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시문

유곡연기(遊曲淵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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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0회 작성일 2024-02-13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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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곡연기(遊曲淵記)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한계산(寒溪山)과 설악산(雪嶽山)은 옛날에 이른바 산악의 신수(神秀)이다. 고개와 바다 수 백리 사이에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고, 동쪽은 설악이고 남쪽은 한계이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할 뿐만이 아니라 왕유정(王維楨)의 「한계산기(寒溪山記)」는 『중국명산기(中國名山記)』 안에 실려 있다. 대개 천하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산중에는 또 이른바 ‘곡백연’이란 곳이 있는데 더욱 뛰어나고 기이하지만 세상에서 많이 알지 못한다. 몇 년 전부터 세상을 피하거나 재난을 피할 만한 곳이라 전해오는 이야기가 자못 있었다.


  기미년(1679)에 나는 곡운에 있었다. 막내아들 창직이 종 하나를 데리고 양양 신흥사로부터 험한 길을 힘들게 걸어 깊이 들어가니 유량민 집이 하나 있었다. 드디어 평평한  언덕을 골라 조를 심고 왔는데, 그곳이 형세는 말할 수 있었다. 나는 듣고는 즐거웠으므로 그 일을 대략 기록하고, 또 “푸른 구름 깊은 곳에서 여생을 보내고자〃라는 구절의 절구 한수를 지어서 끝없는 상상을 하였다. 그 후에 조카 창흡이 한계의 가장 깊이 곳에 살았다. 신미년(1691) 5월 창흡과 함께 가서 유람하였다. 움집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그 아름다운 경치는 왕유정이 기록한 것과 부합한다.

  바빠서 폭포를 올라가 보지도 못했고, 곡백연은 고개 하나 너머에 있었지만, 또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병자년(1696)에 아들 창국이 인제현을 다스렸다. 한계와 설악은 인제현의 경내에 있다. 나는 일 때문에 재차 인제현 관아에 도착했었는데 일이 급박하고 눈이 내려 또 가보지를 못하였다. 한계에 있는 조카 창흡의 거처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끝났다. 또한 창흡은 백연의 동구에 판자집을 짓고 오가며 유람하고 감상하였는데, 나에게 그곳의 승경을 자못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늙어 매번 그 안을 한번 들어가 보지 못함을 후회하였다. 무인년(1698) 2월에 또인제현에 도착했다. 27일에 아들(창국)과 합강정에 나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덕산을 넘으니, 고개 옆은 큰 내로 내는 합강의 상류이다. 원통의 동쪽 물가를 따라서 한계의 동구에 이르러 큰 내를 건넜다. 내는 남교역으로부터 흘러 왔다. 또 한계의 하류를 건넜다. 굽이굽이 흐르는 냇물을 네 번 건넜다. 새로짓은 절을 지나가면서 들어가지는 않았다. 채하봉을 지나갔는데, 이 봉우리 이름은 내가 전에 왔을 때에 붙인 것이다. 아래에는 검푸르고 차가운 맑은 못이 있는데, 사람들은 ‘열목어 못’이라고 부른다. 사암봉을 지나자 왼쪽에 작은 폭포가 있는데 옥류천이라고 부른다. 100여 보를 더 가서 너럭바위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지난 날 왔을 때의 기억이 도처에서 생생했다.

  현으로부터 이곳까지는 40리 이다. 또 5리를 가자 옛 절터(한계사지)에 닿았다. 전에 이 절을 들렀을 때는 불에 타서 기와 조각이 눈에 가득하였다. 지금 와보니 풀과 나무가 무성하고 빽빽하여 남여를 탔다. 동쪽 언덕으로부터 시내를 하나 건너니 곧 폭포의 하류이다. 돌길이 매우 험해서 덮잡고 올랐다. 위태로운 골짜기를 내려다보니, 이는 『한관의』에 이른바 “뒷사람이 앞 사람의 신바닥을 본다.”는 것이었다.

