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시문

성종실록

페이지 정보

조회 149회 작성일 2024-02-05 16:19

본문

 

○ 호조에서 낙산사의 수세전을 경상도 삼가현의 전지로 절급해 줄 것을 청하다.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낙산사(洛山寺)의 수세전(收稅田)을 청컨대 경상도(慶尙道) 삼가현(三嘉縣)의 전지 2 백 결(結)로 절급(折給) 10) 하게 하소서." 하자 그대로 따랐다.


戶曹啓洛山寺收稅田, 請以慶尙道 三嘉縣田二百結, 折給 從之.


『成宗實錄』 실록 4권, 성종 1년 3월 28일 丁未




○ 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대왕대비와 함께 숭문당에 나아가니 한명회 등이 들어와서 정사를 아뢰다.


대왕 대비(大王大妃)와 임금이 같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니, 원상(院相) 한명회(韓 明澮)·도승지(都承旨) 정효상(鄭孝常)·우승지(右承旨) 이숭원(李崇元)이 들어와서 정사(政事)를 아뢰었다. 대비가 한명회에게 전지(傳旨) 11) 하였다.

“정승(政丞)이 다시 원장(圓杖) 을 사용하도록 청하였다는데, 무슨 뜻인가?"하니 한명회가 대답하기를, 

“지금 도적(盜賊)이 성행(盛行)하는데, 심지어 경성(京城)에서는 명화 강도(明火强 盜) 12) 까지 있습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 중한 형벌을 쓰지 않으면 이들을 그치게 하기 가어렵겠습니다. 신이 듣건대 지난번에 원장(圓杖)을 사용하니 도적들이 서로 경계하기를, ‘우리들이 차라리 상인이 될지언정, 조심하여 도둑질하지 말자.’고 하였다 합니다. 원장 (圓杖)을 혁파한 뒤부터 도적들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옛날 명(明)나라 고 황제(高皇 帝)139) 가 법을 세울 때 비록 너그러웠다고 하나, 당시 바늘 하나를 도둑질한 자도 모두 사형에 처하였기 때문에 길거리에 떨어진 물건을 사람들이 줍지 않았다고 하니, 지금 중한 형벌을 쓰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자 대비가 말하기를, 

“원장(圓杖)은 사람을 상(傷)하게 하는 수가 매우 많으니, 금후로는 도둑질한 정범자 (正犯者) 이외에는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하였다. 

대비가 또 전지(傳旨)하기를, 

“낙산사(洛山寺)를 영선(營繕) 13) 한 공력(功力)이 많았는데, 화재(火災)가 있을까 두렵다. 절에 가는 자들은 모름지기 새 길을 거쳐야 하는데, 옛 길은 절에 가는 자들이 밥을 지어 먹다가 불이 절에 번질까 두렵다."하니 한명회가 말하기를, 

“강원도의 새 관찰사(觀察使)가 갈 때 유시(諭示)하여 보내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하자 대비가 정효상에게 이르기를, 

“경은 모름지기 배사(拜辭)하는 날 잊지 말고 이를 말하라."하였다. 이숭원이 아뢰기를, 

“무릇 도적으로서 도망 중에 있는 자들을 반드시 여러 도에 이문(移文)하여 이를 체포하게 하였는데, 지금 한 고을에서도 체포하여 아뢰지 아니하니 필시 수령(守令)들이 마음을 쓰지 않는 소치(所致)일 것입니다. 금후로는 여러 도로 하여금 월말에 도적들을 포획(捕獲)하였는지의 여부를 기록하여 아뢰게 하소서."하니 전지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하였다.



大王大妃及上同御崇文堂, 院相韓明澮、都承旨鄭孝常、右承旨李崇元入啓事. 大妃傳于明澮曰, 政丞請復用圓杖, 何意耶? 明澮對曰, 今盜賊盛行, 至於京城, 有明火强盜. 當此之時, 不用重典, 難以弭之. 臣聞曩用圓杖, 盜賊相戒曰, 我輩寧爲商賈, 愼勿爲盜. 自革圓杖, 盜賊尤熾. 昔大明 高皇帝立法雖寬, 當時盜一針者, 皆處死, 故路不拾遺. 今莫如用重典. 大妃曰, 圓杖, 傷人甚多. 今後盜賊正犯者外, 勿濫用. 又傳曰, 洛山寺營繕功重,恐有火災. 行者須由 新路, 舊路距寺甚邇, 行者炊飯, 恐火延於寺. 明澮曰, 江原道新觀察使去時, 諭送爲便. 大妃謂鄭孝常曰, 卿須勿忘, 拜辭日言之. 崇元啓曰, 凡盜賊在逃者, 必移文諸道捕之, 今無一邑 捕啓, 必是守令不用心所致. 今後令諸道, 月季錄捕獲與否, 以啓. 傳曰, 卿言是.


『成宗實錄』 9권, 성종 2년 2월 8일 辛亥




○ 1478년 명 성화(成化) 14년 안관후가 강원도 영동의 군현에 읍성을 쌓기를 청하다.


경연에 나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대사간(大司諫) 안관후(安寬厚)가 아뢰기를, 

“강원도영동(嶺東)509) 의 군현(郡縣)에 읍성(邑城)을 쌓지 아니한 곳이 많고, 울진(蔚珍)·평해(平海) 같은 데에는 비록 있기 는 하나 담과 다름이 없으니, 한 해 동안에 비록다 쌓지는 못할지라도 금년에 한 성을 쌓고, 명년에 한 성을 쌓으면 거의 가(可)할 듯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려움이 없지 않겠는가?"하였다.

안관후가 아뢰기를, 

“백성을 반드시 농한기에 부리면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조(兵曹)로 하여금 의논해서 아뢰게 하라."하였다.

안관후가 또 아뢰기를, 

“낙산사(洛山寺)는 예전 길은 평탄한데, 새 길은 험하므로, 다니는 사람이 매우 괴로워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옛 길은 절에서 멀고, 절 앞에 나무가 무성하고 빽빽하여서 다니는 사람이 절을 볼 수가 없으니, 청컨대 옛 길을 회복하게 하소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길이 절에서 멀다면, 다니는 사람이 그 절을 볼지라도 무엇이 해롭겠는가? 감사(監司)로 하여금 친히 살펴서 아뢰게 하라."하였다.

안관후가 또 아뢰기를, 

“낙산사 앞 20여 리(里)는 절의 중들이 남이 고기잡는 것을 금하기 때문에, 백성들이가까운 곳을 두고 먼 곳에 가서 취하니, 어찌 폐단이 없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금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하였다.

지사(知事) 홍응(洪應)이 아뢰기를, 

“이는 반드시 세조조(世祖朝) 때에 중 학열(學悅)이 금하기를 청한 것입니다."하고, 

안관후가 아뢰기를, 

“한 절을 위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이(利)를 보지 못하게 함이 옳겠습니까?"하니, 임금이 좌승지 박숙진(朴叔蓁)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감사(監司)로 하여금 금지하는지의 여부를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御經筵. 講訖, 大司諫安寬厚啓曰, 江原道嶺東郡縣多不築邑城, 如蔚珍、平海雖有之, 無異垣墻. 一歲之間雖未畢築, 今年築一城, 明年築一城, 則庶乎其可矣. 上曰, 得無難乎? 寬厚 曰, 役民必於農隙, 則可無弊矣. 上曰, 其令兵曹議啓. 寬厚又啓曰, 洛山寺舊路平易, 而新路 險阨, 行人甚苦之. 臣意以爲舊途遠於寺, 而寺前樹木茂密, 行人不得見寺宇, 請復舊路. 上曰, 若路遠於寺, 則行人雖見其寺何害? 其令監司親審以啓. 寬厚又啓曰, 洛山寺前二十餘里, 寺僧禁人漁採, 故人民捨近取遠, 其無弊乎? 上曰, 禁之不可. 知事洪應曰, 是必世祖朝僧人學悅請禁也. 寬厚曰, "爲二寺使民失利, 其可乎? 上顧謂左承旨朴叔蓁曰, 其令監司問其禁止與否以啓.


