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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시기 양양군의 군정 통치에 대한 고찰

    23. 기차정거장 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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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기차정거장 빈집


    임영애 (여, 83세, 양양읍 남문3리, 당시 교사)

    면담일 : 2015.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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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용천막 , 기차정거장 , 빈집을 찾아 한반에 70~80 명씩 공부를 했다 .
    1950 년 6 · 25 전쟁이 나자 부모님과 5 형제가 묵호로 피란을 갔다 . 할머니는 연세가 많아서 가지 않았다 . 피란을 가다보니 빈집은 다 내 집이다 . 김치도 있고 쌀도 그릇 솥도 있어 내 집처럼 들어가 밥을 해 먹고 또 걸어서 피란을 갔다 . 피란을 갔다 오니 1951 년에 교원을 모집했다 . 그래서 속초에 가서 약 50 명이 응시하여 강습을 받았다 . 남여 비율이 비슷했다 . 강습이 끝난 후 속초국민학교에 발령을 받았는데 학교 교실이 없어 군용천막 , 기차정거장 , 빈집을 찾아 한반에 70~80 명씩 공부를 했다 . 가끔 옥수수 가루를 쪄서 급식을 했다 . 우유와 분유를 끓여서 나누어 주었지만 . 학생들은 우유를 먹어보지 않아 잘 먹으려하지 않았 다 .


    - 그 당시에는 양양도 빈집에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

    교통이 좋지 않아 속초에 방을 얻으러 다녔는데 교사는 잘 주지 않았다 . 교사는 월급이 쌀 몇 되박을 받으니 방세를 잘 내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 군인가족은 인기가 좋아 방구하기 쉬웠다 .

    교사에 비해 군인가족은 보급품도 있고 씀씀이도 좋아 군인 가족을 선호했다 .

    그래도 교사를 포기하지 않은 것은 교사가 아니면 집에서 노는 것보다는 낫다 싶었다 . 차차 돈도 조금씩 주고 학부형이 쌀도 주었다 . 점심은 집에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 . 그렇게 2 년을 다니고 양양국민학교로 발령을 받아 근무했다 . 양양도 빈집에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 운동장에 천막을 치고 가르쳤고 운동회는 꼭 했다 . 운동회 연습은 1 개월 정도 하였고 운동회비용은 학부모들이 모금해서 행사를 치렀었다 . 후에 같은 지역에 사는 남편과 결혼식을 올렸는데 당시 결혼식 주례에는 강진천 교장선생님이 맡아주셨다 . 옛날에는 교사를 많이 존경했 는데 지금은 존경의 마음이 덜한 것 같아 안타깝다 . 선생님을 더 존경하였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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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군 제3차 단기교원양성소 수료 4287(1954)년 6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