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군 지명유래 - 양양(襄陽)의 명칭(名稱)


양양의 지명 유래를 사기(史記)를 통해 살펴보면 고조선 때인 기원전 127년에 성읍국가형태 때는 예국(濊國)의 땅이었고, 기원전 128년 한무제(漢武帝) 원삭(元朔) 원년은 창해군(滄海郡)에 속했었다.
또한 한무제(漢武帝) 원봉(元封) 2년에 임둔군은 낙랑군(樂浪郡)에 편입되었는데 낙랑군은 영동7현(嶺東七縣)에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설치했다. 한사군(漢四郡)때 임둔군(臨屯郡)은 낙랑군 탄열현(樂浪郡呑列縣)에 속했다고『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와『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전하고 있다.
고구려 때에는 익현현(翼峴縣) 또는 이문현(伊文縣)이었는데, 통일신라시대에는 익령현(翼嶺縣)으로 고쳐 부르다가, 고려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익령현(翼嶺縣)이라 하였다. 현종(顯宗) 9년(1018년)에 현령(縣令)을 설치하고 동산현(洞山縣)이 본 현에 소속되었다.
고종 8년(1221년) 거란(契丹)의 침략군을 잘 방어하였으므로 양주(襄州)라하고 방어사(防禦使)를 파견하였으나, 1253년에 낮추어 현령으로 되었다가 1257년에는 몽고 침략군에 항복했다는 이유로 덕녕(德寧)으로 강등(降等) 감무(監務)를 파견하였다.
『고려사』기록을 보면 원종(元宗) 원년(元年)(1260년)에 다시 승격하여 양주(襄州)로 하고 지양주사(知襄州事)를 두고 일명 양산(襄山)이라고도 하였으며 일찍이 동해신묘가 있어 국토수호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중사(中祀)의 제의를 베풀었다고 한다.
『태조실록』에는 조선에 들어와서도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따라 양주(襄州)로 하였다. 또한 조선을 건국한 태조[李成桂]는 강원도 양양부(襄陽府)에 관음굴이 있다고 하여 양양이라 불렀다.
또한 태조 6년(1397년)에는 임금의 외친향(外親鄕)이라 하여 양주부(襄州府)로 승격시키고 태종 13년(1413년)에 양주도호부(襄州都護府)로 이름을 고쳤다가 태종 16년(1416년) 경기도 양주(楊州)와 강원도 양주(襄州)의 부름의 소리가 비슷하다고 양양부(襄陽府)로 고쳐 지금까지 양양(襄陽)이라 부른다.

※ 양양군은 지리적 특성상 마을마다 역사적 의미를 간직한 골, 모퉁이가 많으며 각기 이름이 있다. 그 수는 무려 400이 넘는다. 이에 대한 기록은 1995년 양양문화원 발행 ‘襄陽의 땅이름’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