  혹은 남여에서 내려 조금씩 올라가니 폭포(대승폭포)가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한 언덕 정상에 이르러 굽어보니 오싹하고 두근거렸다. 이에 폭포를 보니 북쪽에서 흘러내리는데 좌우의 푸른 암벽이 무려 천 백 길이며 폭포 물은 한 가운데에서 곧바로 떨어졌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끈을 내려서 그 길이를 재어보니 수백 길은 되었다고 한다. 비가 내린 뒤라 물의 기세는 더욱 힘차게 물방울을 내뿜었다. 물방울은 바람 때문에 하늘하늘 떨어져서 노을 같고, 안개 같으며 실 같고, 연기 같았고, 순간마다 온갖 모양으로 변했다. 아래에 있는 못에는 얼음과 눈이 아직도 엉겨 있었다. 제멋대로 오랫동안 바라보다 앉아 있던 바위를 ‘자연대’라 이름을 하였다.

  처음에 사암봉 아래를 가면서 올려다보니 가파른 암벽이 구름 속에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하여 굽어보니 겹겹이 쌓인 미로 속에서 더욱 험하고 높은 곳이었다. 옛 절터(한계사지)에서부터 이곳(대승폭포)까지 5리가 되는데, 또 조금 위로 2리 쯤 가서 대승암에 도착했다. 판옥에는 중이 없고 감실에 작은 불상이 있었다. 부엌 밖에는 나무를 파서 샘물을 받는 물통이 있었다. 북쪽에 앉아 남쪽을 향하니 좌우에는 층층이 겹쳐진 산들이 용과 호랑이처럼 웅장하였다. 남쪽을 바라보니 벌려있는 산봉우리들이 갑자기 탁 트였고 드러난 낭떠러지와 골짜기에는 얼음과 눈이 하얗다.

  백연에 사는 유랑민 지일상이라는 자가 와서 기다렸다. 중 각형과 광학도 동행하였다. 밤에는 암자에서 묵었는데 향을 피우고 촛불을 밝히니 말똥말똥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암자로부터 북쪽으로 수백 보를 가서 상승암에 다다랐다. 상승암은 불에 탔으며 위치가 더 높아 보이는 경치가 더욱 아름다웠다. 다시 산등성이로 5리 쯤 올라가자 산 정상(대승령)에 이르렀다. 산의 북쪽은 눈 깊이가 1척이었다. 잠깐 앉아서 좌우를 바라보니 안팎의 산세가 모두 눈 안에 들어왔다. 각형과 지씨 사내에게 물어보니 설악의 봉정암은 동쪽 구비에 있고, 백연은 동북쪽에 있다고 손가락으로 가리켰지만, 안개가 짙게 끼어 분별할 수 없었다. 오색령의 필여봉은 동남쪽에 있고, 북쪽에 우뚝 솟아 수평으로 보이는 것이 미시령이다. 남여를 내려 걸어갔다. 산비탈은 높고 위험하며 얼음과 눈에 복사뼈까지 빠져서 발을 붙일 수 없었다. 혹은 골짜기 물을 뛰어넘었다. 큰 나무들이 하늘을 가렸고 대숲이 무성하고 빽빽했다. 조금 평평한 곳에서 시종이 남여에 오르기를 청했으나 아직도 경사가 급해서 걷기도 하고 쉬기도 했다.

  20리 쯤 가자 소나무 숲과 큰 시내가 나왔다. 시냇물은 동쪽으로부터 흘러오는데, 또한 북쪽에서 흘러 이 시냇물과 만나는 시내가 있었다. 여기가 바로 백연의 동부이다.

돌아보니 내려온 길이 어둠 속에 묻혔으나 날은 이미 한낮이었다. 회옹의 “내 갓끈 다시 씻지 않아도 이미 떨어져 나간 먼지가 만 휘이다.”라는 시구를 읊었다.

바위에 앉아 못을 내려다보니 못은 깊이가 2길 정도 되고 폭이 수백 보인데 맑아서 바닥이 보였으며 빛깔은 푸른 옥 같았다. 솥을 걸고 밥을 지어 먹고 조금 머뭇거렸다. 동쪽에는 작은 길이 있는데 이 길은 이른바 길골이다. 이 골짜기로 가면 신흥사에 갈 수 있다고 한다.


