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시문

설악왕환일기(雪嶽往還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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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9회 작성일 2024-02-13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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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악왕환일기(雪嶽往還日記)

 

쌍계(雙溪) 이복원(李福源)



계유년 4월 13일. 

 재종제2)인 현지 이조원과 함께 양구현 관아를 출발하여 두모령을 넘어 마로역의 앞강을 건너서 역소에서 점심을 먹었다. 출발할 때쯤 인제에서 지급한 물품이 비로소 도착했다. 

 인제현에서 10리 못 미치는 곳에서 갈로강을 건너 갈로현을 넘었다. 고개가 끝나자 인제현이 비로소 보였다. 가운데 들판이 열리고, 큰 내가 현 앞을 휘감고 흘러나오니, 바로 설악과 한계가 합류하여 내려오는 것이라고 한다.

 곧바로 동헌에 이르러 인제현감 김성중과 함께 잠시 이야기를 나눌 때, 홍천의 전 현감이었던 송익흠이 설악산을 탐방하기 위해 또 도착했다. 함께 유람하며 선후로 볼만한 곳을 묻는데, 현감이 하나하나 자세히 알려주었다. 이에 가마를 출발 하라는 전령을 내렸다. 석식 후에 장관청으로 나아가 묵었다. 이날은 종일 큰 바람이 불어서 배 위에서나 말 위에서 모두 편안하지 않았다. 


14일 해가 뜨자 동헌에 들었다. 

 전 홍천현감 송익흠이 이미 와서 앉아 있었다. 먼저 한계로 향하다가 설악은 거쳐 영동을 돌아 나오려 한다고 말하였다. 나는 이미 영동에 마음이 없었고, 또 한계의 길은 멀다고 들어서 곧바로 현구사로 갈 계획을 정하였다.

 전 홍천현감 송익흠은 먼저 일어났고, 나는 인제현감과 함께 살인사건을 심문하였다. 추국한 문안 작성이 번잡하였고, 문서작성 하는 것이 너무 더디었다. 그러므로 조사보고서의 초안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출발하였다. 해당 아전으로 하여금 바르게 쓰게 하고 산행을 나갔다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수결을 받으라 하였다.

 현의 북쪽 송림으로 길을 나섰다. 소나무 숲이 끝나는 곳에 가부좌를 한 작은 돌미륵이 있었다. 그 아래로 조금 비스듬히 가니 위에 정자가 있는데, 바로 합강정이라 부른다. 해가 질까 두려워 지나치고 오르지 않았다.

 가음진을 건너고 참령을 넘어 고개 아래의 촌점에서 말에게 여물을 먹였다. 견여로 시내를 따리 5리 쯤 가니, 내에 이따금 뛰어나게 아름다웠다. 말을 타고 20여리를 가니, 비로소 현구사를 멀리 바라보았다. 절의 스님 4명이 가마를 준비하여 냇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절에 도착하니 심히 볼만한 것은 없었다. 절은 매우 빈천하고, 스님들도 또 적었는데, 새로 창건한 법당은 기와가 없어 나무로 덮었다.

 이 날 또 종일 바람이 불고 흙비가 내려 지극히 근심하였다. 한 늙은 스님이 앞에서 말하기를 이산은 지금까지 오래도록 바람이 없던 적은 없었다. 또한 연속해서 5·6일 동안 바람이 분 적도 없었습니다. 근래 바람이 내일의 행운이 아니라고 반드시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석식 후에 절의 뜰을 산보하며 서남 일대를 바라보니 산불이 끊이지 않은 것이 만개의 횃불을 늘어놓은 것 같아 역시 볼만하였다. 현구사에서 묵는데, 양양부사 이성억이 입산한지 벌써 3일이 되었다고 들었다. 내일 신흥사에서 관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였다.


15일, 아침을 일찍 먹고 가마에 올랐다. 

 가벼운 식량은 가져가고, 인제의 의복과 재봉을 돌려보냈다. 여행 도중에 가마를 따르는 자 중에 긴요하지 않은 사람을 줄였다. 수배에는 김취광, 공방에 박지청, 통인엔 임취빈, 흡창엔 취성, 후배엔 말남과 노미, 도척은 막동이었다.

 두타연, 학암, 광석동을 경유하니 수석이 모두 불만하였다. 이에 스님들은 입산 후에 곳곳이 이와 같으니 굳이 가마를 멈출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갈현을 넘으니 평지가 조금 보이는데 대여섯 인가가 있었다. 냇가의 나무 그늘에서 잠깐 쉬는데,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보러왔다.

