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시문

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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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0회 작성일 2024-01-31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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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동낙산동헌(題東洛山東軒)        청허당(淸虛堂) 석 휴정(釋 休靜) 79)


세산 티끌에 휩쓸려 분주히 달리니 塵漲蹄輪忙裏走

주색에 미친 마음 밤낮이 없네 心狂酒色夜中行 

어찌 타락한 모습으로 누우리오 豈如破衲蒙頭臥 

동창에는 바다의 새해가 뜨는구나 直至東窓海日生


『淸虛堂集』




○ 제동낙산동헌(題東洛山東軒)        청허당(淸虛堂) 석 휴정(釋 休靜)


세산 티끌에 휩쓸려 분주히 뛰고 塵漲蹄輪忙裏走

주색에 미친 마음 밤낮이 없네 心狂酒色夜中行 

타락한 모습으로 어찌 누우랴 豈如破衲蒙頭臥 

동창에는 바다의 새해가 뜨네 直至東窓海日生


『淸虛堂集』




○ 증낙산사승(贈洛山寺僧)        송운(松雲) 석 유정(釋 惟政) 80)


한양 남도에 남은 꽃마저 지니 漢陽南道落殘花

홀홀히 가는 가절 어찌하리오 佳節忽忽不奈何 

내일이면 봄도 가고 그대도 가고 明日春歸君又去

헤어지는 서운함 견딜 수 없소 不堪相送過天涯


『四溟堂集』




○ 관동(關東) 관동 공령생(功令生)의 응제(應製). 계축년(1793)


왕은 말하노라.

강원도는 동으로 푸른 바다와 닿고 서로는 경기와 마주하고 남으로는 영남과 호서지방을 접하고 북으로는 관서 지방과 가깝다. 고을이 무려 26개 군이며 산봉우리가 1만2천 봉이다. 진실로 일국의 이름난 지방이며 삼한의 명승지다. 이곳을 예맥(濊貊)의 옛 도읍지라고 하는데 ≷職方記≸에서 찾아볼 수 있느냐? 28수(宿)의 분야로는 기수(箕宿)의자리에 해당된다고 하였는데 천체가 운행하는 도수는 바뀌지 않았느냐? 연해의 삭방 (朔方)은 우선 소멸되는 대로 놓아두고 경기 지방의 고을과 호서 지방의 고을은 그 연혁을 말할 수 있겠느냐? 병마와 수군은 무장이 각기 통솔하는 것인데 모두 없애 버린것은 어째서이며 삼부(三部)와 육사(六司)는 감영(監營) 제도의 당연한 것인데 고르지 못한 것은 어째서이냐?

  한(漢) 나라 천자는 창해군(蒼海郡)이라는 군현을 설치하였고 박망후(博望侯 장건(張騫))는 선사(仙槎)에 닻줄을 묶었다. 어떻게 멀리까지 관할할 수 있겠으며, 또한 얼마나 과장된 말이냐. 멀리는 부상(扶桑)을 마주하고 가까이는 양곡(暘谷)과 인접하였으니 이곳에 소경(小京)을 설치한 일이 있었고, 이름난 산악을 바라보고 드넓은 광야를 돌아보니 태봉(泰封)이라는 국호가 일찍이 있었다. 그 연대와 경계를 모두 상고할 만한 문헌이 있느냐?

  미노리(未老里) 81) 의 상마(桑麻)와 옛 언덕은 다름없는 고향 풍경이며 관음굴(觀音 窟) 82) 의 납의(衲衣)의 영험함은 왕자의 생산을 기원하는 상서에 부합하였다. 화천(花川) 의 돌을 쏘아 화살이 박혔다는 고적과 예국(蘂國)의 뛰어난 인물들의 훌륭함은 모두가아름다움을 들추어내고 성스러움을 기릴 만한데 아직도 기록되지 아니하고 있다. 의관 (義館)과 천보(天寶)는 구름 같은 산들이 첩첩인데 대관령이 자물쇠처럼 가로막고 있으며 쌍성호(雙成湖)와 다대포(多大浦)는 안개 낀 파도가 끝이 없으니 이보다 더 험난한 해방(海防)은 없을 것인데 지금은 어찌하여 수비를 철수하였느냐?