드디어 동쪽으로 가자 또 남쪽 골짜기에서 흘러나오는 시내가 있었다. 그늘진 숲이 깊숙하고 컴컴해서 바라보니 특이하였다. 여기가 바로 이선동(귀때기골)이라고 한다. 또 응정동(곰골)을 지나자 시냇물이 북쪽에서 흘렀다. 건너서 언덕을 수백 보 올라가자

깊숙한 곳이 나왔다. 폭은 7, 8일 밭갈이할 만하고 사면이 둘러 쌓여 있으며, 북쪽에는 산봉우리가 두 개 있고 동남쪽에는 층 진 봉우리들이 은하수를 지탱하고 우뚝 솟은 옥처럼 서 있었다. 서남쪽에는 봉우리가 있는데, 봉우리 바깥에는 또 높은 봉우리가 있었다. 그 높은 봉우리 아래는 위에서 말한 이선동이다. 긴 못이 그 앞에서 돌아가고 맑은 샘물이 숲 속에서 나왔다. 이곳이 창흡이 정한 정사를 세울 만한 터이다. 위아래를 배회하니 마음이 황홀하여 곧 머물러 살며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드디어 앞의 시어  취하여 그 시내를 벽운이라고 이름 짓고, 골짜기를 태시라고 하여, 나무 판에 써서 세웠다.

  대게 들으니 이곳에서 동쪽으로 수십 리 가면 오세동자 터(오세암)가 있다고 한다. 매월공이 한계와 설악에서 많이 거주했다고 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폐문암은 30리에 있고, 봉정사와 십이폭포는 동남쪽으로 40리에 있다. 봉정암은 맨 꼭대기에 웅거하며 온갖 봉우리를 굽어 누르며 옆으로 동해를 흘겨본다. 유홍굴은 10리 쯤에 있다. 중첩된 산봉우리들과 거울 같은 못과 발 같은 폭포가 들어갈수록 더욱 기이하고 사람과 짐승의 발길이 둘 다 끊어져 가늠할 수가 없어, 거의 인간의 경치가 아니었다. 진실로 이른바 ‘자연히 엄하고 신비하다’ 는 것이다.

  몸이 피곤하고 날이 저물어서 만약 노숙하지 않고 갔다가 돌아올 수는 없다. 방황하며 슬퍼하다가 도로 길골을 지나서 황장우에 이르렀다. 못과 여울은 또한 기이한 장관이었다. 몇 리를 더 가서 마을에 닿으니 곧 지일상이 사는 곳인데, 또 몇 집이 있었다. 그곳은 땅이 조금 평평하고 10여 일 밭갈이 할 만했다. 이곳이 바로 전날에 집 아이가 왔던 곳이다. 그 때에 듣기로 큰 나무가 종횡으로 자라고 산죽이 가득하여 불태우고 찍어내어 조를 뿌렸다고 하였다. 지금은 평평한 밭두둑이 밭에 늘어져 있는데 지씨가 점유하고 있고 기장, 조, 콩, 보리, 참깨가 모두 좋았다. 다만 목화만은 시험해보지 못했고, 바람과 서리는 또한 산 밖과 다름이 없다고 한다.

  풀숲 속에 폐허가 된 터가 있는데 그것은 부자가 살던 곳이라고 한다. 시내 서쪽은 자못 넓고 평평했다. 몇 년 전에 중이 절을 지었는데 오래지 않아 무너졌다. 지금까지 망가진 초석과 목재가 있다. 옆에는 샘이 있어 이곳도 집을 짓고 농사짓고 살만하였다. 밤에 지씨 집에서 묵는데 판옥에는 겨우 두 명이 들어갈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시냇가에 나가 앉아서 산과 골짜기를 둘러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무한한 생각이 들게 하였다. 또한 오래 머물 수 없는 것을 후회하게 만들었다. 뫼 뿌리는 서쪽에서 북쪽으로 뻗으며 물길을 끊어져 이름이 격산인데, 나는 또 천춘령이라고 불렀다. 이 고개를 넘어 내려가 1리 가량을 가자 사람들이 부전암이라고 부르는 곳이 나왔다. 또 조금 내려가니 포전암이 나왔다. 대개 위험한 돌길이 물가에 있어 몸을 구부리고 발을 옆으로 돌리고 등을 붙이고 가며 부여 잡고 안으면서 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붉은 글씨로 바위 표면에 이름을 썼다. 또 허공교가 있는데 양쪽에 나무를 베어서 허공에 걸었는데 겨우 몇 길이다. 이곳은 모두 지나가기 힘든 곳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밖에도 위험한 곳은 곳곳이 모두 그러하며, 충암과 괴석이 종횡으로 이리저리 펼쳐져서 잡풀이 자라지 못한다. 한나절을 다녔지만, 흙을 한 줌도 밟지 못했으며 바람에 날리는 흙먼지도 하나 없었다. 급류와 깊은 못은 수십 리를 연이어 흘렸고 옆에서 흐르는 지류들이 그 가운데로 뒤엉켜 들어왔다. 좌우의 봉우리와 고개는 천 번 돌고 만 번 돌았으며, 동문에 수백 보 못 미친 곳에는 또 큰 시내가 있는데, 쏟아진 물줄기들이 흩어져 퍼지면서 동쪽으로부터 흘러오는데, 마치 다투는 것 같고 마치 성난 것 같아서 형세가 지극히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격산에서 모두 여섯 번 물을 건너서 동구에 다다랐다. 긴 못은 검푸르고 맑으며 위에는 4, 5층의 봉우리가 있었다. 이곳이 창흡이 오로봉이라고 이름 지은 곳이다. 오로봉의 북쪽이 바로 창흡이 거처를 정한 곳이다. 언덕을 내려와 물을 건너 정사에 이르렀다. 여섯 칸짜리 집이 동남쪽에 앉아서 서북쪽을 향하였고 미쳐 지봉에 판자를 얹지는 못했다. 남여에서 내려 조금 앉았다. 창흡도 일찍이 나에게 그 빼어난 경치를 말했지만 지금 보니 참말이었다. 

