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襄陽)읍의 유래(由來)


양양군의 동해안 중부에 위치한 읍이다. 양양읍은 군 소재지로 조선시대 태종 6년(1406년) 부내면(府內面)이라고 하였다가, 고종 32년(1895년) 군내면(郡內面)으로 개칭하고 1914년에 군내면을 중심으로 부남면(部南面)과 위산면(位山面) 일부를 편입하였으며 이후 1919년에 양양면이 되었다.

사통오달(四通五達)로 교통은 극히 편리하나 남대천의 발원지에서 100여리를 흘러오는 유수는 항상 시가의 홍수난을 염려하게 되므로 1932년에 남대천 제방을 쌓았는데 1936년 병자년 여름의 대홍수로 파괴되고 인명과 재산의 손실이 막심하였다. 1938년에 재차 견고한 축방을 하여 수해의 우려는 없게 되었다.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국토가 분단됨으로써 38°선 이북에 위치하여 공산치하에 들어갔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후 수복되었다. 1954년 10월 21일 법률 제350호인 수복지구 임시행정조치법 시행에 의거 양양면으로 된 후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거 손양면 상왕도리 일부가 양양면에 각각 편입되었고,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709호에 의거 양양읍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 1월 1일 양양군 조례 제1152호로 손양면 가평리, 송현리 일부가 양양읍 송암리에 편입되었다. 1992년 11월 23일 양양군 조례 제1399호에 의거 양양읍 구교리가 구교1리와 구교2리로 분할되었다. 법정리는 19개, 행정리는 24개, 127개 반을 형성하고 있다.

◆ 군행리(軍餉里) : 옛 명칭은 문안[門內] 조선조 당시 양양부내의 성을 방위하기 위한 군인의 급식지였음을 표징(表徵)하는 마을명이다. 부성주위에는 동서남북의 4문이 있었는데 남문과 서문안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문안이라고 불리었다. 그리고 고려 고종 8년(1221년) 양주방어사 때 군량을 쌓았으므로 군행리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문안을 병합하여 군행리라 하였다.

성내리(城內里) : 구명은 성안말, 산말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성의 형태는 없으나 양양읍 당시 성내라 명칭하였는데 그 후 오래됨에 따라 발음이 “산말”로 변칭되었다. 고려 때 양주성 축성 당시 이 마을을 중심으로 하여 4대문을 내고 축성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 구교리(舊校里) : 향교골, 미륵골(彌勒洞)이다. 향교골 유래는 이곳에 향교가 있던 곳이므로 향교골이라고 부르고, “미륵골”은 별 유래는 없으나 이골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옛날 사람들이 이 바위를 미륵바위라고 불렀으므로 이곳을 미륵골이라고 불렀다.『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구교리를 구향교동리라 불렀다.

◆ 연창리(連昌里) : 상운역이 이곳으로 이전함에 따라 큰 창고를 연이어 건립한 연유로 이름하였다. 서쪽능선을 구명 “대미소 고댕이”라고 하는데 유래는 산등에 대나무가 울창하게 있었고 그 산 밑에는 소가 있었으므로 “대미소”라는 이름으로 불렀다.『여지도서』양양부편. 영조 35년(1759년)에는 연창역리로 불렀다.

송암리(松岩里) : 마을 북쪽 작은 산봉우리 위에 솔바우[松岩]가 있어 이름하였다. 구명 “건너말” 유래는 동리의 집단가호에서 분리되어 범재산이라는 산 아래에 민가가 있었는데 본동으로서는 건너편이 된다. 그래서 통속명이 된 것이며 범재고개는 산 형국이 호형(虎形)으로 되어 청곡리(靑谷里)로 통하는 고개가 되었고 따라서 범재고개라고 부른다.

◆ 내곡리(奈谷里) : 고려초에 형성된 상고(上古)부락이다. 내목(奈木 : 고야나무)이 많았으므로 멋질[내곡리]이라고도 부른다. 화곡산록(和谷山麓)에 민가가 있어 본 동리의 건너편에 있다하여 건너 마을이라고 부르고 월곡동(月谷洞) 넘어서 있는 마을을 달래 넘어 마을이라고도 한다. 조선조 숙종 때 산정(山頂)에 사직단이 있었으므로 사직단이라고 하고 금수봉은 송죽이 울창하여 그 경치가 좋고 시인들의 음영처로 제공되었으며 장고봉은 옛날부터 정월원소(正月元宵)에 완월(玩月)하는 고봉(高峯)이다. 문성현(文成峴)은 향교 이전 후 문사(文士)와 재사(才士)들의 왕래가 빈번하였으므로 일명 향교고개라고도 하고 마석현(磨石峴)은 맷돌을 만드는 돌을 많이 파냈다고 하여 명명한 것이며 모노동유래(毛老洞由來)는 옛날 산과 골에 삼림이 무성하여 토지가 비옥하고 그 농작물에 흉풍이 없다하여 모로동이라고 하였다.

