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북면(縣北面)의 유래(由來)


군의 동해안 중남부에 위치한 면이다. 면소재지인 하광정리를 비롯하여 14개의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세종실록지리지』양양도호부에 ‘속현(屬縣)이 하나이니, 동산현(洞山縣)은 본래 고구려의 혈산현(穴山縣)인데, 신라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명주(溟州)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 9년 무오에 익령현(翼領縣) 임내에 이속시켰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조선 후기의 현북면과 현남면으로 분리되었다는 기록에서 양양도호부의 속현인 동산현에서 지명이 유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 때 동산현의 북쪽이라하여 현북면이 되어 도동(陶洞), 말곡, 어성전, 광정, 명지 등의 5개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현재와 같이 14개리를 관할하였다.
8·15광복과 더불어 38°선 분단으로 인하여 기사문, 말곡, 상광정, 중광정, 하광정, 도리 등 6개리는 38°선 이북지역에 편입되었다. 나머지 8개리는 현남면에 병합되어 강릉군에 편입되었다가 1950년 수복되고 1954년 현북면으로 복구되었다.

지세는 서고동경(西高東傾)하나 서쪽의 좁은 마을은 산이 높고 깊은 계곡으로 전답이 적어 사람살기가 고생스럽고 동쪽은 들판으로서 전답이 고루 분포되어 땅이 비옥하여 살기 좋은 곳이다. 하조대는 선인들의 소요처라 승경도 장(壯)하거니와 시원스러운 동해안과 기암절벽 위의 누각에는 시인묵객과 낚시꾼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기름진 광정평야는 바둑판과 같이 농경지 정리가 잘되어 있다.

◆ 하광정리(下光丁里) : 예전에는 광정리(廣丁里)였는데 그 후에 광정리(光丁里)로 하였고 인증가(人增加)에 따라서 상중하의 중에서 아래에 있음으로 하광정리(下光丁里)라고 한다. 여기에는 하조대가 있어 해금강을 방불하며, 현북면의 소재지로서 면단위 각급기관 단체가 있고 7번국도의 연변(沿邊)에 소재하여 교통이 편리한 광정천의 하구지역이다.

◆ 중광정리(中光丁里) : 예전에는 광정리(廣汀里)라 하였으나 그후 마상초에 광정리(光丁里)라 기록되어 그대로 개명하여 오다가 인구증가로 인하여 상·중·하리로 분할, 가운데에 있으므로 중광정리(中光丁里)라 부르게 되었다.

◆ 상광정리(上光丁里) : 상광정리는 현북면 중심지며 면사무소와 보통학교가 이곳에 설치되었으며 최초에는 광정진(廣丁鎭)이였던 것이 인구의 증가로 상·중·하리로분할하여 상중하 광정리(光丁里)로 개칭되었고 광정진(廣丁鎭)의 유래는 지금의 중광정리와 본동 경계지인 잣골뒷산 능선에 고대(古代)에 여진과 왜구의 침입을 막기위하여 광정진을 설치하였으므로 광정진이였고 지금도 진(鎭)의 성지(城址)석축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명지리에서 흐르는 하수와 대치리에서 흐르는 하천이 이곳에 합류하여 광정천을 이루고 있다.

기사문리(基士門里) : 기사문리는 내외마을로 구분하여 옛날에는 내칭(內稱)은 초진(草津)이고 외칭(外稱)은 기사진(奇沙津)으로 칭하였다. 해변백사장을 걸어가면 사박사박 발자국 소리가 나므로 오사(嗚沙)라고 했다. 근래에 와서 기사진을 기사문리로 개칭되었다.『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초진리로 불렀다.

잔교리(棧橋里) : 마을중간으로 하천이 형성된 관계로 하천을 건너기 위한 잔교(棧橋)가 많았다하여 잔교리라 한다. 일명 잔다릿골이라고도 한다. 우리 민족의 운명은 38°선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잔교리를 가로 지른 선으로 1950년 10월 1일 우리 국군이 잔교리를 통과하는 7번국도 38°선을 첫 발을 딛어 북진하였으므로 국군의 날을 지정한 계기가 된 곳이다.