  아 수십 년 동안 꿈꾸며 상상하던 끝에 다행히 맑고 씩씩하며 매우 특이한 경관을 찾아냈지만 거의 형용하기 어렵다. 비록 지극히 높고 깊은 곳을 얻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또한 나머지도 알 수 있다. 내가 평생 본 것이 비록 넓지는 않지만 직접 가본 아름다운 절경도 한두 곳이 아니니 이곳에 와보고 망연자실하였다.


옛날에 연릉계자가 주나라에 조회를 가서 열국의 음악을 보았을 때에 소를 춤추는 것을 보고 “이것은 더할 것이 없다. 지극한 것을 보았다.”라고 말했는데, 나는 곡백연에서 또한 ‘만약 수십 년 전이라면 이 정사 옆에 띠풀을 베어 집을 짓고 살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늙어서 할 수가 없다. 인간 세상을 살펴보고 생각하면 내가 사는 곡운은 깊지도 않고 그윽하지도 않음을 탄식하게 된다. 이것은 속세의 사람과는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마을을 나와 노새를 타고 남교역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긴 시내를 따라가는데 역 앞 1리 쯤 소나무 숲의 천백 그루 나무가 울창하여 볼만하였다. 신기현을 넘어 원통을 지나 저녁에 관아로 돌아왔다. 다음날 합강정에 나가 묵었는데, 합강정은 현 동쪽 몇 리 쯤 있다. 현 뒤의 진산은 비스듬히 동쪽으로 달려 봉긋하게 끊어지는데 그 위를 평평하게 하고 4칸짜리 정자를 지었다. 정자 아래의 물 한 줄기는 미시령, 곡백연, 한계, 서화에서 흘러내리고, 다른 한 줄기는 춘천, 기린현으로부터 흘러내려 정자 아래서 만난다. 난간에 의지하여 굽어보면 모래와 자갈을 샐 만하니 청신하고 쇄락함이 훌쩍 속세를 벗어났다. 대게 강호의 누대는 경관이 광활하고 장려한 곳이 본래 많다. 만약에 내가 직접 본 곳들을 가지고 그 차례를 정해본다면 청풍의 한벽루와 춘천에 소양정은 당연히 백중의 사이이고, 홍천의 범파정은 낮고 촌스러워 풍격이 이보다는 못하다.


