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남면(縣南面)의 유래(由來)


군의 동해안 남부에 위치한 면이다. 관내에 죽도·매호·남애해수욕장이 소재한다.면소재지인 인구리를 비롯하여 21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본래 고구려의 혈산현(穴山縣)인데 신라 때 동산현(洞山縣)으로 고쳐서 명주(溟州)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가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익령현(翼嶺縣)에 속해 내려오다가 조선조 때 현남면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21개리를 관할하다가 1945년 38°선의 분단으로 인하여 강릉군에 편입되었는데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양양군에 환원되었다. 현남면은 동산현의 옛땅이니 동산 남쪽에 위치하였으므로 현남이라 명칭되고 소재지는 인구로 농어업이 대략 반반이며 인구밀도가 높다. 천년전 현을 다스리던 곳이요 수십회의 병화(兵火)가 거쳐 간 땅이며 죽도의 연사대, 농구암(鍊砂台, 弄鳩岩) 등은 신선이 노닐던 환영(幻影)이 아롱거리고 매호(梅湖)에 배띄우니 학(鶴)과 거북이가 함께 소요(逍遙)하느니라 화상암(和尙岩) 옛 전설은 최공(崔公)의 일화로 회구지정(懷舊之情)에 도취(陶醉)케 하도다.

◆ 인구리(仁邱里) : 인구리는 해송정(海松亭)으로 인가(人家)가 없다가 인구역[(仁邱驛) : 과거는 원포리 인구곡(麟邱谷)으로부터 이역(移驛)하여 왔다함]이 설치된 후 인구라 칭하였으며 그 후 민가의 증가로 말미암아 1,2리로 분할하였다. 전설이 깊은 죽도가 있으며 현남면 소재지이다.『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인구역리로 불렀다.

죽정자리(竹亭子里) : 고려말기에 향교 소재지로서 후산(後山)에 죽림이 울창하여 추절(秋節)에 사람이 대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감을 따먹을 정도로 대나무가 굵었다고 하며 그후 죽리라고 부른다고 한다.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죽리[일명 댓골]와 정자리[정자골]를 병합하여 이름지었다.

◆ 광진리(廣津里) : 과거 큰바다라고 불러왔는데 그 후 광진리(廣津里)라고 부르고 속칭 ‘광나루’라고도 칭한다. 해변은 온통 너럭바위이며 이곳에 휴휴암(休休庵)이란 절이 새로 세워져 관광지로 각광을 받는다.

◆ 포매리(浦梅里) : 망월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세가 매화(梅花)가지 모양으로 형성되어 개매(開梅)라 하다가 그 후 지금과 같이 개(浦)가 이루어졌으므로 포자(浦字)를 따서 포매(浦梅)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곳은 천연기념물인 백로·왜가리 도래지로 자연 생태학자들의 관심이 모여드는 곳으로 일찍이 양로시설인 보리수마을이 건립되었다.

◆ 견불리(見佛里) : 현재 거주하는 조씨선조 모인(趙氏先祖某人)의 대과급제 당시 부처님이 현몽되어 등과하였다는 전설로 견불리라 칭한다. 지형이 ‘노승예불’의 형국이라 하여 견불이 변하여 존불이라 하며 또는 개매 위쪽이 되므로 웃개매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견불리라 하였다.

◆ 남애리(南涯里) : 포매(浦梅)의 매화(梅花)가 결실(結實)하여 남애지역으로 향하여 떨어지는 모양이기 때문에 낙매(落梅)라고 불러오다가 그 후에 남쪽바다라는 뜻으로 남애라고 개칭하였고 자연인구증가로 1,2,3,4리로 분할하였다. 남애항은 양양에서 가장 어획량이 많은 국가 1종 어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양야산(陽也山)에는 봉수대가 있었다.『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양야진리로 불렀다.

원포리(遠浦里) : 과거 임호정리에 속하여 있었고 멀리 바라다 보이는 마을이므로 머지개라 하였고 최초에는 인구곡(麟邱谷) 인구역(仁邱驛)의 소재지였다고 한다. 영조 35년(1759년)에는 원당리로 불렀다.『여지도서』양양부편.

지경리(地境里) : 과거에는 임호정리에 속하였고 그 당시 주위가 방축(防築)이었고 강릉과 양양의 군계였기에 지경리라고 한다. 신석기 문화의 유적지가 강릉원주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조사가 끝났으며 7번국도 확포장으로 인하여 매장 관리 중이다.

임호정리(臨湖亭里) : 임호평야가 과거에는 호수로서 이름이 임호(臨湖)라고 하며, 당시 부근에 정자가 있었기에 임호정(臨湖亭)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지금도 지중(地中)에서 말[해초의 일종]이 나오고 있다.

입암리(笠岩里) : 동리 남쪽 산에 암석(岩石)이 있는데 그 암석의 모양이 갓과 같다하여 관암(冠岩)이라 하였고 맞은편 산 밑에 족두리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두 가지 이름을 합하여 갓바위라하여 입암리라고 칭한다.

상월천리(上月川里) : 망월산 주용(走龍)이 월천에 머물러 반달형을 이루고 화동[(花洞) : 꽃골] 시동[(寺洞) : 절골] 어혈동[(於穴洞) : 느르리골]의 세골형세가 내천자를 이루었으므로 일명 ‘달내’라고 하고 한자로 月川이라고 쓰며 상월천, 하월천으로 구분한다. 일명 웃달내라고도 한다. 영조 35년(1759년)에는 월래리로 불렀다.『여지도서』양양부편.

◆ 하월천리(下月川里) : 본래 월천리[달래]였으나 마을이 산골짝을 따라 길게 형성되고 호(戶)증가로 서쪽지역은 상월천 동남쪽 지역은 하월천으로 구분하였다.

◆ 두창시변리(斗昌市邊里) : 두리(斗里)는 북분리에 속해 있었고 한때는 후동(後洞)으로 되었다가 그 지형이 말[斗]처럼 되었다고 하여 두리라 칭한다. 창리(昌里)는[과거는 倉里라고도 함] 죽리에 속하였다가 창찰사(倉察使)의 답주지(畓住地)라 하여 창리(昌里)라고 한다. 시리(市里)는 창리 부근에 시장이 있던 곳이라 하여 시변리라 불렀다고 하며 주민의 인구수가 적어 3개리를 합하여 ‘두창시변리’라고 부른다.

◆ 동산리(銅山里) : 본래 고구려 때 혈산현(穴山縣)의 소재지인데 신라 때 동산현(洞山縣)으로 고쳐서 내려오다가 조선조 때 동산리(洞山里)가 되어 양양군 현남면에 편입되었다. 이름의 유래는 마을 모양이 장구 모양이라는 데서 나왔다는 설과 구리 동(銅)자를 쓰는 데서 나왔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 북분리(北盆里) : 옛 예맥 당시 북방변경(北方邊境)이라 하였다가 그 후 지형이 분지(盆地) 모양으로 형성되었다하여 북분리[뒷벌]라 칭하였다. 또한 1916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거릿말, 골말, 구렁말 성촌(城村) 영남동 용숫골 현촌(峴村)을 병합하여 북분리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