  도내의 넓이는 천 리에 가까우나, 대부분 산협으로 쌓여 있으며 바다는 100년 동안조용하니 인구는 더욱 번성하였다. 토지는 척박하고 민생은 어려운데 세금은 부포(夫布), 이포(里布)뿐만 아니라 어염(魚鹽)의 이익까지도 수탈하고 있다. 근래에 들어 근거도 없이 거두는 세 가지 세금에 대해 ‘청산 육리(靑山六里)’라는 속담을 낳고 있을 지경이다. 유생에게는 노역이 있고 향교에도 공물을 물리고 있으니 승려는 독경을 못 하며 상인은 장사를 못 한다. 고슴도치 털처럼 울연히 일어나는 여러 가지 폐단의 원인을 한마디로 들 수 있겠느냐.

  만폭동(萬瀑洞)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면 수점(水岾)을 벗어나지 않고 도로의 맥락을찾아볼 수 없다. 산세는 철령(鐵嶺)의 능선을 따라서 백두산에 소급되는데 북쪽 한계와 남쪽 가닥이 완곡하게 내려온 것이 있을 것이니, 그 풍기와 수원을 아울러 들추어낼 수있겠느냐? 청학동(靑鶴洞)은 작은 골짜기이지만 금강산에 견줄 만하고 석응(石鷹)의 기괴한 형상은 ≷지장경≸에서 취하여 온 모습이라고 하는데 역시 조화물의 잔재에 불과한 것이냐? 한 굽이 호수와 5리에 이르는 흰모래는 영랑(永郞)이 노닐던 곳으로 약을 만들던 절구와 차를 끓이던 화로가 아직도 희미한 자취를 전하여 주고 있다고 하니, 신선에관한 이야기 를 모두 꾸며 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강(杠)은 녹죽(菉 竹)과 같으며 승(升)은 복숭아만큼 크다고 한다. 이것은 산이 크다는 것을 과장한 것이고 땅이 기름지고 물산이 풍요하여 이용후생에 많은 도움이 되는데 일일이 찾아내는 정책은 도리어 지나치게 융통성이 없는 것이 아니냐?

  비파의 가곡 83) 이 강남에 유포되니 한송정(寒松亭)의 이름이 이로부터 성가가 올라가고, 돌 위의 염주(念珠)는 죽정(竹頂)에서 영험을 보이니 낙가(洛伽)의 징조가 보배로운 집물에 오르게 되었다 84) . 사물도 기대하지 않은 만남이 있는 것이더냐? 일출을 공경히 맞을 수 있는 바닷가는 어느 곳이 가장 좋으며, 동해에는 조수의 물때가 미치지 못하는 이유를 추구할 수 있겠느냐?

  원주(原州)에 주천석(酒泉石)이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낭설이 아니며, 울진(蔚珍)에 천량혈(天糧穴)이 있다는 것은 황당한 말이 아니냐? 청평(淸平)의 문수비(文殊碑)에제사를 올려 기원한 것은 어느 시대이며 도원(桃源)의 효제향(孝悌鄕)은 순박한 풍속이기 지금도 전하고 있느냐? 자(箕子)의 옥규(玉圭)는 누가 얻어서 누구에게 바쳤으며, 중국 사신 공씨(龔氏)의 환선(紈扇)은 누가 시를 쓰고 누가 읊었느냐?

 진평왕(眞平王)이 암석에 새겨 놓은 시구는 보았으며 익성공(翼成公 황희(黃熹)의 시호)이 머물렀다는 곳은 석정(石亭)의 아래쪽에 있는지 와현(瓦峴)의 위쪽에 있는지 들었느냐?