『谷雲集』




「遊曲淵記」


寒溪雪嶽. 古所謂山嶽之神秀者也. 雄盤嶺海數百里間. 東卽雪嶽. 南卽寒溪. 非但名於我東. 王維楨寒溪山記. 載於中國名山記中. 蓋聞於天下矣. 山中又有所謂曲百淵者尤絶異. 而世多不知. 近歲以來. 頗有傳說. 以爲避世逃難之所. 歲在己未. 余在谷雲. 季兒昌直. 携一僕. 自襄陽神興寺. 間關尋入. 則有流民一戶在焉. 遂就平阜. 種粟而來. 能言其形勢. 余聞而樂之. 略記其事. 又作一絶. 有碧雲深處送殘年之句. 以寓遐想. 其後家姪昌翕. 卜寒溪最深處. 辛未五月. 與翕往遊. 一宿茇舍. 其勝致. 與王維楨所記合. 悤悤未得登覽瀑布. 曲百淵. 隔一嶺. 而亦無因而至焉. 丙子. 家兒昌國宰麟蹄縣. 寒溪雪嶽. 卽縣境也. 余以事再到縣衙. 迫事故値雨雪. 又不果往. 翕姪寒溪之居. 旣未就而罷. 又於百淵洞口. 經營板屋. 往來遊賞. 爲余談其勝頗詳. 余老矣. 每恨未得一至其中. 戊寅二月. 又到縣. 二十七日. 與家兒出合江亭. 乘舟渡江. 踰德山. 峴傍大川. 川卽合江上流. 由圓通東畔. 至寒溪洞門. 越大川. 川自藍橋驛而來. 又涉寒溪下流. 曲折四渡. 過新寺不入. 歷彩霞峯. 此余前日所名. 下有澄潭紺寒. 俗名餘項魚潭. 過四巖峯. 左有小瀑. 名玉流泉. 轉百餘步. 坐盤石午飯. 舊日經行. 到處依依. 自縣至此四十里. 又行五里. 抵舊寺址. 前者過此寺. 燬於火. 瓦礫滿目. 今來草樹茂密. 乘籃輿. 由東厓渡一溪. 卽瀑布下流. 石路嶄絶峻急. 攀厓緣壁. 下臨危壑. 此漢官儀所謂後人見前人履底者. 或去輿. 寸寸而登. 飛流忽入眼矣. 至一岡頭. 俯視懍悸. 越見瀑布. 自北而來. 左右蒼壁. 無慮千百仞. 飛流當中直下. 曾有人下繩度其長. 可數百丈. 雨餘水勢益壯噴沫. 因風裊娜. 如霞如霧. 如絲如煙. 頃刻萬變. 下潭氷雪猶凝. 縱觀良久. 創名所坐巖曰紫煙臺. 初行四巖峯下. 仰望峭壁. 參雲摩霄. 到此俯視襞積依迷中. 益驗所處之高也. 自舊寺至此. 可五里. 又稍上二里許. 至大乘菴. 板屋無僧. 龕有小佛. 廚外刳木受泉. 坐北向南. 左右層巒. 龍虎翼翼. 南望列岫. 突兀軒豁. 呈露崖谷. 氷雪皓然. 百淵流民池一尙者來待. 僧覺炯, 廣學亦同行. 夜宿庵內. 焚香明燭. 耿耿不寐. 翌朝. 由庵北行數百步. 至上乘庵. 庵燬於火. 處勢益高. 所見益佳. 轉上山脊五里許. 至山巓. 山之北. 雪深一尺. 少坐而左右望. 內外山勢. 皆入眼中. 問於覺炯, 池漢. 而指點上雪嶽鳳頂庵在東曲. 百淵在東北. 而嵐靄杳冥不可辨. 五色嶺上筆如峯. 在東南. 而在北嶐然平看者. 彌是嶺也. 去輿而下. 山坂峻急. 氷雪沒踝. 不能著足. 或超越澗壑. 大木蔽天. 叢竹蒙密. 少平處. 傔人請上輿. 而猶覺傾危. 或步或憩. 行二十里許. 而得松林大溪. 溪水自東而來. 又有溪自北而合. 是乃百淵洞府也. 回望來路. 在杳冥中而日已午矣. 諷詠晦翁吾纓不復洗. 已失塵萬斛之句. 坐巖臨淵. 淵深可二丈. 廣袤數百步. 淸澈見底. 色如綠玉. 撑鍋作飯. 少焉徜徉. 東有小路. 此則所謂吉洞. 從此可達神興寺云. 遂東行. 又有溪自南谷而來. 陰森窅冥. 望之特異. 此乃耳鐥洞云. 又過熊井洞. 