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면(西面)의 유래(由來)


군 소재지 서부에 위치한 면이다. 관내에 설악산국립공원 남설악이 있다. 면소재지가 있는 수상리를 비롯하여 범부리·수리·북평리·공수전리 등 20개 법정리가 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서면에는 공수전리(公須田里)·영덕리(盈德里)·서림리(西林里)·청대리(靑臺里)·오색리(五色里)·상평리(上平里)·장생리(長牲里)·수동리(水洞里)·웅전리(熊田里)의 9개 마을이 속하여 있다.
『해동지도』에는 박달령(朴達嶺)·서면(西面)·오색령(五色嶺)·정족산(鼎足山)·조침령(阻枕嶺) 등이 표기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북평리[北坪里, 아래곰밧]·수동[水洞, 물꼴]·상평리[웃드루]·서선리[西仙里, 괘목기]·가라피리(加羅皮里)·공수전리[공수왓치]·미천동(米川洞)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세는 산악이 전면적의 90% 이상을 점하고 있으며 수다곡심(水多谷深)하여 주민의 생활은 극히 빈곤(貧困)하여 과거 병자년 홍수를 당하여 인명손실과 전토유실(田土流失)이 상해[桑海 : 상전벽해의 준말]의 참화(慘禍)를 보았다.

그러나 지하자원만은 무진장(無盡藏)의 보고(寶庫)로서 자철(磁鐵)의 매장량이 많아서 우리나라 유일의 자철광산인 양양광업소가 성황을 이루었던 지역이다. 인구의 밀도는 희박(稀薄)하나 장수고령자가 많음을 볼 때 산수의 서기(瑞氣)가 아닌가하는 감(感)도 있다.

한 나무에 오색화(五色花)가 피어서 연유되었다는 오색리에는 약수가 변함이 없고, 오색령 일대의 사시절(四時節)의 가경(佳境)을 가히 소금강이라 칭하며, 99곡의 구룡령은 홍천과의 중요통로가 된다. 1945년 광복 후 38°선 이남에 위치한 다섯 개 마을[서림리, 갈천리, 황이리, 명지동, 조개리]은 강릉군 신서면에 속하였다가 1954년 11월 행정이양과 함께 본군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73년 7월 조개리는 홍천군 내면에 편입되었다.

◆ 수상리(水上里) : 서면소재지로 수년전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강줄기가 변경되어 마을이 세워졌으니 이곳을 ‘물웃꾸미’라고 부른다. 병자년에 집중호우로 물에 잠겼는데 이 모습이 물에 떠있는 모습과 같다하여 수상리라 명명되었다.

상평리(上坪里) : 마을 이름은 쑥두루인데 예전에 이 마을에 온통 쑥이 아주 많이 자랐다는데서 연유한다. 상평리는 들돌거리, 수상리, 상평리 3개의 마을로 나뉘어 있다가 통합되었고 예로부터 “웃드루”라고 불리는 평지가 있었다는 데서 명명되었다.

◆ 장승리(長承里) : 임천리와 수상리와의 경계에서 수상리 뒷산 능선으로 오색령으로 가는 큰길이 있는데 진등을 이어 마을이 되었다고 하여 장승리라 명명하였다. 우리나라 제일의 자철광 산지로 유명했다.『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장생리로 불렀다.

◆ 서선리(西仙里) : 고대풍수설에 의하면 계곡이 심오하고 연하(烟霞)가 담청(淡淸)하여 풍진(風塵)이 불도교중선(不倒僑中仙)으로서 서방에 위치하였다하여 서선리라고 한다. 또한 성황당 고개 밑에 있어서 신선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명명하였다고도 한다.

논화리(論化里) : 노내골[論化里]은 옛날 양양관가에 상소 차 주민들이 모여서 최종 논의하고 결의하던 곳으로 정하였다는 연유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또한 산과 논이 많다하여 ‘논옛골’, ‘노내골’이라고도 한다.

◆ 오색1리(五色1里) : 본래 명칭은 가라목(加羅木)이 많으므로 가라피리라고 하였으나 행정수복 후에 오색1리로 편입되었다. 옛날 주민들은 갈대와 가라목피로서 짚신, 삿갓, 갈자리 등을 만드는 수공업으로 생업을 삼았었다.