 그의 나이를 물으니 91세였고, 아들이 있는데 또한 70세에 가깝다고 하였다. 어떻게 보양해서 이처럼 장수를 누리는지 물었더니 젊어서부터 부지런히 경작하고 조석으로 채식했을 뿐 다른 것은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날씨가 좋지 않아 들어가 쉬라고 권했더니, 웃으며 말하기를 젊어서부터 바람을 피할 줄 몰랐어도 일찍이 병든 적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나이가 이미 이렇게 이르렀는데 바람을 쐬다 병들어 죽는다 한들 또한 애석할 것도 없으니, 피할 어떤 이유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조연을 지나는데, 못은 말구유 모영과 같아 매우 깊고 넓었다. 심은사 옛터에 도착하니, 주춧돌 및 복숭아와 오얏 등 잡풀의 꽃들이 있었다. 스님이 심은사가 황폐해지자 현구사가 비로소 세워졌다고 말했다. 심은과 현구의 의미를 물어보니 아는 자가 없었다. 처음에는 폐문암을 보고 오세암에서 묵었다. 다음날 봉정암에 올라 봉정암에서 묵고, 또 다음날에는 십이폭포와 수렴동을 따라 내려오면서 노정을 분배하려고 다시 생각하였다.

  산속은 조만간 풍우를 알지 못하고 봉정암에 오르는 것에 실패하면 비록 여러 승경을 두루 찾아보면 설악을 보지 못할 것이다. 오세암 길을 버리고 곧바로 수렴동으로 갔다. 골짜기 속은 원래 분명한 길이 없었다. 계곡 좌우는 모두 암석인데, 큰 것은 넓고 편편하며 우뚝 솟았으며, 작은 것은 종횡으로 날카로웠다. 왕왕 발을 디딜 곳도 없었다. 골짜기에 들어오니 가마에 오를 일이 극히 적었다. 편안한 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 깊은 곳을 뛰어넘고 높은 곳을 기며, 조금씩 위험한 곳을 지나는데 번번이 땀을 닦으며 호흡을 안정시켰다. 연속 생칡과 미숫가루를 먹고 계곡물을 마시며 목을 부드럽게 하였다.

 오후에 수렴동에 도착했다. 스님이 말하기를 현구사에서 이곳까지 40리이고, 오세암 앞에서 갈이 나뉘는 곳부터 이곳까지 역시 20리 가량 된다. 그 멀기가 반드시 이 곳에 이르지는 못해도 험난하고 힘든 것은 아마도 평지의 길로 100리를 가는 것보다 심할 것이라고 한다.


 입산 후 수석과 산봉우리가 기이하고 빼어난 곳은 이루다 기록할 수가 없었다. 소위 두타연, 학암, 광석동, 조연은 모두 우연히 이름이 있어 기록하였다. 그 외 이것들과 같은 곳은 매우 많아 막연하게 이름이 없어 기록하려고 하여도 할 수가 없었다.

  길이 갈라지는 곳부터 산봉우리의 기세와 돌 빛이 조금씩 다른데 수렴동에 도착하니 사방에서 절벽이 하늘로 뻗고, 물 바닥에서부터 산 정상에 이르기까지 마치 한 개의 큰 돌로 깎아 만든 듯하였다. 허리 위로는 절대 바늘로 꿰맬 틈이 보이지 않았다. 나무가 우거진 숲은 모두 허리 아래에 있는데, 성성하여 심히 무성하게 뒤덮인 정도는 아니었다. 빙 둘러 늘어선 것은 병풍 같고, 뾰족한 것은 칼날 같았다. 고고하고 웅장하며 기궤하고 교묘한 것이 모양은 한결같지 않았다.

 또 하나의 산봉우리가 동구 밖이 비스듬하게 은근히 비취는데 바라보니 금강산의 중향성을 방불케 하였다. 산봉우리에 있는 돌 빛은 쑥색처럼 암백색과 담청색이고, 물에 있는 것은 백색이었다. 물 또한 고여 돌고 깊은데, 위아래로 열층이 포개어 대체로 이와 같다. 상하층의 사이는 모두 큰 흰 돌이 있는데, 가로로 잘려 넓은 것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이어졌다. 물은 돌 위를 따라 흩어 퍼지며 아래로 흐르는데, 끊어져 흐르며 우수수 쏟아지는 것이 항상 비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냇가에 너럭바위가 있는데 수십 명이 앉을 수 있었다. 너럭바위 위로 또 높고 큰 바위 여러 덩어리가 있는데, 구부정하게 굽어 있어 폭우와 뜨거운 햇볕을 피할 수 있었다. 자리를 깔고 그 아래에 앉아 솥을 설치하여 밥을 지었다. 현지가 지팡이 끝에 붓을 묶어 암벽 위에 이름을 썼다. 밥을 먹고 일어서려는데, 현구사 스님 4명이 양양부사를 전송하고 신흥사를 넘어 밥을 싸서 쫓아 왔다. 서둘러 밥을 먹고 함께 출발하였다.

 12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니, 폭포수는 매달리지도 눕지도 않으면서 어지러이 휘몰아쳐 소용돌이치며 흐르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다. 봉우리 암벽은 수렴동 같이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수록 환상적인 모습으로 갈수록 더욱 기이하였다. 현지가 부르짖는 소리가 귀 뒤로 끊이지 않았고, 통인과 흡창의 무리가 또한 박수치며 혀를 내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유독 스님들만이 조금도 동하지 않고 안색의 변화가 없었다.

