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면(巽陽面)의 유래(由來)


군의 동해안 동남부에 위치한 면이다. 관내에 양양국제공항과 동호해수욕장이 있다. 면소재지가 있는 하왕도리를 비롯하여 학포리·상운리·동호리·오산리 등 24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손양이라는 지명은 양양에서 손(巽)방향, 즉 동남방향에 있는 면이므로 이름 지은 것으로 보인다.

1914년에 조선 후기의 동면과 남면을 통합하여 손양면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오대산맥이 남대천에서 용을 돌려 동면평과 상운평의 양평야를 형성하였으니 토질이 비옥(肥沃)하여 양양의 곡창이라고 할만치 농민주착(農民住着)의 천연적인 환경이 부여되고 있거니와 수산봉수대(水山烽燧臺)와 상운고정(祥雲古亭)은 유지(遺址)만이 남았으면서 전대의 제도와 면모(面貌)를 연상케 하며 쌍호(雙湖)의 비학(飛鶴)과 오봉(鰲峰)의 신기루(蜃氣樓)는 타계에서 볼 수 없는 진경이다. 과거 25개리로 구성되었던 당면은 광복 후 2개리(석개리·부소치리)가 줄어 현재 23개리로 되어 있다.

◆ 왕도리(旺道里) : 고려 때 판교리(板橋里)의 부속동으로 있었는데 조선 세조대왕이 낙산사로부터 월정사에 행행도중 이곳에 있는 청풍정(淸風亭)에 소요(逍遙)하셨다고 왕도리(王道里)라 칭하였다가 그 후 일제 강점기에 왕(王)자가 쓰여지는 지명은 거의 다 왕(旺)자로 고쳐 기록하였다. 이는 일본인들이 문화정책 말살이란 의도 하에 왕(王)자를 일왕을 의미하는[日+王=旺]자로 고쳐 기록하였다고 하는데 이 마을은 웃왕도와 아랫왕도로 불리어 오다 웃왕도를 상왕도리 아랫왕도를 하왕도리로 분할되었다. 상왕도리에는『서당마을』이 있는데 약 100년 전 해운(海雲)선생이 서당을 창설하여 한문을 가르친데서 연유한다.『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판교리로 불렀다.

간리(間里) : 약 200여 년 전부터 동쪽에 송현리 남쪽에 왕도리 북쪽에 월리가 있는데 그 사이에 형성된 마을이므로 간리라 하고, 속칭 “새잇골”이라고도 한다. 지리적으로 조선시대부터 군사 요해지(要害地)로 알려져 있다.

송현리(松峴里) : 옛날에 수십주의 대송(大松)이 뒷고개에 울창하였기에 송현리(松峴里)라고 칭하였다. 본래 양양군 남면지역으로서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새이말(間村) 정자동 조구터를 병합하여 송현리라하여 손양면에 편입되었다.『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고송개리로 불렀다.

수여리(水餘里) : 고려 명종(明宗)때부터 조선초기(1450년) 단양우씨(丹陽禹氏)의 우거지(寓居地)였다. 전염병으로 우씨일가(禹氏一家)가 몰락하고 두 가구만 남았을 무렵 이세문(李世門)이 단종폐위 계유정란(癸酉靖亂)시 삼척에 정배되었다가 1456년 함흥 본궁으로 양이(量移) 중 양양에 잠시 머물었을 때 무혐의 특별 몽유[蒙宥 : 죄인이 놓임을 입음]로 윤허[允許 : 임금이 허가함]의 은혜를 입고, 이곳을 매입 정착한 곳이다. 당시 마을 안은 온통 굴참나무숲이던 것을 개간 정지하여 양양 제일의 명당 터라 불리는 흥덕말을 조성하고 보니 곳곳에 넓은 바위가 있어 그들 바위에서 글공부를 하였다하여 ‘문바우마을’[文巖鄕]이라고 하였다. 한편 마을 뒤는 남대천의 물굽이가 휘어 닿는 곳으로 물이 풍부하고 경치가 아름답고 물이 모자라는 때가 없다하여 ‘무내미’라고 불렀으며 조선시대 관덕정이 있었다. 행정구역상 조선시대는 통칭 동면(東面)이라 하였으며, 1916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당뒷말, 바구매[博古馬], 버덩말, 솔말, 동녘말, 흥덕말, 서녘말, 넘말을 병합하여 수여리라 명하고 손양면에 편입되었다. 수여리에는 얄궂은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시대 1580년 송강 정철이 강원관찰사가 되어 동해안을 순행 중 이 마을 서낭재에 올라 서서  “이크! 여기 대리[大螭 : 큰 교룡, 큰 뿔 없는 용] 한 마리 있군”하면서 소금항아리로 살(煞)을 지르고 갔다한다.