  오죽헌(烏竹軒)에서는 현인이 태어났는데 골짜기가 깊어 지초를 캐는 은둔자가 노닐만하고 유림(柳琳) 85) 의 큰 공적은 백전(栢田)에 완연하게 남아 있고 실직(悉直 삼척의 옛 이름)의 유래된 풍속은 우산(羽山)처럼 높다랗다.

  지난 공적과 넉넉한 향기는 지금도 격려시키는 아름다움이 남아 있느냐? 대저 산은 서북에서 일어나고 물은 동남으로 흘러가는데 풍기가 치밀하고 형세가 완전하여 마을의 촌락과 영부(營府)의 관할을 차례로 구비하였다. 관동이 비록 작으나 역시 나라 안의 하나의 도회지다. 물산으로는 산삼(山蔘), 백출(白朮), 마저(麻楮), 봉밀(蜂蜜), 해산물, 석유(石乳)와 호랑이 가죽을 공물로 바치고, 백성은 효성 있고 우애하며 농업에 힘쓰고 바탕이 곧으며 의리를 좋아하는 선비가 많다.

  살기 좋은 곳을 찾아서 만년의 안식처를 꾸미려는 사람은 모두 관동을 꼽고 있으니, 비단 산수와 어조(魚鳥)만을 보고 즐길 뿐이 아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근년에 들어서는 땅에서 재화가 번식되지 않고 백성의 생활은 나날이 곤궁해져서 농가의 비축이 라고는 탕감해 주고 남은 세액을 바치기에도 부족하고, 어부의 집은 쇠잔하여 국가에서 넉넉하게 진휼하여 주는 실효를 볼 수 없다.

  조적(糶糴)의 액수가 30여 만 포(包)인데 쭉정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군사의 수는모두 1만 몇 천 명인데 빈 대오를 보충하지 못하고 있다. 삼공(蔘貢)은 법을 누차 변경하였음에도 백성의 힘을 덜어 줄 실효는 아직도 까마득하고, 승역(僧役)에 대해 매번 칙령을 내렸으나 승려들이 노역하게 하는 폐단은 연이어 계속되고 있다.

 이것이 어찌 도백이 직책 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뿐이겠느냐. 참으로 나 한 사람의 성의가 부족하여 혜택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즉위한 이래로 10년을 하루같이, 밤낮으로 동방 백성들을 간절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감히 농사가 어느 정도 풍년이 들었다고 하여 혹시 상처가 조금은 아물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밭갈이를 끝내고 등불을 밝혀 놓고 붓과 책을 가지고 있는 자들 역시 사농공상 중에 으뜸이 아니더냐.

  민정의 이해와 고을의 크고 작은 폐단을 그대들에게 묻지 않고 누구에게 묻겠느냐. 이번에 이 공령생(功令生)을 선발하여 시험을 치르는 일은 한 지방을 흔들어 감화시키고 많은 선비를 교육하는 뜻에서이지마는, 풍속과 고난을 묻는 좋은 제도도 그 속에 아울러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야 정치를 조금의 까다로움도 없이 하고 사물의 모든 해로움을 제거하여 소생시켜서, 선비는 덕의 보답을 받고 농민은 농토에서 일하며 동해에 둘러싸여 있는 8만여 호 모두가 우리의 천 억년 무궁한 혜택을 향유할 수 있게 하겠느냐?

  아, 그대 제생은 추천장에 성명이 올라 있으니 군왕의 앞에서 들추어낼 책임이 있다.

그대들은 마음을 다하여 조목조목을 진술하라. 내 친히 열람하리라.