 쌍폭에 도착하였다. 이곳이 12폭포가 끝나는 곳이다. 암벽의 위세가 가장 차이 있게 뛰어났다. 오랜 가뭄으로 물이 적었다. 물이 많아 기세가 없어도 답답함을 뿜어내는 기세가 없어도 역시 절로 간드러진 모습이 기쁘게만 한다. 수렴동에서 쌍폭까지는 아주 험준하였다. 길이 끊어진 곳은 번번이 나무를 쓰러뜨려 이었는데, 몸을 구부려 공간을 보니 아득히 바닥이 보이지 않아, 벌벌 떨며 지나갈 수가 없었다. 앞의 팔을 잡아끌고, 뒷의 허리를 받치며 시야 때문에 몸을 돌보지 못했다. 특별하게 한바탕 웃음거리로 느껴졌다. 스님이 말하기를 물이 많을 때에는 돌이 미끄럽고 길도 없어져 거주하는 스님들도 또한 표류하고 물에 빠지는 화를 당하는데, 근래에는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한다.

 사현에 도착하여 오랫동안 서서 다리를 쉬었다. 길을 돌아보니 아득하여 분별할 수 가 없었다. 다만 아래에 첩첩으로 보이는데, 모두가 오면서 곁에서 우러러 바라보니 오를 수 없었다. 오후에 계속 걷다 보니 기력은 다하고 해 그림자는 점점 줄어든다. 사방을 둘러봐도 의탁할 곳이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나갔다. 뾰족뾰족한 봉우리가 있는 것에 도착하니 매우 웅대하고 특별히 뛰어났지만 여유를 즐기면서 똑똑히 볼 수 없었다. 바로 사자봉 아래 도착하여 점점 길이 좁아졌다. 곧 가마를 타고 잘 갈 수 있었다. 백보를 가니 길이 꼬불꼬불 하였다. 가마를 맨 스님들이 숨을 헐떡거리며 쉬고자 하였다.  

 이 봉우리에 도착하니 해는 아직 한자 쯤 남아 있었다. 대체로 아래는 어둑해진 곳이 많았다. 처음 도착한 사람이 이미 저녁이 되었다고 말했다. 정상은 바위를 이고 있는데, 모양이 바둑알을 포개놓은 것같다. 매우 위험하여 떨어지려고 한다. 봉정이란 이름은 여기에서 얻어진 것이다. 양양태수가 이곳에 와서 돌에 깔릴까 두려워 재촉해 내려갔다는 말을 듣고는 여러 스님들이 함께 웃었다.

 암자는 정상 아래에 있는데, 지어놓은 것이 매우 견고하고 절묘하였다. 황폐해진지 오래되었으나 창과 벽은 오히려 깨끗하여 말쑥한 것이 좋아 보였다. 한 스님이 있는데 여윈 모습으로 헤어진 옷을 입고는 가마 앞에서 예를 차리고 맞이하였다. 이처럼 외딴 곳에 어찌하여 홀로 사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다 올라와 봤는데 좋아하게 돼서 떠날 수 없었습니다. 고절은 본분이니, 홀로 사는 것 또한 어찌 방해이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작은 집에서 쉬며 없어진 암자의 동쪽 바위에서 솟는 샘물로 갈증을 해결하였다. 물맛이 매우 맑고 차서 상쾌한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스님이 말하기를 수렴동 12폭포의 근원으로 모두 이곳에서 발원한다고 하였다. 산의 맨 꼭대기에서 샘물이 나와  이처럼 풍부하니 진실로 기이하다.

 배고픔이 심해 재촉하여 밥을 먹고, 탑대에 올라 굽어보았다. 만 겹의 천 길 뛰어오르고 나는 듯이 내달리면서 각자 탑대 아래에 모습을 드러내니, 마치 창과 도끼와 깃발이 대장의 단상을 둘러싸고 호위하는 듯하였다. 비록 길은 짧으며 듬성하고 조밀하여 들쑥날쑥하여 가지런하지는 않지만 위치와 기세는 매우 삼엄하고 엄숙하였다.

 남쪽 한 면은 모두가 한낮 무렵에 지나왔던 여러 봉우리들인데 태반이 감춰져 보이지 않았다. 서쪽 면은 멀리로 현구사 동구 밖의 여러 산들이 보였다. 가까이로는 오세암 이후의 봉우리들이 모두 보였다. 서북쪽은 큰 봉우리 수십 새가 우뚝 솟아 나열되어 있고 그 외 24개 봉우리들은 어렴풋이 아름답고 빼어났다.

 또 그 바깥에 하얗고 넓고 지대가 양양과 간성의 큰 바다라고 부르는데 안개로 막혀 보이지 않았다. 동북쪽이 바로 봉정이다. 정동쪽으로 하나의 산등성이가 높고 크게 비스듬히 이어지는데, 바로 청봉이다. 탑대가 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지만 청봉이 더욱 높다. 그곳에 오르면 바로 동쪽으로 큰 바다이다. 서남쪽의 언덕과 산도 한 번에 빠짐없이 볼 수가 있다. 앉을 때마다 서서 시력이 다하도록 보다가 그만두었다. 이곳과의 거리가 30리 정도 되는데, 봉우리에는 항상 바람이 모질게 불고, 수목이 짧고 연하며 청명하다. 또한 지금도 항상 눈이 쌓여 있어 오를 수 없다고 한다.