오색2리(五色2里) : 오색석사는 계곡의 오색암석에 연유된 명칭이라고도 하나 한편 한 나무에 5색 꽃이 피었다하여 명명한 지명으로 1937년 양양군수로 부임한 전재우군수는 오색리에서 3색 꽃이 피는 나무를 파서 이식하였으나 꽃이 피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8·15광복 후까지 3색 꽃이 피던 고목이 관터 입구 근방 도로변에 있다가 노목으로 썩어 없어졌다. 본래 현 오색2리 지역만을 오색리로 불리었다.

범부리(凡阜里) : 천안상(川岸上)에 형성된 마을임을 표징(表徵)한 것이다. 뒤에 언덕이 있고 앞에 큰 내가 흐르므로 범부리라 명명하였다. 예전에는 가마골이라 해서 도자기 굽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가마골은 약 20년 전에 있었으나 지금은 다헐어버리고 없다.

북평리(北坪里) : 북평리의 원래 이름은 ‘아랫곰밭’이라 한다. 이 곰밭이란 이름의 유래는 마을 주변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다른 곳과는 다르게 나무가 울창하다. 그것도 고목나무가 많은데 고목나무 밭을 줄여서 말한 것이 북평리의 본래이름이라 한다. 북평리란 이름은 일제강점기 때 마을을 개편하면서 붙였다. 또 다른 유래는 음지에 처한 마을임을 표징 한 것이며 200여 년 전에 괴목(槐木)이 많아 괴목정(槐木亭)이라 하였으며 그 후에는 웅전[(熊田) : 곰밭]이라 하였다가 북평리로 개칭하였다. 속칭 북들, 북드루, 아랫드루라고도 한다.

◆ 용천리(龍泉里) : 마을 앞 정수(井水)에서 용이 등천(登天)하였다는 전설에 의하여 용천(龍泉)이라고 한다.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뒷골, 버덩말, 웃곰밭을 병합하여 마을 앞에 있는 용소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웅전리로 불렀다.

수리(水里) : 몰골 또는 물골이라고 한다. 오대산으로부터 내려오는 물들이 이 마을을 지나기 때문에 수리라고 불린다. 수리마을은 4개의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것이 바로 가마솥의 형태로 되어 있다. 큰 가마솥을 보면 젖이라는 것이 4개 있다. 그 중에 4개의 봉우리 중에서 뒷산에 있는 봉우리가 파손되면서 가마의 물이 흐르는 형태가 되어서 수리마을의 가구 수는 100을 넘지 못한다고 전한다. 옛날 어르신께서 봉우리가 수리를 보호한다고 해서 봉우리마다 묘를 만들어 놓고 그 자리에는 묘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수리는 처음에는 물골이라고 불리고 그 다음에는 수동이라고 불리다가 지금은 수리라고 한다. 물이 많아서 수리라고도 한다.『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수동리로 불렀다.

내현리(內峴里) : 동리 중간에 산이 있어서 내현(內峴)이라 하였는데, 속칭 “안고개”라고도 칭하고 있으며 마을 중간에 밥상과 같은 암석(岩石)이 있어 소반암동이라는 소동(小洞)이 있다. 내현리 중심에서 약 5리 떨어진 곳에 도랑이 진 굴이 있는데, 굴은 아주 깊고 넓으며 물은 한 여름에도 얼음같이 차다. 옛날에 이 굴에서 용이 나서 승천했다고 전해온다. 용이 통할 만큼 큰 굴이라 하여 용통굴이라 했는데 지금은 용통굴이 바뀌어 ‘요통골’이라 부른다.

송어리(松魚里) : 마을 앞 계천에 송어, 연어, 자라가 많았으므로 명칭하였다. 옛날에는 수십 호(戶)가 되었으나 점차 줄어서 행정구역 개편 시 1954년 송천리에 편입되었다. 일명 “송어골”이라고도 한다.

북암리(北庵里) : 황이리 선림원에서 북방에 위치한 암자가 있었다하여 북암리라고 하는데 속칭 “북애미”라고도 하며 1960년대까지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몇 집만 살고 있다. 마씨 세거지였다.