『成宗實錄』 92권, 성종 9년 5월 28일 己丑




○ 1478년 명 성화(成化) 14년 대사간 안관후가 낙산사의 옛 길을 열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


상참(常參) 14) 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대사간(大司諫) 안관후(安寬厚)가 아뢰기를, 

“신이 전날 낙산사(洛山寺)에 구로(舊路)를 열어 금표(禁標)를 치우도록 청하였었는데, 지금까지 하명(下命)을 듣지 못하였습니다."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낙산사의 금표는 1백 보(步)에 불과하고 해수(海水)는 지극히 넓은데, 하필 1백 보안에서 고기를 잡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구로(舊路)는 절에서 거리가 멀지 아니한데, 대개 양양(襄陽)을 왕래하는 사자(使者)들이 기생을 탐하여 오래 머물면서 간혹 횃불을들고 밤길을 다니다가 불을 내어 연소(延燒)될 염려도 없지 않으니, 만일 구로를 다시 연다면 내가 기생을 없애버리겠다."라고 하였다.

안관후가 말하기를, 

“기생이야 있고 없고 관계가 없으나, 양양에 기생이 있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인데, 이제 만일 기생을 없애버린다면 후세에 반드시 절을 위해서 없애었다고 할 것입니다.

옛날 제왕도 못에 설치한 통발은 금하지 아니하고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하였는데, 이제 만일 금하신다면 후세에 반드시 ‘절을 위해서 금하였다.’고 할 것입니다."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불교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런들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신자(臣子)로서 선왕 (先王) 때의 일을 다 고치고자 하는 것이 옳겠는가?"하니, 

안관후가 말하기를, 

“만일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면 고친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하고,  좌참찬(左參贊) 허종(許琮)이 아뢰기를, 

“선왕 때의 일로 헌장(憲章) 15) 에 관계되는 것은 경솔히 고칠 수 없겠지만, 이와 같은일은 마땅히 빨리 고쳐야 합니다."하였다. 

안관후가 말하기를, “만일 농사가 흉년이 되어서 백성들이 주리게 되면 반드시 해물(海物)을 취하여 먹어야 할 것인데, 어찌 백성들로 하여금 굳이 가까운 데를 버리고 먼 데에서 구하게 하겠습니까?"하였다.

임금이 좌우(左右)에게 묻기를, 

“그 금표(禁標)의 안에 민가가 얼마나 되기에 꼭 해물(海物)에 의뢰해서 살려면 창해(蒼 海)가 굉장히 넓은데 어찌 반드시 금하는 곳에서 해야 되겠는가?"하니, 도승지(都承旨) 손순효(孫舜孝)가 아뢰기를, “다른 곳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절을 위해서 금표를 설치하는 것을 의리에 옳지못하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受常參, 視事. 大司諫安寬厚啓曰, 臣前日請洛山寺開舊路, 除禁標, 至今未得聞命. 上曰, 洛 山寺禁標不過百步, 海水至廣, 何必於百步內捕魚乎? 舊路距寺不遠, 凡奉使往來襄陽者, 耽 妓留連, 或炬夜行, 不無失火延燒之慮. 若復開舊路, 予欲革妓. 寬厚曰, 妓則雖不關有無, 然 襄陽有妓, 其來尙矣, 今若革之, 後世必曰爲寺革也. 古之帝王澤梁無禁, 與民共之, 今若禁焉, 後世必曰爲寺禁也. 上曰, 予不好佛, 庸何傷? 臣子欲盡革先王之事, 可乎? 寬厚曰, 如其非道, 革之何害? 左參贊許琮啓曰, 先王之事係于憲章者, 不可輕改, 如此等事, 當速改之. 寬厚曰, 若歲凶民飢, 則必採海而食, 豈宜令民舍近而求遠? 上問左右曰, 其禁標之內, 民家 幾何? 必欲資海物而生, 蒼海至廣, 豈必於禁地乎? 都承旨孫舜孝啓曰, 非謂無他處也, 爲寺 設禁, 於義不可耳. 


『成宗實錄』 94권, 성종 9년 7월 23일 壬午




○ 1478년 명 성화(成化) 14년 관찰사에게 중들이 민전을 빼앗았는지의 여부를 조사하게 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헌납(獻納) 최반(崔潘)이 아뢰기를, 

“신 등이 전날 낙산사(洛山寺)의 옛길을 열어주시도록 두 번이나 상총(上聰)을 괴롭게하였는데, 아직까지도 윤허를 받지 못하여 결망(缺望)함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연해(沿海)의 빈민(貧民)들 가운데 해산물(海錯)에만 의뢰하여 사는 사람이 많은데, 이제 이 절을 위해서 백성들의 고기잡이를 금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생업(生業)을 잃게 하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합니다. 또 강원도는 산이 많고 밭[田]이 적은데, 듣건대 낙산동(洛山洞) 안에는 비옥한 논으로 볍씨 30여 석(碩)을 뿌릴 만한 땅이 있어 세조(世祖)께서 다 이절에 속하게 하여 승도(僧徒)들로 하여금 경작해 먹도록 하셨다고 하니, 신은 마음이아픕니다. 빌건대 본 주인에게 도로 돌려주도록 하소서.하였는데,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어떻게 하겠는가?"하니, 

지사(知事) 강희맹(姜希孟)이 대답하기를 

“선왕(先王)의 구전(舊典) 가운데 큰 것은 차마 갑자기고칠 수 없겠지만, 사소한 일들은 고쳐도 무방하겠습니다."하였다.

최반(崔潘)이 또 아뢰기를, 

“근래에 와서는 대간(臺諫)들이 드리는 말씀을 많이 청납(廳納)하지 않으시니, 신은 실망하고 있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가 언관(言官)이 된 지 오래 되지 않아서 아직 이전에 있었던 일을 몰라서 그렇지, 내가 구전(舊典)을 고친 것이 많다. 그대들이 간청하는 까닭은 이단(異端)을 물리치기 위한 것인데, 내가 만일 불교를 숭신(崇信)한다면 그대들의 말이 옳겠지만, 내가 그렇지 않으니 이것을 고치기에 무슨 어려울 것이 있겠는가? 다만 선왕 때의 일이라 하여 다 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말한 것과 같이 한다면 반드시 절(寺社)을다 없앤 뒤에라야 마음에 쾌할 것이다. 어제 안선(安璿)이 말하기를, ‘절을 어찌 다 없애지 못하며, 중(方袍)들을 어찌 다 죽이지 못하겠습니까?’라고 하였지만, 이 말을 어찌 시행할 수가 있겠는가?"하였다.

  최반(崔潘)이 아뢰기를, 

“중도 사람인데 죽인다는 것은 옳지 못하나, 이와 같이 폐단이 되는 일은 비록 대간(臺諫)의 청을 따라서 고친다 하더라도 후세에 누가 전하께서 경솔하게 구전(舊典)을 고쳤다고 하겠습니까?"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손순효(孫舜孝)가 아뢰기를, 

“중들이 민전(民田)을 빼앗아 경작하게 된 유래(由來)를, 청컨대 추문(推問)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이 어떻게 빼앗아 경작할 수가 있겠는가? 백성들이 도리어 승전(僧田)을 빼앗았다고 들은 듯하니,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실상을 조사해서 아뢰도록 하라."하였다.