 탑은 대 중앙에 있고 매우 높지는 않은데, 어느 시대에 창건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탑 앞의 큰 바위에 구멍이 있다. 예로부터 전해지기를 바닷물이 이 구멍까지 이르러 배를 묶었던 곳이다. 일찍이 사람이 대 근처에서 조개껍질을 주웠던 적이 있어 증험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생각하니 이 구멍에 배를 묶었던 때라면 삼한은 마당히 물고기나 용의 굴로 다 들어가야 하는데, 보고 또 이런 말을 전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날은 아침부터 바람의 기세가 조금 줄어 오후에 기후가 매우 맑고 아름다웠다. 탑대에 이르자 바람이 다시 불어, 오히려 어제나 엊그제만도 못했다. 스님이 말하기를 이 대는 일찍이 바람이 불지 않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오늘은 평온하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일몰을 보고 달이 뜨기를 남아서 기다리려고 했다. 따라온 사람들이 모두 아프거 나 역시 매우 피곤하여 돌아와 암자의 동굴방에서 묵었다. 스님들이 양식이 떨어져 돌아보며 행낭을 찾으니 역시나 텅 비었다. 종일 이들의 안위를 의지하였는데, 그들의 곤란을 구제할 방법이 없어 심각함에 빠져 있음을 알았다. 잠시 `미첩`을 지어 그들에게 주고, 한 병의 소주를 건넸다.


  16일 일찍 밥을 먹고 다시 탑대에 올랐다. 

새벽 운무가 걷히려고 하는데 붉은 해가 처음 떠올랐다. 봉우리와 골짜기가 아름다운 광채로 일변하니, 어제 저녁에 아득하고 고요했던 것들이 모두 새로 간 칼 처럼 밝게 드러났다. 바다 안개는 여전히 전부 걷히진 않았지만, 섬들과 돛단배들은 희미하게 변별할 수가 있었다. 다만 아직 푸른색은 보이지가 않았다. 서쪽 방향으로 끝까지 바라보니, 한 덩어리의 구름과 안개가 있는데 하늘 끝에 가로질렀다. 

 스님이 말하길 금강산이 그 아래에 있는데, 구름이 없다면 비로봉도 손으로 가리킬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십년 전에 금강산에 들어갔었는데, 춘설이 아직 녹지 않아서 비로봉과 구룡폭포의 경치를 모두 오르는 데 실패하였다. 지금은 아문의 한쪽을 이을 수 있다. 


이 때 정신과 기분이 매우 맑고 상쾌하여, 

갑자기 어제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엎어졌던 위험을 잊어버리고서 

남쪽 변방에서 아홉 번 죽을 뻔했지만 

나는 원망 하지 않네. 

이 기이한 절경이 내 평생 최고였으니 


라는 시 구절을 읊었다.

 오세암으로 향하는데, 길이 탑대 서쪽으로 나 있었다. 바로 그 아래는 가파른 산등성이였는데, 모래가 무너지고 바위가 떨어져서 한번 발을 헛디디면 만 길이의 깊은 계곡으로 빠져든다. 가슴이 두근거려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에 남녀에서 벗어나 줄로 허리와 배를 묶고는 한 사람으로 하여금 뒤를 따르면서 줄을 잡아당기게 하였다. 또 한 사람으로 하여금 앞에 있게 하여 어깨와 겨드랑이를 부여잡고서야 비로소 하산하였다. 그러나 어제 저녁부터 두 다리가 붓고 시려서 운용이 어려웠다.

 조금씩 휴식하였다. 10리쯤 도착하자 비로소 남여에 올랐다. 그 중간에 특별히 볼만한 것은 없었다. 볼만한 것은 모두 탑대 위에 이미 굽어보며 손가락으로 가리킨 점은 형세가 조금 이동하여 바뀐 것이 있을 뿐이다. 이른바 `대장경 봉우리`로 매우 높고 크다. 아래를 따라 꼭대기까지 모든 돌조각이 서가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이따금 부스러져 떨어지는데, 가져다가 방의 구들장으로 쓸 만하였다. 시내와 계곡의 그늘은 깊은 곳 사이에는 얼음과 눈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물이 그 아래로 흐르고 길이 그 위로 나 있는데 아직도 녹지 않았다.

길에서 홍천의 전 현감 송익흠을 만났다. 남여를 멈추고 한계의 소식을 물었더니 어제 한계의 정상에 이르니, 암벽의 기세는 진실로 기이하였으나 물이 얕아 흠이었습니다. 이 산에 들어가면 기이하고 특별한 곳을 보지는 못했다. 단 위험하고 이상한 곳만은 볼 수가 있다고 대답하였다. 내가 웃으며 여기부터 가면 마땅히 점점 기이하고 특별한 것을 보게 된다. 위험한 것 역시 마땅히 더욱 심해질 뿐이라고 말했다.

