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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시기 양양군의 군정 통치에 대한 고찰

    29. 조모가 사망하자 동내 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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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조모가 사망하자 동내 분들이

     

    전인원 (남, 79세, 양양읍 구교리)

    면담일 : 2015.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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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집은 국군 장교들이 주둔해 있어 전쟁 때 타지 않았다 .

    인공 때 양양 초급중학교 3 학년이었는데 곤우골에 국방군 유격대가 몰래 들어와 양양초급중학교에 주둔하고 있는 인민군 부대를 폭파하려고 박격포를 쏘았는데 남대천에 떨어졌고 미국 비행기가 남대천 다리를 파괴하려고 폭탄을 폭격하였는데 웅덩이가 파인 일이 있었다 .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셨는데 논이 말라 파래로 웅덩이의 물을 푸는데 인민군 탱크 여러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남쪽으로 나아갔다 .

    마을에 오니 동네 게시판에 남조선 어디까지 밀고 나갔다고 지도에 공화국 국기를 표시해 놓았다 . 우리는 다 이겼으니 가서 일하라고 했다 . 학교에서도 그렇게 선전을 했다 .

    군 입대를 하라고 상평인민학교에서 신체검사를 하고 군대를 뽑아갔는데 신체검사하면 모두 합격이었다 . 고급 중학생은 모두 입대하고 (17 세 이상 ) 초급중학 3 학년생은 자원입대하였다 .

    국군이 10 월 2 일 양양으로 진군한다고 하자 인민군은 국군이 여자들은 젖통을 베어내어 죽인다고 선전하여 우리 누나가 고 3 학년생인데 겁을 먹고 사교리로 피란을 갔다 .

    또 공산당 여맹위원장이 와서 너희들을 죽일 터이니 간성이북으로 가야 살 수 있으니 며칠만 가 있어라 하고 몇 번 찾아왔다 . 그때 우리 누나는 그 아주머니 딸과 같이 북쪽으로 간 후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 1 · 4 후퇴 시 그 여맹위원장이 마을에 나타난 것을 우리 어머니가 야단을 치니 북으로 쫓겨 가고 말았다 .

    우리 집은 구교리에 있었는데 국군 장교들이 주둔해 있어 전쟁 때 타지 않았다 . 우리는 양양국민학교에 국군이 왔다기에 가서 만세를 불렀다 . 우리는 공산 당을 싫어했다 . 초급중학교 때 소년단과 비 소년단이 있는데 나는 싸움을 자주 하여 소년단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 자아비판시간에는 매일 불려나가서 비판을 받았다 . 규칙을 안 지키고 , 싸움을 자주하고 , 공부도 잘 못하고 그래서 소년단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

    피난 갈 때 아버지는 재봉틀 대가리를 지고 갔다 . 나도 식량을 지고 강릉 , 삼척 , 임원까지 걸어서 갔다 . 피란민 속에 인민군이 숨어 있어 미군 비행기가 폭격을 하여 인명이 살상되기도 하였다 .

    강릉 큰아버지 댁에서 1 박하고 밤재 [ 강릉시 옥계면 낙풍리와 강동면 산성우리에 접한 고개 ] 를 넘어 이모식구 , 우리 식구 , 고모님 나 이렇게 친척끼리 먹을 것을 가지고 피란을 가다가 빈집에서 잤다 . 식량이 떨어지자 아버지가 인부로 짐을 지고 갔다가 1 주일 만에 오셨는데 소 껍질을 지고 오셨다 . 그것을 까실구어 ( 그슬리어 ) 가마에 삶아 그것을 며칠 먹으니 냄새가 나서 더는 못 먹었다 .

    식량이 문제여서 이모네와 갈라서 살기로 했다 . 이모는 호산으로 가고 우리는 다시 삼척 용하에 와서 정착 보리농사를 많이 지었다 . 1951 년 봄 보리농사를 지어 가지고 삼척 정라진에서 돛대가 달린 노를 젓는 배를 타고 사흘을 지나 강릉까지 왔다 . 배 삯은 아버지가 농사일을 해서 번 돈과 어머니가 재봉틀로 바느질을 해서 번 돈으로 한 것이다 .


    -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동네사람들이 마당가에 토롱을 해 놓았다 .

    구교리 에서는 우리만 피난가고 다른 사람들은 장질부사에 걸려 죽은 사람도 많았다 . 집집마다 굴이 있어 굴속에 습기가 많아 살이 빠져 꼿꼿했다 . 피란에서 돌아와 보니 할머니가 혼자서 사망하여 동네사람들이 마당가에 토롱 [ 임시로 만든 묘 ] 을 해 놓았다 .

    다른 마을은 서로 고자질하여 인명피해가 났는데 구교리는 그런 일 없이 양쪽이 인명 피해가 없었다 .

    피난에서 돌아와 인공 때 5 학년을 졸업한 전력으로 중 2 학년으로 한 학년 내려서 학교로 들어갔다 . 군당 사무실에 가마니를 깔고 배웠다 . 책이 달라 선생님이 책을 구해다 배웠다 .

    북에서 피난을 나와 1 군단 군속으로 있던 권문수 교감 , 문관으로 있었던 김덕겸 선생이 교사가 되었다 . 김덕겸 선생은 이북 고성에서 배구 선수였는데 배구 코치를 해 주어서 체육교사가 되었다 . 1951 년 봄부터 9 인조 배구 선수로 활동하여 좋은 성적을 내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