말곡리(末谷里) : 옛날에는 하곡리(荷谷里)라고도 하고 미곡리(未谷里)라고 하였는데 미자(未字)와 말자(末字)가 비슷하므로 미자(未字)가 말자(末字)로 와전된 것이다. 일명 “머일”이라고도 한다.

◆ 대치리(大峙里) : 대치리를 한재라고 부른다. 대치리의 대자(大字)는 큰대자이고 치자(峙字)는 재치자로 한재라고 부른다. 이 마을은 동으로 임재, 서에는 희묵재, 남으로 직시재, 북으로는 귀골재로서 한재씩 넘나드는 관계로 큰 고개 한재라고도 한다.

명지리(明池里) : 옛날 마을 한가운데 적은 못이 있었는데 수심이 깊은데도 물밑이 징청(澄淸)하여 노는 고기를 헤아릴 수 있으리 만큼 수명(水明)하였으므로 명지리(明池里)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곤죽골 소맷골 옹기점마을을 병합하여 명지리라 했다. 양양지역은 송이로 유명하지만 특히 명지리 송이도 유명하다.

어성전1리(漁城田一里) : 마을 주위는 산성을 이루고 마을은 분지형(盆地形)으로 기름진 전답이 수십만평이 있고 오대산, 응복산(鷹伏山)으로부터 발원하여 흘러오면서 여러 곳의 대소계곡의 물이 합수(合水)하여 평탄한 하상이 넓게 펼쳐지면서 물고기가 많이 서식(棲息)함으로써 장작불을 때고 이밥 먹고 고기 잡아 배불리 먹으니 살기 좋은 이상향(理想鄕)을 이룬 곳이라 하여 어성전(漁城田)이고 현북면의 출장소가 있었으며 광복 후 행정구획상 어성전1리와 어성전2리로 분할되었다. 어성십경(漁城十景)의 아름다운 경치를 품고 있으며 예전 사람들은 어성밭이란 말로 잘 통한다.『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어성리로 불렀다.

어성전2리(漁城田二里) : 어성전리로 되어 있는 것을 1950년 6·25한국전쟁 후 분할하여 어성전1·2리로 되었다. ‘탁장사놀이’ 전승마을로 전국에 널리 알려진 관광의 명소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 원일전리(元日田里) : 지명의 유래는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은데 마을에 고을원이 살았다 하여 원일전리가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오대산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으로

흐르는 대천(大川)은 평탄한 이 마을 중심부에 이르러 비로소 노기를 푸는 듯 소리없이 흐르는 모습이 마치 잠을 자는 것과 같다하여 와천동(臥川洞)이라 하였다고 전하고, 원일(元日)이라는 화전민이 이곳에 들어와 전토를 개척하여 점차 인구가 많이 입주를 하게 되었으므로 “원일전리”라고 칭하게 되었다.

◆ 장리(獐里) : 옛날에는 노루가 많이 서식하였다하여 장리라고 칭하였는데 속칭  “노루골”이라고도 한다. 또한 옛날 뱃터말 근방에 겨울에 눈이 내려도 항상 눈이 녹아 없어지는 자리가 있었는데 이곳에 노루가 자주 머물다가는 길지로 장흥사(獐興寺)라는 절을 지었다는 연유로 명명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 도리(陶里) : 질골이라고도 하는데 옛날부터 점토가 생산되어 질그릇을 만들던 마을이므로 도자기 도자를 써서 한자로 도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은 신라에 이어 고려 초엽까지 현읍(縣邑)이 있었다고 전해지므로 당시의 유적지와 유물을 더듬어 볼 수 있다.『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도동리로 불렀다.

면옥치리(綿玉峙里) : 고명(古名)은 면록치리(眠鹿峙里)였는데 그 후 오응길(吳應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용모가 옥같이 담백(淡白)하였으므로 이런 한새인물(罕世人物)이 면면(綿綿)하기를 염원하는 뜻에서 개칭하여 온 것이다.『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면비치리로 불렀다.

법수치리(法水峙里) : 남대천 남쪽 상류 일부가 여기서부터 발원되므로 마치 불가의 법수를 색출한 것과 같다는 전설이 있으며 매월당 김시습이 검달동에 와서 기거할 때 법수치리라 붙인 이름이라 한다. 또한 대승진목의 변이 고기로 화(化)한 전설을 가진 법수가 흐르는데서 법수치리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