御經筵. 講訖, 獻納崔潘啓曰, 臣等前日請開洛山寺舊路, 再瀆上聰, 迄未蒙允, 不勝缺望. 沿海貧民資海錯以坐[生]者多, 今爲此寺禁民漁採, 使民失業甚不可. 且江原道多山少田, 聞洛 山 洞裏有水田膏腴者, 可種三十餘碩, 世祖令盡屬此寺, 而使僧徒耕食, 臣竊痛焉. 乞令還給本主. 上顧謂左右曰, 何如? [知]事姜希孟對曰, 先王舊典, 大者不忍遽改, 小小節目改之無 妨. 潘又啓曰, 近來臺諫所言, 多不聽納, 臣竊失望. 上曰, 爾之爲言官不久, 未知已前之事, 予之改舊典亦多矣. 爾等之所以懇懇者, 爲闢異端也, 然予若崇信釋氏, 則爾言是矣, 予無是 也, 改此何難? 第以先王朝事不可盡廢故也. 若如爾等所言, 則必盡革寺社而後快於心矣. 近者安璿言, 寺社豈不可盡革? 方袍豈不可盡戮? 此言豈可行乎? 潘曰, 僧亦人也, 誅之不可, 如此弊事, 雖從臺諫之請而改之, 後世孰謂殿下輕改舊典乎? 都承旨孫舜孝曰, 僧徒奪耕民田 之由, 請推問. 上曰, 僧何奪耕之有? 似聞人民反奪僧田, 令觀察使閱實以啓.


『成宗實錄』 94권, 성종 9년 7월 24일 癸未




○ 대사간 안관후 등이 낙산사의 옛 길을 열고 해물 채취를 할 수 있도록 청하다.


경연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대사간(大司諫) 안관후(安寬厚)와 지평(持平) 이세광(李世匡)이 낙산사(洛山寺)의 구로(舊路)를 열어 해물(海物) 채취(採取)를 금하였던 것을 파할 것과, 원각사(圓覺寺)의 조라치(照剌赤)를 없앨 것을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이세광이 또 아뢰기를, 

“요즈음 대사헌(大司憲) 김유(金紐)로써 도화(圖畫)를 감독하도록 명하셨는데, 대사헌은 조정의 강기(綱紀)를 통섭(統攝)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몸소 자질구레한 일까지 나가 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어제 부중(府中)이 제좌(齊坐)717) 하였을 때 도화의 일로 김유(金紐)를 부르셨는데, 김유가 혼자 먼저 나가고 없었으니, 다만 일을 폐할 뿐만 아니라, 또한 조정의 체모(體貌)가 없게 되었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유는 본래 도화서 제조(圖畫署提調)가 되었었고, 또 들으니 그림에 재주가 있다고 하기 때문에 그 일을 감독하게 한 것이다. 도화가 비록 자질구레한 일이기는 하나, 또한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니, 가령 선왕(先王)의 어용(御容)을 고쳐서 그릴 곳이 있을 때나 중국의 사신이 와서 그림을 찾는 자가 있을 경우에 그림이 없다고 하면 되겠는가?" 하였다.

이세광이 말하기를, 

“신은 도화를 다 없애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도화는 국가의 정체(政體)에 관계가 없는일이기에 반드시 김유로 하여금 그 일을 보게 할 필요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방승지(禮房承旨)가 넉넉히 그 일을 볼 수 있을 것이니, 김유는 그 일에 관여하지 말도록 하겠다."하였다.



御經筵. 講訖, 大司諫安寬厚、持平李世匡請開洛山舊路, 罷禁採海, 除圓覺寺照剌赤, 不聽. 世匡又啓曰, 近以大司憲金紐命監圖畫, 大司憲, 朝廷綱紀無不統攝, 不可親莅細事也. 昨日 府中齊坐, 以圖畫事命召紐, 紐獨先出, 非唯廢事, 且無朝廷體貌. 上曰, 金紐本爲圖畫署提 調, 且聞工於畫, 故命監其事. 圖畫雖細事, 亦不可無, 假令先王御容, 有改畫處, 中國使臣有 求畫者, 其無畫者可乎? 世匡曰, "臣非以圖畫爲可盡廢也, 圖畫非關於國家政體, 不必金紐監其事. 上曰, 禮房承旨足以監其事, 金紐其勿與焉. 


『成宗實錄』 94권, 성종 9년 7월 27일 丙戌




○ 1478년 명 성화(成化) 14년 헌납 최반과 지평 안선이 낙산사의 옛 길을 열고 해물 채취를 허락할 것을 청하다.


경연에 나아갔다. 강하기를 마치자, 헌납(獻納) 최반(崔潘)과 지평(持平) 안선(安璿)이 낙산사(洛山寺)의 구로(舊路)를 열어 줄 것과 해물(海物) 채취(採取)를 금하였던 것을 파하여 줄 것과 금하였던 묵은 민전(民田)을 올려줄 것 등을 청하였다. 임금이 좌우를 보고 말하기를, 

“어떻게 하겠는가?"하니, 

지사(知事) 이극배(李克培)가 대답하기를, 

“신은 아직 낙산사의 일을 모르고, 노사신(盧思愼)이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마는, 선왕 (先王) 때의 일을 어찌 꼭 고쳐야 하겠습니까?"하고, 

영사(領事) 노사신이 말하기를, 

“신은 세조조(世祖朝) 때 호종(扈從)718) 하다가 보니, 그 도로가 절에서 가깝기 때문에 이를 막아버리고 새 길을 열었습니다마는, 그 새 길도 그리 멀리 돌지 않고 거기 에 묵은 민전(民田)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동(嶺東)은 땅이 대해(大海)에 접해 있는데, 백성들이 고기잡이(漁採)를 어찌 반드시 이 절 앞에서만 해야 하겠습니까? 신은 생각건대 백성들의 폐단을 제거하는 것은 작고, 선왕(先王)의 일을 고치는 것은 크니, 절대로 변경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하니, 안선(安璿)이 말하기를, “노사신의 말은 전하로 하여금 신의 말을 따르지 못하게 하려 하는 것입니다. 전(傳)에 ‘물고기를 잡아먹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澤梁無禁]’라 하였는데, 승사(僧寺)를 위하여금표(禁標)를 세우고 고기 잡는 일을 금한다는 것은 나라의 대체(大體)에 어떠하겠습니까?"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동은 땅이 대해(大海)에 접해 있어서 고기잡이를 못하는 곳이 없는데, 단지 절 앞에만 금한 것이 어찌 ‘택량무금’이란 뜻에 해(害)가 되겠는가?"하였다.

이극배가 말하기를, 

“해물(海物)을 채취하는 것이 작은 일이라도 구로(舊路)를 여는 일은 대간(臺諫)의 말을따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불가(不可)하다."하였다.