금강리(金崗里) : 고려초에 선인(先人)이 지중지석(地中之石)이 여금견지고(如金見之故) 즉, ‘땅 속의 돌이 금강석 같이 보인다.’ 하여 금강리(金剛里)라 한 것이 1910년 일제강점 이후 금강리(金崗里)로 之故되어 부르고 있다. 부연(敷衍)하면 금강리의 가운데 글자가 굳셀강(剛)자이였는데, 산등성이 강(崗)자로 변하였다.

가평리(柯坪里) : 약 200여 년 전까지 마을주위에 갈풀이 많이 자생하므로 가평리라 칭하였는데 속칭 “갈벌”이라고도 한다. 본래 양양군 동면의 지역인데 1916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손양면에 편입되었다. 가평리 송림 속에 철기시대 때의 움집유적이 발굴된 역사의 고장이다.

송전리(松田里) : 예전에 금강리와 한 동네였다가 규모가 커져 약 200년 전에 분리되었다. 옛 지명은 솔밭으로 제주도 솔을 옮겨 심어 그 소나무가 번성하여 솔밭을 이루었다고 한다. 제주 고씨의 집성촌이었으나 광복이후부터 다른 성씨들이 차차 들어왔다. 그러나 여전히 제주 고씨가 마을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마을주민의 상당부분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동쪽은 대해(大海)에 연접하고 동서북에는 송수무성(松樹茂盛)하여 사시장청(四時長靑) 수려한 풍광으로 둘러있는 한 가운데 자리한 집단마을로 주위에는 크고 작은 개와 웅덩이가 많아 구명(舊名)은 송호리[松湖里 : 350여 년 전]로 칭하다가 그 후[연대미상] 송전리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 속칭「솔밭」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곳곳에는 송전(松田)이란 지명이 있는데 이는 나라에서 귀한 목재를 생산하던 곳이므로 이 마을은 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 오산리(鰲山里) : 쌍호(雙湖)의 하구에 위치한 마을로서 오무(鰲舞)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그것은 파도가 치는 날 낙산사에서 오산봉우리를 보면 마치 큰 자라가 춤을 추는 것과 같다고 한다. 또한 봉우리가 자라 모양처럼 생겨 그렇게 부른다고도 한다. 오산리는 일제말 마을 이름이 바뀌기 전에는 ‘오무’라 불리던 마을이다.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마을 입구에서 발굴, 해양어로생활에 쓰이던 유물이 많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오산리 마을의 역사는 그 어느 곳보다도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동면지역 이였으나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손양면에 편입되었다. 고려시대 “송림사”라는 절이 동해 해변 쪽 오산리와의 경계근방에 있었는데 지금은 지형이 변하여 흔적도 없다.

수산리(水山里) : 전면은 대해(大海)요 후면(後面)은 산이 있으므로 수산리라 칭하며, 이곳에는 봉수대가 자리하고 낙산사에서 수산 굴암자를 보면 흡사 파도가 춤추는 것과 같다 한다. 일명 수무라고도 하는데 본래 양양군 동면지역으로 있다가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손양면에 편입되었다.『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수산진리로 불렀다.

학포리(鶴浦里) : 약 500여 년 전에 적성동(赤城洞)이라고 칭하였는데 정조대왕(正祖大王)때에 박진사(朴進士)가 송전리 앞에 일호(一湖)가 있으므로 호명을 쌍호라 칭하고 백학이 상집(翔集)함으로 학포리라 칭하였다. 김삼연 동우기(金三淵東遇記)에 양양부 동방십리 구봉산(襄陽府東方十里九峯山) 아래 적성동(赤城洞)이 있는데 원림(園林)이 청수(淸秀)하고 호산(湖山)이 화려(華麗)하며 화조월석(花朝月夕)에 풍광이 유미(幽媚)하다고 절찬하였다. 구봉산(九峯山) 아래에는 적성동이라는 삼자석각(三字石刻)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불성리로 불렀다.

도화리(桃花里) : 어촌인 수산리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치한다. 이질고개와 하고개에 둘러싸인 본 마을은 마을이 깨끗하고 감나무가 많이 있는데 옛날 이름은 도리골로 복숭아 도(桃)자에 오얏나무 리(李) 자를 썼다. 해안도로 건너 바닷가 쪽은 ‘발월’이라 한다. 본래 도락골이라 하였는데 복숭아가 떨어지는 마을이라는 뜻이며 고려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도목(桃木)이 많이 있어 그 풍경이 좋아 그 이름을 도화리라고 한다. 여기는 수십만년전 “아슐리앙”계통의 구석기 문화가 형성된 인류의 숨결을 더듬어 보게 하는 곳이다.