  

『關東邑誌』關東 關東功令生應製○癸丑

王若曰. 江原爲道. 東極滄溟. 西拱畿甸. 南接嶺湖. 北近關塞. 郡凡二十有六. 峯有一萬二千. 誠一國之名藩. 而三韓之勝區也. 地是濊貊之都. 職方可按歟. 星分箕宿之次. 躔度不改 歟. 沿海朔方. 且置銷刻. 畿邑湖縣. 能說因革. 兵馬水軍武帥各領. 而竝闕則那. 三部六司營制固然. 而不齊緣甚. 漢天子置郡曰蒼海. 博望侯繫纜於仙槎. 曷逌遙管. 何亦浮夸. 遠拱扶 桑. 近挹暘谷. 斯有小京之設. 粤瞻名嶽. 顧視曠野. 夙著泰封之號. 其年代境界. 皆有攷信之 文歟. 未老里之桑麻古陌. 依然枌楡之物色. 觀音窟之衲衣靈應. 實符玄鳥之禎祥. 花川射羽之勝蹟. 蘂國拔髦之盛典. 悉合揚休頌聖. 而尙稽於紀載歟. 義館天寶. 雲山千疊. 而嶺阨如鎖. 雙成大浦. 烟波萬頃. 而海防莫險. 則今胡撤其守歟. 疆近千里. 而山峽殆遍. 海晏百年. 而生齒益繁. 土最确而民最窶. 賦不止於夫里. 利盡括於魚鹽. 伊來白地三稅. 諺稱靑山六里. 儒有役而校有貢. 僧不唄而賈不售. 凡係百弊之蝟起. 可以一言而毛擧歟. 源窮萬瀑. 不出於水岾. 而脈絡道里. 仍無可尋. 勢從鐵嶺. 直溯於白頭. 而北戒南條. 曲有自來. 風水幷可揚扢歟. 靑鶴小洞. 竊比於金剛. 石鷹奇形. 取象於地藏. 亦云造化之糟粕歟. 一曲平湖. 五里明沙. 卽永郞盤桓之地. 而丹臼茶竈. 尙傳其依俙蹤跡. 則神仙之說. 不可盡誣歟. 杠如菉竹. 升 大桃子. 乃于山強大之所. 而沃壤饒產. 多賴於利用厚生. 則搜討之政. 反歸太膠歟. 瑟底詞 曲. 流布於江南. 寒松之名. 自此增價. 石上念珠. 示靈於竹頂. 洛伽之兆. 至登寶什. 物亦有不期之遇歟. 日出之寅賓海隅. 何處最勝. 潮信之不及東洋. 其理可推. 原州有酒泉石. 無已齊諧. 蔚珍有天糧穴. 得非唐荒. 淸平文殊之碑. 祝釐者何代. 桃源孝弟之鄕. 不沫者淳風歟. 箕子玉圭. 孰得而誰獻. 龔使紈扇. 誰寫而孰詠. 爾見眞平王勒詩. 爾聞翼成公駐節之在石亭之下瓦峴之上歟. 軒號烏竹. 賢人篤生. 洞採紫芝. 隱者考槃. 而柳琳之膚勳. 柏田宛然. 悉直 之餘俗. 羽山崒彼. 其往烈賸馥. 至今有風勵之美歟. 大抵山起西北. 水注東南. 風氣密形勢全. 而井里之聚落. 營府之統轄. 次第備焉. 關東雖小. 亦王服之一都會也. 物產則有蔘朮麻楮蜂蜜海錯石乳文豹之貢. 人民則多孝友力田質直好義之士. 數樂土而營菟裘者. 無不以關東爲歸. 蓋非獨山水魚鳥之爲可悅眼而已. 夫何挽近以來. 地財不殖. 民生日困. 田家之蓄積. 不足當寬蠲之餘稅. 漁戶之凋殘. 未見有優恤之實效. 糶糴之包三十餘萬. 而糠粃居多. 軍額 之摠萬有數千. 而虛伍難充. 蔘貢屢變. 其法. 而吾民息肩之驗. 奈遲徯應. 僧役每煩飭令. 而緇徒荷擔之弊. 相續前後. 此豈但承流分憂者之未副職責. 實由予一人誠未孚而惠不究耳. 肆予宵旰之念. 憧憧於東民者. 癸甲以來. 十年如一日. 不敢以稼穡之稍登. 或幾其瘡痍之少完. 而輟耕篝燈. 握鉛而懷槧者. 又非四民之長乎. 民情之怎利怎害. 邑瘼之若大若小. 不於是問 而又誰問. 今此功令生抄啓試取之擧. 固出於風動一方敎育多士之意. 詢謠俗訪疾苦之良䂓美 制. 亦欲兼寓於其間. 何以則政無一毫之煩苛. 物得衆疵之蘇祛. 士食舊德. 農服先疇. 而環東海八萬餘戶. 共享我千億年無疆之利澤歟. 咨爾子諸生. 名登剡薦. 責任對颺. 其可悉乃心條陳之. 予將親覽焉.