안선(安璿)이 또 아뢰기를, 

“재범(再犯)의 절도를 장물을 계산하지 않고 사형에 처하는 것은 신의 생각에 좋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차라리법도를 잃어 실수하는 것이 낫다.’고 하였듯이,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중한 것이어서 진실로 가볍게 죽일 수는 없는 일이니, 초범과 재범을 통틀어 장물이 10관에 다다르면사형에 처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령 바늘 한 개나 돈 1전을 훔쳐도 또한 재범이라 하여 죽이겠습니까? 제왕의 호생(好生)의 덕(德)에 매우 어긋나는 일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재범을 사형에 처한다는 법을 세우기는 하였으나, 살려야 할 사람은 살려주고 죽여야 될 사람은 죽이도록 할 것이니, 내가 늘 그 경중(輕重)을 짐작해서 죄를 주겠다."

하였다.

최반(崔潘)이 말하기를, 

“요즈음 도둑이 잠잠해졌는데, 만일 장물을 계산하기로 한다면, 청컨대 『대명률(大明律) 』에 따르도록 하소서."하고, 

이극배가 말하기를, 

“재범을 사형에 처하는 법은 『대전속록(大典續錄)』에 실려 있으니, 가볍게 고칠 수는 없습니다. 만일 도둑이 잠잠해졌다면 마땅히 『대명률(大明律)』에 따라야 합니다."하였다.

안선이 또 아뢰기를,

 “대저 수령 벼슬을 사람들이 다 싫어하니, 단지 임기(任期)에 준하여 서용(敍用)하지 않는 법이 영갑(令甲)722) 에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령이 된 사람이 관사에도임(到任)해서, 혹은 수개월 만에 사직하고, 혹은 수년 만에 사직하여 얼마 안 있다가경직(京職)에 제수되니, 빌건대 따로 법을 세워서 규제(規制)를 면하는 폐단을 막으소서. 또한 국가에서는 수령의 직책을 중히 여기고, 육조 낭관(六曹郞官)은 다 외직(外職) 서용에 5품까지 허락하되, 수령의 직책을 거치지 아니하면 4품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여법이 세밀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기회를 엿보아 피하는 일이 많습니다. 청컨대 이제부터는 『대전(大典)』에 의거하여 도임한 지 1년이 되어 사직한 자는 5년 동안 서용하지 않도록 하고, 나머지도 각각 도임한 연월(年月)에 따라서, 임기가 되어도 〈경직(京職) 에〉서용하지 말며, 서용할 때에는 도로 수령의 직을 제수하도록 하소서."하고, 좌승지(左承旨) 박숙진(朴叔蓁)이 말하기를, “수령으로 부임하기도 전에 사직한 자는 6년 동안 서용하지 아니하고, 부임한 지 1년이 되어 사직한 자는 5년 동안 서용하지 아니하며, 부임한 지 2년이 되어 사직한 자는 4년동안 서용하지 않는 것이 통례(通例)입니다. 『대전』에 이르기를, ‘핑계를 대는 자는 6년동안 서용하지 않는다.’ 하고, 주(註)에 이르기를, ‘제수할 때에는 외관(外官)을 제수한다.’고 되어 있어서 이 법이 통칙인데, 어찌 도임한 것을 지칭해서 경직(京職)을 제수할 수가 있겠습니까? 최사로(崔士老)가 일찍이 수령이 되어 도임한 지 2년 만에 사직하였 는데, 4년이 되도록 서용하지 않으니, 이것이 그 한 예입니다."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가령 수령 될 사람이 현능하여 쓸 만한데 실지로 병이 있으면 쓰지 않아야 하겠는가?

또 병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으니, 비록 의관(醫官)을 시켜 진찰하도록 한다고해도 그에게서 뇌물을 받고 허위를 진실이라고 할 것인데, 무엇으로 분별하겠는가?" 하였다.

노사신이 말하기를, 

“과연 대간(臺諫)의 말과 같이 근래에는 교묘하게 피하는 자가 많으니, 사직했던 사람을 서용할 때에 다시 외직(外職)을 준다면, 6년 동안 서용하지 않는 법에 구애됨이 없이 사람을 등용하는 길이 넓어질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수령으로 도임하였다가 사직하는 자는 이조(吏曹)로 하여금 경직(京職)을 제수하지 못하도록 하고, 대간 또한 마땅히 검토하고 조사해서 하도록 하라."하였다.

이극배가 아뢰기를, 

“『중용혹문(中庸或問)』을 신에게 나와서 강(講)하라고 명하셨는데, 간혹 가다가 『중용』 이 고열(考閱)하기에 편리하니, 『중용』으로써 진강(進講)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다."하였다.

이극배가 말하기를, 

“신이 어려서 이것을 읽었으나, 중년(中年)에는 정사를 다스리는 데에 이끌려서 수습(修習)하지를 못하였습니다. 또 학문을 하는 데에는 중간에 끊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소기신이 진강(進講)하는 날에만 강(講)하 로 한다면 중간에 끊게 되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되니, 경연관(經筵官)들로 하여금 돌려가며 진강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용혹문』은 경연관으로서 누가 모르기야 할까마는, 다만 한 사람에게서 학문을 받아들이고자 할 따름이다."하였다.




丁亥/御經筵. 講訖, 獻納崔潘、持平安璿請開洛山寺舊路, 罷禁採海, 給還禁陳民田. 上謂左 右曰, 何如? 知事李克培對曰, 臣未知洛山事, 盧思愼詳知之. 然先王時事, 何必改之? 領事 盧思愼曰, 臣於世祖朝, 扈從見之. 其道路近於寺, 故塞之而開新路, 然其新路不甚廻遠, 其陳荒之田亦少. 且嶺東地濱大海, 民之漁採, 豈必於此寺前乎? 臣以謂除去百姓之弊小, 更改先王之事大, 斷不可變更也. 璿曰, 思愼之言, 欲使殿下不從臣言也. 傳曰, 澤梁無禁, 爲僧寺 而立標禁漁, 於國體何如? 上曰, 嶺東地濱大海, 無處而不漁, 只禁寺前, 豈害於澤梁無禁之義乎? 克培曰, "採海細事, 開舊路, 則從臺諫之言何如? 上曰, 不可. 璿又啓曰, 再犯竊盜, 不計贓而處死, 臣意謂未便. 書曰, 與其殺不辜, 寧失不經. 人命至重, 固不可輕殺, 通初再犯贓, 滿十貫而處死爲便. 假令竊一針, 偸一錢, 亦以再犯而殺之乎? 甚乖帝王好生之德. 上曰, 雖立再犯處死之法, 可以生則生, 可以殺則殺, 予每酌其輕重而罪之. 潘曰, 邇來盜賊寢息, 若計贓, 則請依大明律. 克培曰, 再犯處死之法, 載在大典續錄, 不可輕改. 若盜賊寢息, 則當依大明律. 璿又啓曰, 大抵守令, 人皆厭之, 只緣准期不敍之法, 着在令甲. 故爲守令者, 到官或數月而辭, 或數年而辭, 未幾授京職, 乞別立法, 以防規免之弊. 且國家重守令之職, 六曹郞官皆許外敍五品, 而未經守令者, 不得陞四品, 法非不密, 而率多窺避. 請自今依大典, 到 任一年而辭, 則准五年不敍, 餘各依到任年月准期不敍, 敍時還除守令." 左承旨朴叔蓁曰, 守令未赴任而辭者, 六年不敍, 赴任一年而辭者, 五年不敍, 赴任二年而辭者, 四年不敍例也. 大典云, 托故者六年不敍. 註云, ‘除授時, 復除外官. 此法可謂通矣, 何可指謂到任而授京職 乎? 崔士老嘗爲守令, 到任二年而辭, 准四年不敍, 此其一也. 上曰, 假令爲守令者, 賢可使 而實病, 則其可不用乎? 且病之眞僞未可知也, 雖使醫官診候, 受彼賄賂以虛爲實, 何以辨 之? 思愼曰, 果如臺諫之言, 近來巧避者多, 辭職者敍用之時, 復授外職, 則不拘於六年不敍 之法, 而用人之道廣矣. 上曰, 守令到任辭職者, 令吏曹勿授京職, 臺諫亦當檢覈. 克培啓曰, 中庸或問, 命臣進講, 間或中庸便於考閱, 以此進講, 何如? 上曰, 可. 克培曰, 臣幼而讀之, 中年牽於治事, 不能修習. 且爲學不可間斷, 只講於小臣進講之日, 則慮有間斷之弊, 令經筵 官輪次進講何如? 上曰, 中庸或問, 經筵官誰不知之? 但欲受學於一人耳.