溪水自北而來. 涉而緣厓數百步. 得一奧區. 廣袤可耕七八日. 四面環抱. 午地有兩峯. 巳有層峯. 撑銀矗玉. 申有峯. 峯外又有高峯. 其下卽上所云耳鐥洞也. 長潭繞其前. 淸泉出林中. 此是阿翕所定可立精舍處也. 徘徊上下. 意象怳然. 便有棲泊不反之思. 遂取前詩語. 名其溪曰碧雲. 谷曰太始. 書諸木板而立之. 蓋聞自此東去數十里. 有五歲童子基. 梅月公多住寒溪雪嶽云者. 卽此歟. 閉門巖. 在三十里. 鳳頂寺十二瀑. 在東南四十里. 鳳頂則據絶頂. 俯壓萬峯. 傍睨東溟. 兪泓窟. 在十里許. 複嶂攢峯. 鏡潭簾瀑. 轉入轉奇. 而人獸兩絶. 不可涯略. 殆非人間景色. 眞所謂自然嚴且神者也. 力疲日暮. 若非露宿. 不可往返. 彷徨悵然. 還過吉洞. 至黃腸隅. 潭瀨亦奇壯. 轉數里抵村家. 卽池一尙所居. 又有數戶. 其地稍平. 可耕十許日. 此卽前日家兒所到處. 其時聞大木縱橫. 山竹極目. 焚斫播粟矣. 今作平疇陳田. 爲池漢所占. 忝粟菽麥芝麻無不宜. 但未試木綿. 風霜亦與山外無別云. 草莽中有廢址. 傳以爲富民之居. 溪西亦頗寬平. 頃年作僧寺. 不久而罷. 今尙有殘礎毀材. 傍有泉. 亦可置屋耕墾. 夜宿池家. 板屋僅容二人. 明朝. 出坐溪邊. 回望山谿. 令人有無限意思. 而亦恨其不得久留也. 山脚自西而北. 遮截水口. 名隔山. 余又號曰千春嶺. 踰此而下. 行一里許. 有俗所謂負轉巖. 又稍下而有抱轉巖. 蓋危石際水. 傴僂側足. 貼背而過. 或攀抱而行. 余以朱筆. 題名於巖面. 又有虛空橋. 兩處斬木駕虛纔數丈. 此皆所謂難過處. 然此外危險. 在在皆然. 層巖怪石. 縱橫錯布. 不生雜卉. 半日經行. 不踏寸土. 無一點塵埃氣. 急流深潭. 連延數十里. 旁流支澗. 橫入其中. 左右峯嶺. 千回萬轉. 未及洞門數百步. 又有大溪. 懸流散布. 自東而注. 如爭如怒. 勢極雄麗. 自隔山凡六渡水而至洞口. 長潭霮黑淸瑩. 上有四五層峯. 此阿翕所名五老峯. 峯之北. 卽其卜居處. 下厓渡水而至精舍. 六間坐辰向戌. 未及蓋板. 卸輿少坐. 翕也曾爲余言其形勝. 今觀之. 信然. 噫. 數十年夢想之餘. 幸得探討淸壯瑰詭之觀. 殆難形容. 雖未得窮高極深. 此爲可恨. 亦可以三隅反. 余之平生所見. 雖未廣. 而所歷佳絶處. 亦非一二. 而到此爽然自失. 昔延陵季子朝周. 觀列國之樂. 見舞箾者曰. 其蔑以加於此矣. 觀止矣. 吾於曲百淵. 亦云. 若在數十年之前. 庶可傍此誅茅. 而今不可得. 俯仰人世. 念我谷雲. 便覺有不深不密之歎. 此難與俗人言也. 出洞騎騾. 至藍橋驛午飯. 傍長川而行. 驛前一里許. 松林千百株蔚然可觀. 踰三岐峴. 歷圓通. 夕還縣衙. 翌日. 出宿合江亭. 亭在縣東. 數里許. 縣後鎭山. 逶迤東走斗斷. 夷其上作亭四間. 亭下之水一派. 自彌是嶺曲百淵寒溪瑞和而出. 一派. 自春川麒麟縣而來. 合於亭下. 憑檻俯視. 沙礫可數. 淸新灑落. 超然出塵. 蓋江湖樓觀. 宏闊壯麗者固多矣. 若以余所歷覽者而擬之於其倫. 則淸風之寒碧樓. 春川之昭陽亭. 當是伯仲之間. 至如洪川之泛波亭. 卑而野. 風斯下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