  가야굴에 이르니 골짜기가 자못 넓게 열려있다. 산봉우리는 수렴동 같지 않지만 물의 기세와 돌의 색깔은 서로 같다고 할 수가 있었다. 물가의 반석에 앉아 잠시 동안 물길을 막고 있다가 서쪽으로 네 다섯 개의 높은 고개를 넘어 오세암에 이르렀다.

  능선과 봉우리가 겹겹이 둘러싸고 그 중에 산기슭 하나가 매우 깊숙한 곳에서 탁 트여 환하니, 옛날엔 매월당의 유적이 있었다. 호남의 스님 설정이 재목을 모아다 암자를 짓었다. 토목공사를 겨우 끝내놓고 한창 서까래를 설치하고 색칠을 시작하고 있었다. 암자의 이름은 오세동자의 뜻에서 취했다. 설정은 사람은 나이가 젊고 용모는 준수하였다. 그와 함께 말해보니 성의껏 말하는 것이 줄을 만 하다. 두서너 명의 늙은 스님이 벽 아래에 줄지어 앉아 있는데, 역시 모두 돈후하고 고대하며 청아하고 고고하였다. 글을 대강 이해하고 현구사 안에서 대했던 스님과 같지 않았다.  

 설정이 권선권을 올리며 말하기를 이곳에 온 태수는 누구도 돕지 않았던 분이 없었습니다. 공만 유독 뜻이 없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네가 비록 김공에게 의탁함이 중한데도 본채에다 관음보살을 앉히고, 김공의 초상은 오히려 곁방에다 두었다.손님과 주인이 뒤바뀐 것이다. 네가 나로 하여금 관음보살의 사당에 좁은 영정과 사당에 관한 일을 도우라고 하는 것이냐 라고 하였다. 설정이 말하길 천하의 지존 중에 부처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스님이 된 자로서 반걸음조차도 소홀히 하거나 망각할 수가 없습니다. 김공의 청절은 진실로 존경할만하다. 집을 지어 주불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즉 스님들 중에 누가 기꺼이 돌 하나를 지고 나무 하나를 끌겠습니까. 또한 소승이 스스로 관음을 높이고 그대로 하여금 스스로 김공을 도우라고 하는 것이 무슨 상심이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미첩을 지어 그에게 주고, 또 이 암자에서 계속해서 거주할지의 여부를 물었다. 설정이 말하길 승려의 법에는 원래 미련과 집착이 없습니다. 하물며 몸소 건축을 경영하고서 이어 다시 머물러 거주한다면 이는 이익이다. 조만간 완성된 후에 뜬구름의 종적처럼 어느 방향을 향하여 떠다닐지 모를 뿐이라고 하였다. 점심을 먹고 바로 출발하였다.  

 만경대와 폐문암은 이곳으로부터 거리가 각각 20리지만, 일행이 모두 피곤하여 절룩거리고 또 그곳의 경관이 수렴동과 봉정암의 구역보다 낫지 못하다고 들어서 마침내 그곳을 생략했다. 이후에 계속 큰 나무가 우거진 숲과 해묵은 풀숲 속을 뚫고 나가니 좁은 길이 다소 있어 도보를 면할 수가 있었다. 어제 길이 갈리는 곳에 도착하여 남여에서 내려 계곡물 가에서 수렴동을 서글피 바라보다 한참 지나서야 떠났다.

 대저 봉정은 두 개의 길이 있다. 좌측 하나의 길은 깨끗하고 가파르며 기이하게 우뚝 솟았다. 물 하나 돌 하나라고 뛰어남이 극히 적었고, 전체가 암벽으로 거의 인간세계가 아니었다. 우측 하나의 길은 옹위하고 돈후하며 초목이 무성하게 자라서 사찰이나 정자나 누대를 둘만하였으나, 기묘한 경치는 좌측길보다 못하였다.

 영시암 터에 도착하여 비석을 돌며 배회하였다. 비석은 바로 인제현감 이광구가 세운 것으로, 감사 이봉조가 썼다. 비석 뒷면에 삼연거사가 일찍이 이 암자에 거처했었다고 하였다. 암자 터는 평온하고 시야가 확 트였으며, 맑고 아름다워 좋았다. 거사는 이 산에서 오랫동안 거처하였다. 남겨진 유적인 이 암자에만 그치지 않는다. 산봉우리와 숙석의 명칭이 있어서 그가 명명한 것이 많았다. 전부 기록할 수는 없다. 갈현의 아랫마을 앞 나무 그늘에서 조금 쉬다가, 해가 지기 전에 다시 현구사로 돌아왔다. 안부를 묻는 관아 사람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관아 안이 편안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17일 가음진 옆에 지름길이 있다고 들었다. 