◆ 청곡리(靑谷里) : 옛날 구한국시대에 고을 수령들이 본 동리를 통과할 때는 이곳에서 하마하여 설악산 신령을 향하여 한번 배례를 하였으므로 배일(拜一)이라고 하였는데 그 후 1913년에 산이 좋은 골이라 하여 청곡리라 칭하였으며 동리 인구가 증가되고 지역이 광대함으로 해서 “새터마을”까지를 1리로 하고 동쪽인 “비석거리”를 2리로 구분하게 되었다.

포월리(浦月里) : 신라, 고려시대에 마을 앞에 호수가 있었는데 달이 뜨면 유달리 아름다운 빛이 났으므로 이 마을을 포월리라고 칭하였다. 본래 양양군 위산면(位山面)지역으로 양짓말 앞에 호수가 있었는데 달밤에 보는 경치가 아름다워서 명명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촌, 하촌을 병합하여 포월리라하고 군내면에 편입, 그 후 양양읍에 다시 편입되었다.『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용월리로 불렀다.

◆ 조산리(造山里) : 고려말에는 마을명을 시상촌[柴桑村 : 조인벽이 양양 조산리에 은거하여 그 마을 이름을 중국 동진(東晋)의 은일시인(隱逸詩人) 도연명(陶淵明)이 살던 중국 산서성 시상산을 모방하여 시상촌이라 하였다고 함]이라고도 하였는데 현재는 조산(造山)이다. 옛날 이 마을 산맥이 바닷가까지 이어져 있지 않고 중간이 끊어진 것을 보신 고승이 “그 산맥이 끊어져 있어 훌륭한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앞날의 발전을 위하여 동리 주위에 산을 만들어야한다며 1657년 선조들이 인력으로 만든 연고로 조산리라 칭하였다. 산을 인위적으로 만든 후 이 마을에서 훌륭하고 유능한 선비, 학자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지금도 조산초등학교 옆에는 산봉우리가 있는데 그 때 동네 사람들이 만든 산이다. 또한 이 마을 솔밭 속에는 고려시대부터 나라의 예법(禮法)에 따라 중사(中祀)로 제례를 올리는 신성한 동해신묘(東海神廟)가 있다. 조선 성종 21년(1490년)에 해군부대였던 대포영이 강릉 안인포에서 이곳 조산리로 옮겨왔으며, 수군사령관인 대포만호의 작전지휘 하에 동해안을 방어하던 곳이다. 또한『한국지명총람』에도 조산리는 성(城)안에 있는 마을이란 의미의 ‘성안말’ 북쪽문 뒤편 마을이란 의미의 ‘북문뒤’등의 지명이 기록되어 있고,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도평에 대한 유래는 1667년에 산이 붕괴되어 섬이 되었던 것이 1867년에 대홍수로 인하여 매몰되어 현재는 전답으로 화하였으므로 과거의 섬을 추상하여 섬들[島坪]이라고도 한다.

◆ 사천리(仕川里) : 옛날에는 마을 뒤 서북쪽 산등에 신라시대의 지명인 해현(蟹峴)에 고개가 있다. 위천(渭川)이라 칭하였는데 그 후 1907년부터 사천리로 개칭하였다. 옛날 이곳에 성황당이 있었는데 원이 말을 타고 통과하다가 말굽이 떨어지지 않으므로 원이 하마하여 원을 업어 넘기고 간 곳이라고 하여 원골이라고 한다. 이 동리를 사천이라고 부르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이 골에 정주하러오는 사람은 대부분이 벼슬을 하려는 사람이 모여 살기에 “벼슬 사(仕)” “내 천(川)”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전설은 이 골짝 상류의 계곡에서 흘러오는 유수가 많은 모래와 같이 흘러와서 쌓여 “모래 사(沙)” “내 천(川)” 일명 “사천”이라고도 하였다.『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토천리로 불렀다.

감곡리(甘谷里) : 조선조 이래로 위산면(位山面)의 송리(松里) 또는 감동(甘洞)이라고도 칭하였다. 1466년 세조대왕이 낙산사에 행행시(行幸時) 동천(洞泉)을 길어다 마시고 물맛이 달다 하여 감천(甘泉)이라고 하였다가 1894년 이후 감곡리로 개칭하였다. 또 혹자는 감곡리가 굽이굽이 골이 많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이 마을에는 12골이 있어 열 두 감동골이라고도 한다.『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감동리로 불렀다.

◆ 남문리(南門里) : 양주성 남문 밖을 지칭한 지명으로 양양시내의 가구수가 점증됨에 따라 서쪽부터 동쪽으로 1,2,3,4리로 구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래 양양군 군내면(郡內面) 지역으로서 양양읍성의 남문이 있을 때는 ‘남문거리’라 하였는데1916년 행정구역변경에 따라 남문리라 하였다.