『成宗實錄』 94권, 성종 9년 7월 28일 丁亥




○ 중 학열에게 침탈된 민전을 주인에게 돌리고 인하여 사전을 침탈하면 처벌케 하다.


전교(傳敎)하기를, 

“산산(蒜山)의 제방(堤防)과 방축(防縮) 안에 있는 민전(民田)을 침탈(侵奪)한 것을 그주인에게 되돌려 주고자 한 지 오래 되었다. 그러나 선왕(先王)께서 하사(下賜)한 바이고, 또 한 번 준 뒤에 백성이 혹 사전(寺田)을 침점(侵占)할까 걱정이 된다. 그래서 아직 그렇게 못했던 것이다. 금년(今年)에는 이미 종자를 심었으니 명년(明年)부터 민전을돌려주게 하라. 만일 이로 인하여 사전을 침탈하는 자가 있으면 승려(僧侶)의 장고(狀 告) 16) 를 들어서 죄(罪)를 살펴서 처리할 것이다."하였다.

 사신이 논하기를, “학열(學悅)이 낙산사(洛山寺)에 살면서 나쁜 짓을 마음대로 하여 거리낌이 없이 산산 제방의 민전(民田)을 강탈(强奪)하였으나 감히 누구냐고도 하지 못하다가, 백성 가운데 원통함을 호소하는 자가 있으므로, 임금이 관원을 보내어 조사해 물어서 사전과 민전을 구별하여 아뢰게 하여 이에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학열은 교활하고 기세(氣勢)가 있어서 청탁(請託)을 번갈아 행하였으므로, 마침내 민전을주지 아니하였다." 하였다.



傳曰蒜山堤堰內 侵奪民田欲還其主久矣. 然先王所賜 且恐一與之後 民或侵占寺田 故未果耳. 今年則業已付種 其自明年還給民田. 如有因此侵奪寺田者, 聽僧狀告科罪. 史臣曰學悅居洛山寺縱惡無顧忌 强奪蒜山堤傍民田 莫敢誰何 民有訴冤者 上遣官案問 別 寺田、民田以聞 乃有是命. 然學悅 奸黠有氣勢 請託交行 竟不與民田


『成宗實錄』 105권, 성종 10년 6월 14일 己亥




○ 1480년 명 성화(成化) 16년 장령 이인석이 낙산사에 노비를 영세에 전하는 전교를고치도록 아뢰다.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이인석(李仁錫)이 와서 아뢰기 를,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 특별히 낙산사(洛山寺)에 노비(奴婢)를 주었으나, 영구히 전하라는 명령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 바야흐로 자손(子孫)을 추쇄(推刷) 17) 하려고 하는데, 전하께서 비로소 영세(永世)에 전하라고 명령하시었으니 불가합니다. 또 어유소 등은 끝까지 추문하여 사람들의 의심이 풀리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였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司憲府掌令李仁錫來啓曰, 世祖大王, 特給洛山寺奴婢, 而無永傳之命, 故今方推刷子枝, 而殿下始命傳于永世不可. 且魚有沼等, 不可不窮推, 以釋人疑也. 皆不聽.


『成宗實錄』 120권, 성종 11년 8월 6일 癸丑




○ 1480년 명 성화(成化) 16년 집의 이덕숭 등이 중국 사신의 폐해를 부추킨 통사와 그족친을 국문하도록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집의(執義) 이덕숭(李德崇)·헌납(獻納) 김성경(金成慶)이 아뢰기를, 

“사신이 오는 것은 한 번이 아닌데, 본국에 폐해를 끼친 것은 금년이 더욱 심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모두 통사(通事)에게서 연유합니다. 심지어 호조(戶曹)의 방목(榜目)까지두목(頭目)에게 가리켜 보여 무릇 우리 나라에서 숨기 는 것을 누설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죄가 이보다 더 클 수 없습니다. 청컨대 이를 다스리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또한 사신의 족친에게도 죄가 있다."

하였다.

이덕숭 등이 말하기를, 

“족친이 몰래 사신에게 청탁하여 스스로 전민(田民)을 점거(占據)하였으니, 참으로 죄가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주선하여 그 욕망을 달성한 것은 통사입니다. 지금 그들을 다스리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後患)이 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먼저 족친을 추궁하면 통사의 죄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하였다.

이덕숭이 말하기를, 

“경기(京畿) 백성이 사신의 행차로 인하여 곤란과 고생이 막심하였으니, 청컨대 요역(徭役) 18) 을 정지하여 백성의 힘을 넉넉하게 하고, 또 금년 경기에서 점마(點馬) 19) 하는 것을 정지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이덕숭·김성경이 또 아뢰기를, 

“낙산사의 노비를 영세토록 전하라고 명하신 것은 적당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그 자손 (子孫)을 본도의 여러 고을에 나누어 소속하게 하소서."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덕숭이 아뢰기를, 

“낙산사의 중은 한 도의 큰 해가 되는데, 백성들이 해산물을 채취하는 것을 금하니, 백성이 더욱 괴롭게 여깁니다. 미역[海菜] 종류는 오히려 괜찮지만, 심지어 사람들이 고기잡는 것까지 금하고, 그 노비로 하여금 이익을 독차지하게 하여서 이리 저리 판매하여 치부(致富)합니다. 각 고을에서 불시에 진상할 것이 있으면 도리어 중에게 의뢰하기 때문에, 중들은 사치하고 방자하여지며 백성은 날로 가난하여지고 군읍(郡邑)은 날로 쇠잔하여지는데, 지금 또 그 노비를 영구히 전하게 되면 더욱 옳지 못합니다."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영사(領事) 홍응(洪應)이 말하기를, 

“신이 선위사(宣慰使)로 벽제역(碧蹄驛)에 가서 보았는데, 한사옹(漢司饔)이 두목(頭目) 과 결탁하여 폐단을 만들므로 여러 고을이 견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반송사(伴送使)가 금하지 못하는가? 만일 폐해가 있다면 보내지 말아야 한다."하였다.

홍응이 말하기를, 

“중국 사신이 벽제역을 지나가게 되면 하루의 지공(支供) 20) 에 불과한데, 경기의 수령으로 와서 모인 자가 10여 명이나 되니,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황해도(黃海道) 이북 여러 고을의 여러 참(站)에는 두 고을이 조치하고 준비하더라도 부족하지 않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매우 옳다. 내가 마땅히 자세히 정(定)하겠다."하였다.

이덕숭·김성경이 또 아뢰기를, 

“방산수 이난(李瀾)이 처음에는 어유소·노공필·김세적·김칭·김휘·정숙지가 어을우동을 간통하였다고 말하였는데, 지금은 말을 바꾸어 숨기 니, 청컨대 끝까지 추궁하여 진실을 알아내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방산수가 제 죄를 가볍게 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무고(誣告)하여 끌어댄 것이 많으니, 어찌 반드시 다시 묻겠는가?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옳다."하였다.