 이곳을 거치면 현구사에서부터 양구현까지의 거리가 120리쯤이라고 하였다. 인제현감에게 편지를 보내어 지름길로 돌아가겠다고 알렸다. 또 추국한 문안을 원통점에 보내줄 것과 가음령에 견여를 대기시켜 달라고 요구하였다. 일출 후에 현구사에서 출발하는데, 여러 스님들이 골짜기 입구에서 서로 전송하였다.

 심히 사모함을 깨달았다. 오전에 원통역에 도착하여 간식을 먹었다. 본관의 답서와 형리의 추국 문안이 모두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수결을 하고 봉하여 부쳤다. 출발에 임해 고을 사람들이 도착해서 관아의 소식과 집안이 편안하다가는 소식을 들었다. 견여로 가음령을 넘어 본 현의 하동촌에서 말을 먹였다. 이때는 오랫동안 가물어 지나는 길 양족의 보리들이 시들고 말라 이삭을 피울 수가 없었다. 논 또한 많이 갈라져 백성들이 모두 초조하게 근심하는 안색이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 관아로 돌아왔다.


『雙溪遺稿』




「雪嶽往還日記」

 

癸酉四月十三日. 與再從弟玄之祖源. 發楊口縣衙. 踰豆毛嶺. 渡馬路驛前江. 中火于驛所. 臨發時. 麟蹄支應始到. 未到縣十里. 渡葛路江. 踰葛路峴. 嶺盡而縣始見. 山中開野. 大川繞出縣前. 卽雪嶽寒溪合流而下云. 直抵東軒. 與主倅金成仲話移時. 洪川前倅宋翼欽爲訪雪嶽亦來到. 共問山路遠近. 游觀後先. 主倅一一細指. 仍發藍輿傳令. 夕食後. 出宿將官廳. 是日終日大風. 船上馬上皆不穩. 十四日日出. 入東軒. 宋洪川已來坐. 謂欲先向寒溪. 歷雪嶽. 轉出嶺東. 余則旣無嶺東之意. 又聞寒溪路迂. 以直趍玄龜定計. 宋洪川先起. 余與主倅同推殺獄. 推案繁冗. 騰書甚遅. 故結辭起草訖卽發. 使該吏凈書. 俟山行出來受押. 路出縣北松林. 林盡處. 有小架坐石彌勒. 其下稍迤. 上有亭. 卽所謂合江亭. 恐分日力過而不登. 渡加音津. 踰參嶺. 秣馬於嶺下村店. 以肩輿緣溪五里許. 川石往往絶佳. 馬行二十餘里. 始望見玄龜寺. 寺僧四人以輿待於川邊. 到寺無甚可觀. 寺甚貧殘. 僧徒亦鮮少. 新刱法堂. 無瓦覆以木. 是日又終日風霾. 政極愁絶. 一老僧前言曰. 此山從來無久無風. 亦無一連五六日吹. 近日之風. 未必非明日之幸也. 夕食後. 散步寺庭. 望見西南一帶. 山火絡繹如列萬炬. 亦可觀. 宿玄龜寺. 聞襄陽府使李聖檍入山已三日. 明日將自神興還官云. 十五日. 早食登輿. 齎輕粮. 還送獜蹄刀尺. 揀落行中不緊人隨輿者. 隨陪金翠光, 工房朴枝靑, 通引任翠彬, 吸唱翠星, 後陪末男, 老味, 刀尺莫同也. 經頭陁淵, 鶴巖, 廣石洞. 水石皆可觀. 而僧徒以爲入山後. 在在如此. 不必停輿. 踰葛峴. 稍見平陸. 有五六人家. 小憇川邊樹陰. 一老人扶杖來見. 問其年. 九十有一. 有子年亦近七十云. 問何養而致壽如此. 對以自少勤力耕作. 朝夕菜食而已. 不知其他. 以風色不佳. 勸令入息. 笑曰. 自少不知避風. 而不曾爲病. 况年旣至此. 觸風病死. 亦無可惜. 何避之有. 經槽淵. 淵如槽㨾而甚深濶. 到深隱寺舊址. 有礎砌石及桃李雜花. 僧言深隱廢. 而玄龜始建. 深隱玄龜之義問之. 無曉者. 初以觀閉門庵. 宿五歲菴. 翌日登鳳頂. 宿鳳頂菴. 又翌日從十二瀑水簾洞而下. 分排路程. 更思之. 山中早晩風雨不可知. 或失鳳頂之登. 則雖遍搜諸勝. 不成觀雪嶽. 故捨五歲菴路. 直取水簾洞. 洞中元無分明路逕. 澗左右. 都是巖石. 大者. 磐陀穹窿. 小者. 縱橫廉利. 往往無着足處. 入洞絶少登輿. 便衣草鞋. 跳深爬峻. 稍過危處. 輒拭汗定喘. 連以生葛粉糜食. 