동호리(銅湖里) : 양양국제공항 동쪽 해변 마을이다. 500년 전에 큰 호수가 있었고 그 호수의 빛이 구리색과 같아서 구리개, 굴개라 불렀다고도 하고, 이곳에서 구리가 많이 나서 동호리라 불렸다 한다. 개통을 못한 기차 터널을 지나 위치한 장전리와 통합을 거쳐 현재는 동호리가 되었다. 터널을 못 미쳐 서낭나무와 장군석, 그리고 약수터가 있으며 손양 어촌계에 소속된 마을이다. 손양 어촌계는 수산리, 오산리, 동호리의 세 개 마을이 모여서 하나의 어촌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행정적으로만 하나로 묶여 있을 뿐 재산권은 각각 독립되어 있다. 동호리 마을의 형성유래는 알 수 없으나 예전에는 염전도 많았던 곳으로 넉넉한 생활을 한 마을이다. 풍설이기는 하나 굴개가 울면 비가 온다고 하며, 멸치후리가 이 고장의 중요 민속놀이로 정해져 있다.『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굴포진리로 불렀다.

상운리(祥雲里) : 동리지형이 주마형국(走馬形局)이고 여운포리 국암[(麴岩) : 누룩바위]과 여운포의 연개를 향하였으며 일출시에는 상운이 장부(長浮)하였으므로 상운리라 하였다. 또 옛날 상운리 어디엔가에 상운사라는 절이 있었다하여 상운리라고 칭하였다고도 한다. 조선시대 새로 부임하는 부사가 먼저 찾았다는 유명한 상운정(祥雲亭)이 있었으며 본래 양양군 남면지역으로 조선조 때 상운역이 있어 교통의 중심요지였으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관터, 정잣말을 병합하여 손양면에 편입되었다.『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상운역리로 불렀다.

여운포리(如雲浦里) : 본래는 연포였었는데 발음의 착오로 지금은 여운포리라고 부른다. 본래 양양군 남면 지역으로서 개가 연하여 있으므로 연개 또는 여운포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손양면에 편입되었다. 상운리에서 소개한 연못과 누룩바위는 이 마을에 있다. 일명 ‘상서로운 구름이 구름포구를 이룬 것 같다.’라고도 하는 미래의 땅이다. 6·25한국전쟁 때 야간에 작전 중이던 미군 함선이 여운포가 오색령 밑까지 훤하게 확 트인 포구로 잘못 보고 전진하다가 백사장까지 다다른 전쟁사가 있다.

하양혈리(下陽穴里) : 지형이 우오[迂澳 : 구불고 깊다]하여 양기를 독수[獨受 : 혼자받는다]하므로 양혈(陽穴)이라고 칭하였다. 1920년도에 상하 2개리로 분리하여 하양혈리가 되었다. 이곳에는 임병천의 처 파평윤씨의 열녀각이 있어 남녀간의 사랑과 여인네들의 정절을 깨우치게 하고 있다.

◆ 상양혈리(上陽穴里) : 1920년 각리 행정구역 개편시 하양혈리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이름하였다.

밀양리(密陽里) : 약 400년 전부터 파평윤씨(坡平尹氏)가 거주한 곳인데 둘레가 동령(洞嶺)에 쌓인 남향으로 겨울이 늦게 들고 봄이 일찍 와서 기후가 밀온하므로 밀양리라고 한다. 본래 양양군 남면의 지역으로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손양면에 편입되었으며 예전에 행남학교(杏南學校)가 있었으며 행남(杏南)이라고도 칭하

였다. 또 고려말 우왕 비의 병환시 양주도호부에서 신약을 개경에 하룻밤 사이 전달했다는 16세 윤(尹) 총각의 무덤이 있어 양양의 수호신 격이었다 한다.

와리(瓦里) : 약 200여 년 전에 손씨(孫氏)가 거주할 때 토와공장(土瓦工場)을 설치하였다하여 와리(瓦里)라 칭한다. 함창봉(含蒼峰) 아래 따뜻한 동남쪽에 마을을 이루고 있다.『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와동리로 불렀다.

우암리(牛岩里) : 마을 앞에 돌이 있는데 마치 소처럼 생겼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우암이라 지었다. 마을 이름이 상징하는 바와 같이 한우사육이 우수하다.

◆ 주리(舟里) : 약 500년 전 임씨(林氏)의 창건으로 동리형태가 배형국과 같다하여 주리(舟里)라고 칭하였다. 풍수설에 의하면 이 마을은 항구처럼 생겼기 때문에 마을 아래에 내려가 살면 사(死)하고 중턱에 올라와 살면 생(生)한다하여 대부분의 주택이 마을 산쪽에 많이 치우쳐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마을아래 주민은 가세가 넉넉하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남양리(南陽里) : 고려조에는 판교리(板橋里) 그 후『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삽존리(揷存里)로 개칭하였다. 서기 1955년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석계리, 부소치리를 병합하여 남양리라 하였다. 본래 양양군 남면의 지역으로 주위 산림에 섶이 무성하여 섶 좋은 마을이라 하던 이름이 변음 되어 삽존리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손양면에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