김성경이 말하기를, “난(瀾)이 죄가 큰데 다만 고령(高靈)에 귀양 보냈으니, 멀리 귀양 보내기 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御經筵. 講訖, 執義李德崇、獻納金成慶啓曰, 使臣之來非一, 而貽弊本國, 今年尤甚. 所以致此者, 皆由於通事. 至以戶曹榜目, 指示頭目, 凡我國所諱, 無不洩之, 罪莫大焉. 請治之. 上曰, 可. 且使臣族親, 亦有罪矣. 德崇等曰, 族親潛囑使臣, 自占田民, 城[誠]有罪也. 然周 旋其間, 道達其欲者, 通事也. 今不治之, 必爲後患. 上曰, 先推族親, 則通事之罪, 自露矣. 德崇曰, 畿甸之民, 因使臣之行, 困苦莫甚, 請停徭役, 以寬其力. 且停今年京畿點馬. 上皆從 之. 德崇、成慶又啓曰, 洛山寺奴婢, 命傳永世不便. 請以其子枝, 分屬本道諸邑. 不聽. 德崇又啓曰, 洛山寺僧, 爲一道巨害, 禁民採海, 民尤苦之. 海菜之類, 猶可也, 至於禁人捕魚, 使其奴婢, 專擅其利, 轉販致富. 各官有不時之獻, 則反資於僧, 故僧徒侈肆, 民生日貧, 郡邑日殘, 今又永傳其奴婢, 尤爲不可也. 不聽. 領事洪應曰, 臣以宣慰使, 到碧蹄驛, 見漢司饔者, 與頭目, 交結作弊, 諸邑不能堪也. 上曰, 伴送使, 其不能禁之耶? 若有弊, 則當勿遣. 應曰, 天使過碧蹄, 不過一日支供, 而京畿守令來會者, 至十餘人, 其弊不貲. 黃海以北諸邑諸 站, 則二邑措辦, 不爲不足. 上曰, 卿言甚善. 予當詳定之. 德崇、成慶又啓曰, 方山守瀾, 初 言魚有沼、盧公弼、金世勣、金偁、金暉、鄭叔墀, 奸於乙宇同, 今乃變辭諱之, 請窮推得情. 上曰, 方山守, 欲輕其罪, 故多誣引, 何必更問? 置之可也. 成慶曰, 瀾罪大, 而只流于高靈, 請遠竄. 上曰, 可.


『成宗實錄』 120권, 성종 11년 8월 9일 丙辰




○ 대사헌 정괄 등이 낙산사의 노비를 영구히 전하라는 성명을 거두어 달라는 차자를 올리다.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정괄(鄭佸) 등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신 등은 생각건대, 노비를 대대로 전하는 법이 예전에는 없던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자(箕子)가 봉(封)함을 받은 이래 비로소 노비가 있어 대대로 전하였으니, 존비(尊卑) 를 밝히고 귀천(貴賤)을 분변하고 예속(禮俗)을 이루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고려(高 麗) 말년에 이르러 널리 사사(寺社)를 세우고, 인하여 토지(土地)·노비[臧獲]를 주었으니, 사사(寺社)에 노비가 있게 된 것은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태종 대왕(太宗大王) 께서 토지를 거두어 군수(軍需)에 보충하고 노비를 호적에 올려 공천(公賤) 21) 에 소속시켰으니, 참으로 만세에 큰 다행입니다. 여러 성인이 서로 이어 오늘에 이르렀고, 전하는천성이 총명하고 성학(聖學)이 고매하시니, 온 나라의 백성이 모두 이단(異端)에 미혹하시지 않는 것을 압니다. 지난번에 듣건대, 낙산사(洛山寺)의 노비 사패(賜牌) 22) 에 영세토록 전하라는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추쇄도감(推刷都監)이 노비의 자손(子孫)을 공천(公賤)에 소속시킬 것을 청하자, 성상께서는 옳다고 하시면서 그 절의 중의 호소로 인하여 특별히 영세토록 전하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하는데, 세조(世祖)께서 처음에 노비를 낙산사에 소속시키면서 사패(賜牌)에 영구히 전하라는 말씀이 없었던 것은 반드시까닭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째서 허가 한 일의 한 먹이 마르기도 전에 갑자기중들의 말로 인하여 임금님의 결단을 고치십니까? 선왕(先王)께서 주신 것이 만일 도리가 아니라면 고쳐도 옳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사패(賜牌)에 영구히 전하라는 말이 없는데, 영구히 전하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특별히 임금님이 결단을 내리시어 급히 내려진 명을 거두소서."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司憲府大司憲鄭佸等上箚子曰, 臣等竊謂, 奴婢世傳之法, 古昔所無, 吾東方, 自箕子受封以 來, 始有奴婢以世傳焉, 無非所以明尊卑、辨貴賤、成禮俗也. 至于麗季, 廣建寺社, 仍賜土田、臧獲, 寺社之有奴婢, 始於此矣. 惟我太宗大王, 收土田, 以補軍需. 籍臧獲, 以屬公賤, 誠萬世一大幸也. 聖聖相承, 至于今日, 殿下天性聰明, 聖學時敏, 一國臣民, 皆知不惑於異 端也. 頃聞洛山寺奴婢賜牌, 無可傳永世之語, 故推刷都監, 請以子枝屬公, 上可之, 因其寺 僧之訴, 特許永傳, 世祖初, 以奴婢屬于洛山寺, 而賜牌, 無永傳之語, 必有以也. 柰[奈]何判下之墨未乾, 遽以僧人之言, 改其成命乎? 先王之賜, 如其非道, 雖改之, 未爲不可. 況賜牌, 無永傳之語, 而使之永傳可乎? 特垂睿斷, 亟收成命.


『成宗實錄』 120권, 성종 11년 8월 10일 丁巳




○ 1480년 명 성화(成化) 16년 장령 이인석 등이 낙산사의 노비를 영구히 전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음을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장령(掌令) 이인석(李仁錫)·헌납(獻納) 김성경(金成慶)이 아뢰기를, 

“낙산사(洛山寺)의 노비를 영구히 전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천천히 처리하겠다."하였다.


御經筵. 講訖, 掌令李仁錫、獻納金成慶啓曰, 洛山寺奴婢, 不宜永傳. 上曰, 徐當有以處之.


『成宗實錄』120권, 성종 11년 8월 24일 辛未




○ 1480년 명 성화(成化) 16년 집의 이덕숭 등이 낙산사의 노비를 영구히 전하지 말 것등을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집의(執義) 이덕숭(李德崇)·정언(正言) 유찬(劉瓚)이 아뢰기를, 

“낙산사(洛山寺)의 노비를 자손(子孫)까지 아울러 영구히 전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20년이 되어야 바야흐로 정안(正案) 23) 을 만드는데, 만일 이미 적(籍)을 이루었다면 고치기 어려울 듯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알겠다."하였다.


御經筵. 講訖, 執義李德崇、正言劉瓚啓曰, 洛山寺奴婢, 不可幷子枝永傳也. 二十年方成正案, 若已成籍, 則恐難更改. 上曰, 知道.