調澗水沃喉. 午到水簾洞. 僧言自玄龜至此. 爲四十里. 自五歲菴前分路處至此. 亦可二十里量. 其遠未必至是. 而崎嶇艱辛. 殆甚於平道百里行. 入山後. 水石峯巒之奇勝處. 不可殫記. 所謂頭陀, 鶴巖, 廣石, 槽淵. 皆是偶有稱號. 故記之. 其外此類甚多. 漫然無名. 雖欲記. 不可得. 自分路處. 峯勢石色稍稍覺異. 至水簾. 四壁抻天. 自水底至山頂. 似用一箇大石斲成. 腰以上. 絶不見縫罅. 樹林皆在腰下. 而踈踈不甚蒙茂. 環列如屛障. 尖(?)如鋒鋩. 高孤壯特. 奇詭恠巧. 狀態不一. 又有一岡. 邐迤隱暎於洞口之外. 望見彷彿如金剛之衆香. 石色在峯者. 黯白淡靑如艾色. 在水者. 凈白. 水亦渟匯淵湛. 上下累十層. 大略皆然. 上下層之際. 皆有大白石. 橫截盤礴. 承上接下. 水從石上散布而下. 幾似斷流而颯颯常有風雨聲. 川邊有廣石. 可坐數十人. 廣石上. 又有高大石數塊. 僂然而俯. 可避暴雨烈陽. 鋪席坐其下. 設鍋炊飯. 玄之縛筆杖頭. 題名壁上. 飯訖將起. 玄龜僧四名. 送襄陽倅. 踰神興. 裹飯追到. 促飯同發. 泝上十二瀑. 瀑水不懸不卧. 而馳逐盤渦. 各一其態. 峯壁如水簾. 而步步幻面. 愈出愈奇. 玄之叫聲. 不絶耳後. 通引吸唱輩. 亦無不拍手嘖舌. 獨僧徒恬然無變色. 到雙瀑. 乃十二瀑之盡處. 壁勢㝡懸絶. 而久旱水少. 無噴薄勃欝之勢. 亦自裊娜可喜. 自水簾到雙瀑. 尤絶險. 路絶處. 輒有僵木繼之. 俯窺空隙. 窈然無底. 戰掉不可過. 前者挈腕. 後者捧腰. 爲眼不計身. 殊覺一笑. 僧言水多時. 石滑逕沒. 居僧亦或遇漂溺之患. 近幸久不雨耳. 到獅峴. 久立歇脚. 回視所經. 茫不可辨. 但見累累在下. 皆是向之側弁仰望而不可攀者也. 午後連以步行. 氣竭力乏而日影漸匿. 四顧無托. 抵死前進. 峯巒到此. 尤雄拔秀特. 而不暇遊目諦視. 直到獅峯下. 稍有土逕. 始就輿. 懸輿而上. 百步不啻九折. 擔輿僧. 喘喘欲絶. 到鳳頂. 日猶餘尺許. 槩低處多障蔽. 初到者謂已夕也. 頂上戴石. 狀如累碁. 危甚欲墮. 鳳頂之名. 得於此. 聞襄陽太守到此. 恐石壓促下. 諸僧哄然. 庵在頂下. 結搆極堅妙. 廢久而窓壁猶鮮. 楚楚可喜. 有一僧癯形弊衣. 迎禮輿頭. 問孤絶如此. 何爲獨處. 對以偶然過登. 愛不能去. 孤絶是本分. 獨處亦何妨云. 憇小軒. 沒庵東石泉解渴. 味極淸冽. 爽氣徹骨. 僧言水簾十二瀑之源. 皆發於此. 絶頂出泉. 其富如此. 良可異也. 飢甚促飯. 上㙮臺俯見. 萬疊千丈. 踊躍飛奔. 各自呈形現相於㙜下. 如槍戟鉞纛之環衛將壇. 雖長短踈密. 參錯不齊. 而位置氣勢. 極其森肅. 南一面皆是午間所歷諸峯. 而太半隱沒不見. 西面則遠而洞視玄龜洞口外衆山. 近而盡得五歲庵以後峯巒. 西北則大峯數十矗矗列立. 其外二十四峯縹緲姸秀. 又其外白蕩蕩地. 云是襄杆大海而霧塞不見. 東北卽鳳頂. 正東一崗. 高大迤長. 卽所謂淸峯㙮臺. 爲山之最高. 而淸峯尤高. 登之則東盡大洋. 西南丘山. 一擧無遺. 每坐目力之窮. 而止距此可三十里. 而峯常獰風. 樹木短苦. 且今尙積雪. 不可登云. 㙮在㙜中央而不甚高. 不知何代所刱. 㙮前巨巖有穴. 古傳海水至此穴. 是繫舟處. 曾有人得螺蚌甲於㙜傍. 可爲徵云. 想繫舟此穴時. 三韓當盡入魚龍窟. 見且傳者誰也. 是日自朝風勢頗减. 午後氣候極淸美. 至㙮臺. 風復作. 猶不如昨再昨. 僧言此㙜未甞無風. 今日可謂平穩. 觀日沒. 欲留待月上. 而從者皆病. 余亦憊甚. 還宿庵之洞房. 僧輩粮絶. 顧問行橐. 亦枵然. 終日仗安危於此輩. 而無以濟其困. 甚覺埋沒. 姑作米帖與之. 饋以一壺燒酒. 十六日早食. 復登㙮臺. 曉靄欲散. 紅日初昇. 峯巒洞壑. 精彩一變. 昨夕之森邃而窈窕者. 皆晃朗如新磨釖. 海霧猶未盡收. 而島嶼㠶檣. 