용소리(龍沼里) : 윗 용소골 하천에 큰 소가 있는데 이 소에서 용이 등천하였다하여 용소리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독립마을이었던 것이 점차로 줄면서 공수전리로 편입되었다. 속칭 “용수골”이라고 부른다.

영덕리(盈德里) : 영덕리의 지명유래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번째로 영덕리 부근에는 양아치라 불리는 고개가 있는데 큰 양아치와 작은 양아치의 고개를 가로질러다녔다는 뜻에서 영덕리라고 지었다고 한다. 한편 물이 가득하면, 마을에 복이 들어온다고 믿어 영덕리라고 지었다고 한다. 옛날부터 마을 주민들은 동리가 우형국(牛形局)이라 하여 윤산(潤産)의 덕이 충만하리라는 연유에서 마을 이름을 붙인 것이다.

송천리(松川里) : 하천 가운데 송림이 울창하여 강물이 양쪽으로 흘러 내려 갔다하여 송천이라 하였다. 또한 뒷내의 지류인 속내가 있으므로 속내라 칭하다가 변하여 송애, 소래 또는 송천이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송천리라 하였으며 1954년 송어리(松魚里)를 병합하였다. 조선시대 이해조 부사가 명명한 의춘암(宜春巖)이 경치를 자랑하고 있다.

공수전리(公須田里) : 마을의 명칭은 조선조 때 관청의 경비에 쓰기 위하여 관가에서 정해놓고 경작하던 공수전(公須田)이 있었던 연유로 유래되었다. 또한 200여 년 전 어느 지관이 이르기를 마을의 형국이 귀인공자처럼 생겼다고 하여 명명하였다 전한다.

서림리(西林里) : 서면 서쪽에 있는 마을로 삼림이 울창하여 서림리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한편 서림사(西林寺)가 있었던 연유로 ‘서림골’ 또는 서림이라 하다가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림리라 하였다고 한다. 옛날에는 목재를 주재료로 삼던 때는 제재소 등의 시설이 들어서고 목상들도 많이 모여 들어 한 때 시장(市場)도 번성하던 곳이다. 또한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에 해가 드리워진 모습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해담마을’이란 이름을 지어 부르게 되었는데 해질녘 마을에서 바라보는 산과 하늘 풍경은 아름답기로 이를 데 없다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산과 산 사이에 해를 담고 있는 마을’ 또는 ‘해를 담은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말을 줄여서 ‘해담마을’이라고 한다.

◆ 황이리(黃耳里) : 황이리는 일명 황룡마을이라 한다. 신라시대 수도승들의 요람이었던 선림원지와 미천골을 품에 안은 전형적 산촌마을인 황이리는 마을 형상이 귓불이 늘어진 누런 황룡이 머무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한가운데로 남대천 지류인 1급 수질의 후천이 흐르고 있다. 또한 미천골은 하늘과 산이 맞닿는 곳에서 쏟아지는 폭포수, 미천골자연휴양림, 불바라기약수터, 문닫이암산, 얼음굴, 맑은 계곡 등 풍부한 관광자원인 자연환경에 곁들인 황이리의 특산물은 친환경우렁이 농법으로 재배하는 친환경쌀과 인진쑥, 장뇌, 산채, 송이, 토종꿀, 표고버섯, 목공예품 그리고 산천어 등 희귀어가 맑은 후천에서 살고 있으며, 특히 여름이면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드는 원시림이 무성한 천혜의 아름다운 마을이다.

◆ 갈천리(葛川里) : 처음에 칠레에서 치레로 불리다 갈천이 되었다. 갈천이라는 마을 이름은 칡뿌리에서 나왔다. 화전민이 주로 자리 잡고 살았던 산골마을인 갈천에서는 춘궁기가 되면 칡뿌리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이 항상 칡가루 일색이기 때문에 갈천 또는 칙내, 치래라고 불렀다. 갈천리에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바로 갈천약수다. 철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위장병과 피부병에도 좋다고 한다. 산삼이 많이 났으며 토봉도 많이 생산되던 곳이다. 옛날에는 왕승골에 사람이 많이 살았었다. 자철광산 유지(遺址)가 있으며 구룡령 옛길 복원으로 명성이 전국에 퍼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