『成宗實錄』 120권, 성종 11년 8월 26일 癸酉




○ 1483년 명 성화(成化) 19년 손순효가 중으로 궁궐을 짓고 도첩을 주는 것의 폐단을말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대사헌(大司憲) 손순효(孫舜孝)가 아뢰기 를, 

“신이 듣건대, 궁궐을 수리하는데 승도(僧徒) 2천 명을 부역시키고 한 달이 되면 도첩 (度牒)을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조(先朝) 때에는 유점사(楡岾寺)와 낙산사(洛山寺) 두절을 수선하고 건축하는데 도승(度僧) 24) 이 6만 명이나 되었으므로 군액(軍額)이 크게줄어들었습니다. 전하께서 불도(佛道)를 믿지 않으시고 일반인이 중이 되는 것을 금지 하므로 환속(還俗)하는 자가 날로 많기 때문에 군액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오늘날 도승 (度僧) 2천 명을 명하셨는데, 이는 국가에서 정병(精兵) 2천 명을 잃는 것이 됩니다. 비록 도승이 아니라도 수군(水軍)·정병(正兵)·팽배(彭排)·대졸(隊卒) 중에서 부역에 나갈 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니, 청컨대 승도(僧徒)들을 부역시키지 마소서."하자, 

임금이 좌우에게 하문하였다. 영사(領事) 윤필상(尹弼商)이 대답하기를, 

“궁궐의 수리(修理)는 급하게 하지 않을 수 없고 공역(工役)은 중대(重大)하니, 승군(僧 軍)을 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기(天氣)가 장차 추워지려 하기에 널리 역졸(役卒)들을 모아 그로써 그 공역을 마치고자 한다. 지금 비록 도승이라 하더라도 일찍이 군적(軍籍)에 매였던 자는 와서 부역하지 못할 것이다."하였다.

손순효(孫舜孝)가 말하기를, 

“만일 부득이하다면 일찍이 도첩을 받은 자로 나이 50세가 안된 자들은 모두 샅샅이

뒤져 찾아내어 부역하도록 하고, 한 달이 차거든 선사(禪師) 또는 대선사(大禪師)의 직첩(職牒)을 주도록 하소서. 그렇게 한다면 중은 더 많아지지 않을 것이고 군액(軍額)도

감손(減損)되지 않을 것입니다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근일(近日)에 방리(坊里)의 사람을 써서 공역(工役)에 조역(助役)시킨다면 자못 도움이되겠다. 그리고 승군(僧軍)은 쓰지 않을 수 없다."하였다.



御經筵. 講訖, 大司憲孫舜孝啓曰, 臣聞修理宮闕, 以僧徒二千赴役, 准一朔, 給度牒. 在先 朝, 修營楡岾、洛山兩寺, 度僧六萬, 而軍額太減. 殿下不信佛道, 禁人爲僧, 還俗者日多, 故軍額稍敷. 今命度僧二千, 是國家失精兵二千也. 雖不度僧, 水軍、正兵、彭排、隊卒赴役者, 不爲小矣. 請勿役僧徒. 上問左右, 領事尹弼商對曰, 宮闕修理, 不可不急, 工役重大, 僧軍不可不役也. 上曰, 天氣將寒, 欲廣聚役卒, 以畢其功. 今雖度僧, 曾係軍籍者, 固不得來赴矣. 舜孝曰, 如不得已, 其曾受度牒, 而年未五十者, 竝令刷出赴役, 滿一朔, 則以給禪師、大禪 師職牒. 如是, 則僧不加多, 而無損於軍額矣. 上曰, 近日用坊里人, 助役於功役, 頗有利. 僧 軍不可不用也. 


『成宗實錄』157권, 성종 14년 8월 21일 辛巳




○ 1489년 명 홍치(弘治) 2년 강원도 관찰사 이육이 통전의 세금을 양양부에서 받도록해 주기를 청하다.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이육(李陸)이 아뢰기를, 

“2월 24일에 산불이 나서 양양부(襄陽府) 주민 2백 5호와 낙산사(落山寺) 관음전(觀音 殿)이 연소(連燒)되고, 간성 향교(杆城鄕校)와 주민 2백여 호가 일시에 모두 탔는데 오직 사람과 가축은 상하지 아니하였고 민간에 저장한 곡식이 모두 재가 되었으니, 청컨대 통천(通川)의 전세(田稅)를 옮겨 받아서 주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그대로 따랐다.


江原道觀察使李陸啓, 二月二十四日, 本道山火, 連燒襄陽府居民二百五戶、洛山寺 觀音 殿、杆城鄕校及居民一百二十四戶, 一時皆燒. 唯人畜不傷, 而閭閻所儲之穀, 盡爲灰燼. 請 移納通川田稅以給. 從之.


『成宗實錄』 226권, 성종 20년 3월 14일 壬申




○ 1492년 명 홍치(弘治) 5년 헌납 정탁 등이 중을 뽑는 시험에 예조의 낭청을 보내지말 것 등을 청하다.


경연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헌납(獻納) 정탁(鄭鐸)이 아뢰기를, 

“중을 선발하는 법은 마땅히 혁파해야 할 것이나, 만약 갑자기 혁파하지 못한다면, 청컨대 예조 낭청(禮曹郞廳)을 보내어 선발을 감시하는 것은 그만두게 하소서."하니, 

시독관(侍讀官) 강겸(姜謙)이 말하기를, 

“『대전(大典)』에 구애되어 도숭(度僧)의 법을 고치지 않으시니, 지금 이때를 잃고 고치지 않으면, 어느때에 고칠 수 있겠습니까?"하고, 

집의(執義) 이예견(李禮堅)은 아뢰기를, 

“예조의 낭청(郞廳)이 석서(釋書)를 모르니, 비록 시험을 감시하게 한다 하더라도 무슨보탬이 되겠습니까? 또 비록 정선(精選)하게 한들, 국가에 무슨 도움 됨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좌우에 물었다. 영사(領事) 윤필상(尹弼商)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중을 선발하는 것은 이미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입니다. 또 주지(住持)로 하여금 사찰(寺刹)을 지키게 한다면 시험 선발하여 맡기 지 않을 수 없고, 시험해 취할 것 같으면 반드시 외람(猥濫)된 폐단이 있을 것이니, 낭관(郞官)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에 그 집을 불사르고 사람도 불살라 버린다면 그만이겠으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예관(禮官)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조익정(趙益貞)이 말하기를, 

“조종조에서는 내직 별감(內直別監)을 보내어 그 시험해 취하는 것을 감시하게 하였는데, 예조 낭관을 보낸 것이 어느 때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중이 되는 자가 많기 때문에 국가의 군액(軍額)이 날로 줄어드니,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하니, 

윤필상이 말하기를, 

“내직 별감을 보내어 시취(試取)하게 하면 외람된 폐단이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여 예조의 관원을 보낼 뿐입니다."하였다.

강겸이 말하기를, 

“강원도(江原道)는 인민이 희소한데, 금강산(金剛山)과 오대산(五臺山)에는 사찰(寺刹)이대단히 많고, 여기에 살고 있는 중의 무리가 몇이나 되는지도 모르는 형편이니, 만약이들로 충군한다면 어찌 유익하지 않겠습니까?"하자, 조익정은 말하기를, “강원도는 인민이 영세(零細)하여 겨우 1만 2천여 호이며, 한 도(道)의 백성을 다하여도다른 도의 한 거읍(巨邑)을 당하지 못하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중이 되는 자가 많기 때문입니다."하였다.

