는 마음도 얼음 녹듯이 깨끗이 없어졌다.
    이에 관음보살의 상을 대하기가 부끄러워지고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에 참을 길이 없었다. 그는 돌아와서 해현령에 묻는 아이를 파보니 그것은 바로 돌미륵이었다. 물로 씻어서 근처에 있는 절에 모시고 서울로 돌아가 장원의 책임을 내놓고 사재를 내어 정토사를 세워 부지런히 착한 일을 했다.
    마지막에 의하면 이 전기를 일고 나서 책을 덮고 지나간 일을 생각해 보니 어찌 조신의 꿈만 그렇겠는가? 지금 모두가 세속의 즐거운 것만 알아 기뻐하고 애쓰고 있지만 이것은 다만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마무리 하고 있다.
    이광수의 꿈은 조신의 내용을 원용하여 전개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꿈을 중시하는 민족이다. 이에 꿈을 문학작품에 수용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낙산의 조신몽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로 우리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금오신화 양양인들의 기록은 여지도서(영조33-1757-1758), 『關東誌』풍속조에 양양인의 성품이 잘 나타나 있다.
    농상(農桑)하기에 힘쓰고 상장(喪葬)에 정성을 다하며 유연(遊宴)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문학을 숭상하고 예의를 존숭한다(務農桑恤喪葬喜遊宴尙文學貴禮義)
    문학을 숭상하고 예의를 존숭하고 함께 즐거운 생활을 하였다는 역사적 기록은 양양인의 풍속과 성격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다. 근면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즐겁게 생활하고, 그리고 문장을 숭상하고 예의를 귀하게 여긴다는 의미이다.



    9. 마무리


    현대나 미래시대는 이야기의 시대이다. 양양은 이야기가 참 많은 고을이다.
    흥미 있는 이야기, 감동을 줄 수 있는 이야기, 함께 할 수 있는 즐거운 이야기가 있다.
    이제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하여 자부심을 느낄 수 있고, 양양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였으면 좋겠 다.
    양양지역은 풍부하고 다양한 신화, 전설, 민담이 전해오고 있다. 예-동해신묘이야기, 낙산사 조신 이야기, 원효와 의상이야기, 성황신이야기, 등 무한하다.
    문제는 이 무한한 가치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담론은 생활 속에서 애정을 갖게 되고, 상상력은 미래사회의 원동력이 되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여유로운 삶을 제공한다.
    우수한 문화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사라져 가는 문화유적을 복원하여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화가 양양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여러분께서 양양의 우수한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저는 양양의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다시 강의 할 기회가 있다면, 아름다운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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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려사』권82 표36 병2 성보조
    2) 『고려사』 『고려사절요』
    3) 『관동지(關東誌)』공해조(公●-공관)에 의하면, 객사(客舍) 35간, 아사(衙舍) 108간 , 향청(鄕廳)10간, 훈련청(訓練廳) 14간, 군기청(軍器廳) 10간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군보(軍保)조 의하면, 기병(騎兵) 454명, 어영군(御營軍) 19명, 금위군보(禁衛軍保) 37명, 자보(資保) 21명, 훈련도감 포수보(訓練都監砲手保) 188명, 별파진(別破陳) 5명, 악공보(樂工保) 18명, 악생보(樂生保) 6명, 전설보(典設保) 36명, 무학(武 學) 13명, 아병(牙兵) 63명, 속오군(束伍軍) 309명으로 그 규모를 인지할 수 있다.
    양양관아의 건물에 관한 기록은『현산지(峴山誌)』공해(公●-공관)조에 명칭과 위치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부성_돌로 쌓은 곳은 둘레가 403척, 토성은 둘레가 2,825척으로 성안에는 우물에 2곳이 있다. 지금 성벽은 대부분이 무너져 버렸고 다만 동,남,서문만 남아있다.
    양양읍성 둘레 2,724척은 본부와 원주인 군인 1,475명으로써 역사하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