화일리(禾日里) : 산곡협촌이나 관개가 편리하고 삼재[삼재(三災) : 화재·수재·풍재]를 모르는 곳으로서 토질은 박한 편이나 사질양토로서 결실만은 실패가 없어서연년이 풍년이 들어 수일 또는 쉬일이라고 하였다가 그 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화일이라 하였고 옛날 이곳에 물방아가 있었다하여 ‘수침동’ 또는 ‘물방아골’이라고도 하였다.『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목일리로 불렀다.

◆ 거마리(車馬里) :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소하천을 옛날에는 금계천(錦溪川)이라 하였는데 그 이름을 따서 금계리라 하였다. 1857년에 진사 황석만(進士黃錫萬)이 거마리로 개칭하였는데 그 뜻은 다음과 같다. 동구(洞口)에 능용거[(能容車) : 휘장을 드리워서 밖에서 보이지 않게 한 부인이 타는 작은 수레가 능히 다닐 수 있다.]하고 동리[(洞裡) : 마을 가운데]에 능치마[(能馳馬) : 능히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다.]라 하여 동구는 병목처럼 협착하나 동내[(洞內) : 동네 안]는 광활하다는 것이다.『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거말리로 불렀다.

◆ 임천리(林泉里) : 조선중엽에 향교가 구교리로부터 이전되어 왔으므로 향교 직사가 거주한 관계로 마을이 이룩되어 향교골이라고 한다. 동리 뒷산명은 석성산(石城山)이라고 하며 이 산에 석성당이라고 하는 제당이 있는데 매년 정월에 본동의 연중 행운을 기원하는 축원제를 지내고 있다. 석성산(石城山) 동록하(東麓下)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있었는데 향교복구와 동시에 향교전방입구에 이전하였다. ‘하마비’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이다. 김문정공상헌(金文正公尙憲)이 양양부사(襄陽府使) 권진을 보낼 때에 다시 글을 지어 주었다. 습가지관기생, 강한풍류 지허사(習家池觀己生, 江漢風流祗虛事)/현향잔비각기춘 문하견성방인(峴香殘碑閣畿春門下見姓龐人)이 마을은 무성한 숲에 덮여 있고 항상 맑은 물이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임천이라 한 것은 조선조 숙종 때 회양부사조종저(趙宗著)가 임천으로 고쳐 시(詩)를 읊은데서 연유되었다한다.『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향교가 있는 곳을 문성왕리라 불렀다.

◆ 기정리(基丁里) : 본래 위산면(位山面)의 관할이었으나 191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기리(基里)와 정손리(丁巽里)를 통합하여 마을이름 첫 자를 따서 기정리라고 칭하였다. 고려 당시 거리에 암자가 있었던 관계로 좋은 골이라 하여 텃골이라고 불러지고 있으며 정손(丁巽)은 동리(洞里) 뒷산이 정자형(丁字形)으로 되고 손방에 있다하여 정손(丁巽)이라 칭한다. 기리는 옛날에 무천제를 올릴 때 이곳에 처음 터를 정한 곳이라 전해져 ‘텃골’이라 불렀고, 진사들이 물을 먹고 병이 나았다고 해서 ‘진수골’이라고도 한다. 양지마을, 음지마을, 잿말 등으로 나뉘고 정손리 입구에는 소나무가 많아 솔모정 거리라고 부른다.『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진수동리로 불렀다.

서문리(西門里) : 구명(舊名)은 마을이 대부분 들판이었으므로 “버덩말” 버덕말이라고 하였다. 그 후 양양부성 서문(襄陽府城西門)밖에 있다하여 서문리로 개칭하였다. 옛날 동리 중심으로 묵개라는 계천(溪川)이 있었으며 내곡리 사직단 산록 양지쪽이라 하여 양지마을이라고 한다. 양지말에 가면 샘터가 있는데 샘터가 꽃심지라 해서 옛날 원님이 떠다 먹던 물이라 한다. 그곳에 가면 비석에 글을 새겨놨는데 지금도 속초에서 그 물을 많이 떠다 먹는다. 가물거나 비가와도 물이 고정적으로 많이 나온다.

◆ 월리(月里) : 조선 때 양양부의 ‘건넛마을’이라 해서 건널 월(越)자로 지었다가 일제강점기 때 마을산이 달 형국이라 하여 월리로 바뀌었다. 풍수지리상 마을의 뒷산이 반월형(半月形)으로 생겼다고 하여 1909년에 달 월(月)자로 개칭했다. 박정수의『살아있는 땅, 1965』에 의하면 송강 정철 선생을 빼놓을 수가 없다. 송강선생이 강원도관찰사로 있을 때인데 남대천에 바람을 쐬러 나가 무산 12봉을 보니 양양에 큰 인물이 많이 나올 것 같아 무산 12봉에 쇠말뚝을 박고 그 밑에 소금 독을 묻었다고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