隱約可辨. 但未見碧色. 西向極目. 有一抹雲煙. 橫屯天末. 僧言金剛在其下. 無雲則毗盧可指. 余於十年前入金剛. 而春雪未消. 毗盧九龍之勝. 皆失登攀. 今可續鴈門之踦矣. 此時神氣甚淸怏. 頓忘昨日七顚八仆之危. 誦九死南荒吾不恨. 玆遊奇絶冠平生之句. 將向五歲庵. 而逕出㙜西. 直下峻脊. 崩沙墜石. 一蹉跌則滚入萬丈深谷. 悸不能前. 乃脫藍輿. 索絆腰肚. 使一人從後挽之. 又使一人在前攀住肩腋始敢下. 而自昨日晩後. 兩脚浮酸. 艱於運用. 寸寸休息. 至十許里. 方就輿. 其間別無可觀. 可觀者. 皆是㙮臺上所已俯臨指點而面勢稍有移換耳. 有所謂大藏經峯者極高大. 而從下至顚. 皆石片襞積如書架. 往往破落. 可取以排房堗. 澗壑之陰深處. 間有氷雪沓築. 水流其下. 路出其上而猶不解. 路逢宋洪川. 停輿問寒溪消息. 答以昨抵溪上. 壁勢誠奇異. 而水淺可欠. 入此山姑未見奇特處. 但見其危險異常. 余笑曰. 從此以往. 當漸見奇特. 而危險亦當益甚耳. 至伽倻窟. 洞頗開廣. 峯巒不如水簾. 而水勢石色. 可與相埒. 坐水傍盤石移時. 截流而西. 踰四五峻嶺. 到五歲庵. 崗巒重重環抱. 中起一麓. 極韞藉開朗. 舊有梅月堂遺蹟. 湖南僧雪凈鳩材建菴. 土木纔訖. 方設架始繪事. 菴名取五歲童子之義云. 雪淨者年少貌俊. 與之語. 衮衮可聽. 數三老僧列坐壁下. 亦皆敦龎淸古. 粗解文墨. 不似玄龜中所對. 雪淨進勸善券曰. 太守之到此者. 莫不有助. 公獨無意耶. 余笑曰. 汝雖托重金公. 而却坐觀音菩薩於正堂. 金公影子. 反藏夾室. 賓主倒置. 汝將使余助觀音影堂之役耶. 凈曰. 天下之尊. 莫大於佛. 爲僧者. 不可跬步忽忘. 金公淸節誠可敬. 而爲屋不主佛. 則僧徒誰肯負一石曳一木. 且小僧自尊觀音. 使君自助金公. 庸何傷. 作米帖與之. 且問仍住此菴否. 凈曰. 浮屠之法. 元無戀着. 况躬自營建. 仍復留住. 則是利之也. 早晩落成後. 不知浮雲踪跡漂向何方耳. 午飯卽發. 萬景臺閉門菴. 距此各二十里. 而一行皆疲頓蹣跚. 且聞其觀不出於水簾鳳頂之範圍遂略之. 此後連從喬林宿莽中穿出. 而稍有逕路. 可免徒步. 到昨日分路處. 下輿立澗頭. 悵望水簾洞久之而去. 大抵鳳頂有二路. 左一路. 淸峭奇拔. 一水一石. 絶少尋常. 而全體是巖壁偪側. 殆非人境. 右一路. 雄偉敦厚. 草木暢茂. 可置寺刹亭㙜. 而奇勝則遜於左. 到永矢菴遺墟. 徘徊繞碑. 碑卽縣監李廣矩所竪. 監司洪鳳祚識. 其後三淵居士曾居此菴云. 菴址平穩. 開廣眼界. 亦明媚可愛. 居士久於此山. 遺蹟所留. 不止此菴. 峯巒水石之稱. 多其所命. 不能悉記. 少憇葛峴下村前樹陰. 日未入. 還到玄龜. 問安官人來待. 得衙中安信. 十七日. 聞加音津傍. 有捷路. 由此則自玄龜距楊口縣. 可百二十里云. 走書獜蹄倅. 告以徑還. 且要送推案於圓通店. 待肩輿於加音嶺. 日出後發玄龜. 諸僧相送於洞門. 甚覺依依. 午前到圓通驛點心. 本官答書及刑吏推案. 皆來待. 着押緘封付之. 臨發. 邑人來到. 得衙信及家中平信. 以肩輿踰加音嶺. 秣馬本縣下東村. 時久旱. 所經兩麥萎縮. 不得發穗. 水田亦多龜坼. 民皆焦然有憂色. 日未入. 還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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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육촌 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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