강겸은 말하기를, 

“강원도는 군수(軍需) 물자가 지극히 적으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낙산사(洛山 寺)와 유점사(楡岾寺) 등의 사찰에다가 국가에서 식염(食鹽)을 주고 있는데 그 수효가매우 많습니다. 이것으로 곡식을 사서 군수 물자를 보충한다면 어찌 풍족하게 쓰지 않

겠습니까? 또 낙산사는 사염분(私鹽盆) 25) 도 또한 많으니 관에서 줄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조익정이 말하기를, 

“진실로 강겸이 아뢴 바와 같습니다. 낙산사 등의 사찰에 줄 소금을 곡식으로 바꾸어서 군수 물자에 보충하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종조로부터 주어 온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이제 갑자기 혁파할 수는 없다." 하였다.

이예견이 말하기를, 

“중이 되는 자가 단지 사조(四祖) 26) 만을 써서 양종(兩宗)에 바치는데, 이로 말미암아위조하는 사례가 많으니, 모름지기 본관(本官)의 정역(定役)이 없다는 공문을 받게 한뒤에 비로소 도첩(度牒)을 주면, 중이 되려는 자가 반드시 많지 않을 것입니다. 또 중의무리가 비록 위첩(僞牒)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수령이 어찌 알겠습니까? 예조로 하여금유점사(楡岾寺)의 수리 도감 도첩(修理都監度牒)을 내어준 연월(年月)을 상고하여 각도(各道)에 이첩(移牒)하게 하면 그 진위(眞僞)를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또 관차(官差)가 비록 절에 올라가지는 못하지만, 중들이 반드시 산에서 내려올때가 있을 것이니, 그때 추쇄하면 도첩 없는 중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강겸이 말하기를, 

“대저 강원도의 각 고을에서는 대구어(大口魚)가 생산되지 않고 오직 간성(杆城)한 고을 에서만 나기 때문에 여러 고을에서 스스로 준비할 수 없어 모두 무역하여 바치고 있습니다. 청컨대 그곳에서 생산되는 물건으로 공물(貢物)을 정하게 하소서."하니

조익정이 말하기를, 

“본래 생산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산되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고성(高城)·간성·통천(通川) 등의 고을에서는 영안도(永安道)에서 무역해 오고, 평해(平海)·강릉(江陵)·울진(蔚珍) 등의 고을에서는 서울에서 무역을 하여 바칩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모든 도(道)에 물어서 공물을 정하지 않았던가? 자라[魭魚]도 안변(安邊)에서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또한 감(減)하였다. 생산되고 생산되지 않는 것을 다시 상고하도록 하라."하였다.



御經筵. 講訖, 獻納鄭繹啓曰, 選僧之法, 在所當革, 若不遽革, 請勿遣禮曹郞廳監選. 侍讀官 姜謙曰, 拘大典, 不改度僧之法, 失今不改, 則何時可改乎? 執義李禮堅啓曰, 禮曹郞廳, 不 知釋書, 雖使監試何益? 且雖使精選, 亦何補國家乎? 上問左右. 領事尹弼商對曰, 選僧旣是 祖宗故事, 且以住持守刹, 則不可不試取而任之, 若試取, 則必有猥濫之弊, 不可不遣郞官也. 上曰, 若火其廬, 人其人則已矣, 不然, 禮官不可不遣也. 特進官趙益貞曰, 祖宗朝遣內直別監試取. 其遣禮曹郞官, 未知始自何時. 大抵爲僧者多, 故國家軍額日減, 誠非細故也. 弼商 曰, 內直別監試取, 有猥濫之弊, 不得已遣禮官耳. 謙曰, 江原道人物鮮少, 而有如金剛山、[五]臺山, 寺刹甚多, 所居僧徒, 不知其幾, 若以此充軍, 豈不有益乎? 益貞曰, 江原道人物淍殘, 僅一萬二千餘戶, 擧一道之民, 不敵他道一巨邑. 此無他, 爲僧者多故也. 謙曰, 江原道軍需至少, 不可不慮也. 洛山、楡岾等寺, 國家給食鹽, 其數甚多, 以此貿穀補軍需, 豈不足用?

且洛山寺私鹽盆亦多, 不須官給也. 益貞曰, 誠如謙所啓, 以應給洛山等寺之鹽, 貿穀以裨軍需可也. 上曰, 自祖宗朝給之已久, 今不可遽革." 禮堅曰, 爲僧者, 但書四祖呈兩宗, 由是多僞, 須令受本官無役公文, 方給度牒, 則爲僧者必不多矣. 且僧徒雖持僞牒, 守令何以知之?

其令禮曹考楡岾修理都監度牒成給年月, 移于諸道, 則可辨其眞僞矣. 上曰, 可. 且官差雖不 得上寺, 然僧徒必有下山之時, 此時推刷, 則無牒之僧可得矣. 謙曰, 大抵江原諸邑, 不産大 口魚, 惟杆城一邑獨産, 故諸邑不能自備, 皆貿易以進, 請以所産之物定貢. 益貞曰, 本非不産也, 産不多也, 故高城、杆城、通川等官, 貿於永安道, 平海、江陵、蔚珍等官, 貿於京中. 上曰, 無乃已問於諸道而定貢乎? 魭魚不産於安邊, 故亦減之矣. 其更考産、不産.


『成宗實錄』 261권, 성종 23년 1월 17일 戊子

 

--------------

10) 절급(折給), 관에서 토지나 조세 따위를 몫에 따라 나누어주던 일.

11) 전지(傳旨), 상과 벌에 관한 임금의 뜻을 해당 관청이나 관리에게 전하여 알리는 일을 이르던 말.

12) 명화강도(明火强盜), 밤중에 흉기(凶器)나 등불을 가지고 남의 집에 들어가서 물건을 빼앗는 강도를 이름.

13) 영선(營繕), 건축물을 짓거나 수리함.

14) 상참(常參), 중신들이 매일 편전에서 임금에게 국무를 아뢰는 일을 이르던 말.

15) 헌장(憲章), 어떠한 사실에 대하여 이상으로서 규정한 원칙을 선언한 규범.

16) 장고(狀告), 어떤 사실을 상부 관아에 서면으로 알리거나 그 내용을 적은 글.

17) 추쇄(推刷), 도망한 국역부담자나 노비 등을 찾아서 본거지로 되돌리는 일.

18) 요역(徭役), 국가의 필요에 따라 민의 노동력을 대가없이 정기·부정기적으로 징발하는 세의 한 항목이다. 요역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개별 민호에 부과되며, 소유토지의 많고 적음이 수취기준이 되었다. 요역은 공역과 일반 요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공역은 공납품의 채취·제작·수송 등에 충당된 노동력의 수취로 요역 중 가장 큰 부담이었다. 일반 요역은 궁원·사찰·관아의 건축과 수리, 성이나 도로의 구축, 제방의 개수등 토목공사에 동원되는 것을 말한다.

19) 점마(點馬), 예전에, 말을 점고하는 일을 이르던 말.

20) 지공(支供), 음식 따위를 대접하며 받듦.

21) 공천(公賤), 조선 시대, 관부에 속한 남자 종과 여자 종을 이름.

22) 사패(賜牌), 고려와 조선 시대, 임금이 왕족이나 공신에게 토지나 노비를 하사할 때, 그것의 소유에 관련된사항을 규정하여 내려 주던 일.

23) 정안(正案), 조선 시대, 관아에서 부리던 종의 등록 원부.

24) 도승(度僧), 불보살이나 선지식의 설법 을 듣고 수행한 결과 깨달음을 얻은 승려.

25) 사염분(私鹽盆), 사염인(私鹽人)으로부터 일정한 염세(鹽稅)를 징수한 것을 이름.

26) 사조(四祖),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네 조상을 아울러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