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설악기(遊雪嶽記)
내재(耐齋) 홍태유(洪泰猷)
인제현으로부터 동북쪽으로 30리 가서 삼차령에 도착했다. 고개를 넘어가니 바로 골짜기가 매우 깊다. 양쪽 산은 벼랑처럼 서 있고 나무는 빽빽하고 숲은 울창했다. 아래서 하늘을 보니 겨우 베 한 …
|
|
▪ 유설악록(遊雪嶽錄)
칠암(七巖) 김몽화3)(金夢華)
정미년(1787) 강원도 관찰사 김재찬, 인제군수 오원모.
설악산은 양양과 인제 경계에 있고 뛰어난 우리나라의 명산이다. 내가 양양의 태수로 온 다음해 봄 농촌과 산촌 사이를 순시 가서 한…
|
|
▪ 신라의 석각(羅麗石刻)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사집 성대중(成士執大中: 사집은 대중의 자)이 일찍이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사설(僿說)』중에 기록된 고비(古碑)의 기록들을 내가 영남(嶺南)의 고적(古蹟)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다음…
|
|
▪ 숭엄산(崇嚴山) 성주사(聖住寺)의 고(故) 양조(兩朝)국사
마곡의 법을 이었으며 호는 무염(無染)이고 경주사람이다. 속성은 김씨이다. 무열(武烈)대왕의 9세손이다. 조부의 이름은 주천(周川)이고, 품의는 진골이었다. 벼슬은 한찬(韓粲)에 이르렀다. 고…
|
|
▪ 무염 스님 비명, 병서. 하교를 받들어 짓다. 이하 동일하다
(無染和尙碑銘 竝序 奉教撰 下同)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당나라(昭宗, 888년, 11월)가 무력으로 황소의 난을 멸망시켰다. 천자가 연호를 문덕(文德)으로 고친 해가 11…
|
|
「無染和尙碑銘」 竝序奉 敎撰下同
帝唐揃亂以武功. 乾符戊戌. 滅黃巢. 易元以文德之年. 暢月. 仲冬曰暢月 月缺之七日. 日蘸咸池時. 咸池星在紫微內垣天潢傍. 卽未時. 海東兩朝國師禪和尙. 盥浴已. 趺坐示滅. 新羅眞聖主二年十一月十七日. 國中人如喪左右目. 矧門下諸弟子乎. …
|
|
▪ 기관동산수(記關東山水)
성해응(成海應)
한계.
한계는 설악산 서쪽에 있다. 남계역에서 아래로 흘러 고원통을 지나서 한계사로 들어간다. 모랫길과 소나무 숲은 금강산의 장안동 입구와 비슷하다. 또 골짜기를 나와 시내를 따라 동쪽으로 가…
|
|
▪ 유한계록(遊寒溪錄)
옥동(玉洞) 문익성(文益成)
을해년(1575)
내가 양양 부사로 있을 때, 최도경과 배경부, 두아들려와 할과 함께 한계산를 유람하기로 하였다. 현산성(峴山城)으로부터 향현(香峴)을 넘어 한계령에서 말을 쉬게 하였다. …
|
|
▪ 동행기(東行記)
삽교(霅橋) 안석경5)(安錫儆)
기해(5월 1일)
아침 일찍 환허대사 신규가 작별 인사를 하였다. 말이 자못 정성스러웠다. 유평부(幼平賦) 한 수를 지어 먼저 주기에 나도 차운하여 화답하였다. 20리를 걸어 간성군의 청사…
|
|
▪ 설악일기(雪岳日記)
삼연(三淵) 김창흡6) (金昌翕)
8월 24일 맑음.
인제로 가려고 아침을 먹은 후 가묘(家廟) 및 큰 형님(김창집)에게 절하여 작별하였다. 둘째 형님(김창협)은 동문에서 지나면서 멀어졌다. 오후에 석곶(石串)을…
|
|
▪ 유봉정기(遊鳳頂記)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내가 금강산에서 영시암으로 돌아왔다. 둘째 아들 치가 한양에서 인사하러 들렸다. 윤화숙 또한 함께 와서 묵었다. 조석으로 우거진 정자와 훤한 누대 사이에서 노닐며 단풍의 엷고 깊음을 평하고 봉…
|
|
▪ 유풍악기(游楓嶽記)
검재(儉齋) 김유7) (金庾)
약혼한지 오래되어 응교(應敎) 李海朝가 기축년(1907. 2)봄에 양양부사로 도임하여 함께 갔다. 납폐의 약속이 오월 초였다.
나는 사사로이 서로 상례의 일(禮訟)을 논하였는데 임금을 헐뜯…
|
|
▪ 연계기정(燕薊紀程) 무자년(1828, 순조 28) 11월 5일
박사호(朴思浩)
맑음. 머물렀다.
세 사신은 징청각(澄淸閣)에서 중국에 보낼 문서를 확인하였고, 집에서 편지가 왔다.
연광정에 제일강산이라는 4자를 쓴 편액이 걸려 있는데 금릉(…
|
|
▪ 영조 22년 병인(1746) 10월 28일(경인) 지중추 부사 이재의 졸기
지중추 부사 이재(李縡)가 졸(卒)하였다. 이재의 자는 희경(熙卿)이요, 본관은 우봉(牛峯)이니, 고 상신(相臣) 이숙(李䎘)의 손자였다. 품성이 맑고 순수하며 어려서부터 문장…
|
|
▪ 영조 즉위년 갑진(1724) 12월 27일(병신) 맑음
진수당(進修堂)에서 소대하는 자리에 동지경연사 이세최(李世最) 등이 입시하여 『자치통감강목』을 진강하고, 영동(嶺東)에서 해동청(海東靑)을 바치는 폐단 등을 논의하였다
사시(巳時)에 상이 진수당(進修…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