『弘齋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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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휴정(1520,중종 15~1604,선조 37)은 속명은 최여신(崔汝信)이고 본관은 완산(完山), 자는 현응(玄應), 호는청허(淸虛)이다. 묘향산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묘향산인(妙香山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로 불린다.

휴정은 법명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의 부탁을 받고 전국에 격문을 보내어 의승군(義僧軍) 의 궐기를 호소했다. 안심사(安心寺)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탑이 세워졌으며, 해남 표충사(表忠祠)와 밀양 표충사 및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 되었다.

9세 때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봄에 아버지마저 죽자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의 양자로 들어가 서울로 옮겼다. 1540년(중종 35)에 일선(一禪)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1549년(명종 4) 승과에 합격했으며, 대선(大 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올랐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를 버리고 금강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선수행과 후학지도에 전념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났을 때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다가 선조의 직접 신문에 의해 무죄가 입증되어 석방되었다. 이때 선조와 휴정이 주고받은 시가 그의 문집에 실려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의 부탁을 받고 전국에 격문을 보내어 의승군(義僧軍)의 궐기를 호소했다. 자신은 순안 법흥사(法興寺)에서 문도 1,500명으로 승군을 조직했으며, 평양탈환작전에 참가하여 공을세웠다. 선조가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에 임명하자,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제자인유정(惟政)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승군을 이끌고 나가 호위한 후 승군장의 직에서 물러나 다시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앉은 채로 입적했다. 저서로는 문집인 『淸虛堂集』이 있다.

이 시는 휴정이 낙산에서 묶으면서 자신을 돌아보며 감회를 표현하였다. 휴정은 임진왜란과 모반의 혐의, 그리고 불교와 관계없는 속세의 일들에 중심을 잃고 생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조 불교의 중심에서속세의 일에 분주히 많은 일들을 하며 때로는 속세와의 인연으로 청정하지 못했던 자신을 돌아보며 속세의욕망과 허무함을 표현하였다. 낙산사는 불교의 성지로 이곳을 찾아 선대 고승들을 생각하며 타락한 자신의모습을 한탄하였고, 새롭게 뜨는 해를 보며 마음을 새롭게 잡고 자신을 찾으려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80) 유정 (惟政, 사명당, 송운대사)1544(중종 39) 경남 밀양~1610(광해군 2).조선 중기의 승려.

본관은 풍천(豊川). 속명은 임응규(任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송운(松雲), 별호는 종봉 (鍾峰). 아버지는 수성(守成)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다.

7세 무렵부터 할아버지에게 〈사략 史略〉을 배웠으며, 13세에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를 배웠다.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에게서 〈전등록 傳燈錄〉을 배웠다. 3년 뒤 승과에 합격한 것을 계기로 많은 유학자들과 교유했는데, 특히 20세 연상인 박순(朴淳) 및 5세 연하인 임제(林悌)와 봉은사(奉恩寺)에서 자주 토론하며 가까이 지냈다. 또당시 재상이던 노수신(盧守愼)으로부터 〈노자〉·〈장자〉·〈문자 文子〉·〈열자 列子〉 및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다.

그 뒤 직지사의 주지를 거쳐, 1575년(선조 8)에 선종 승려의 여론에 의해 선종의 본거지인 봉은사 주지로천거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로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수행에 정진했다. 1578년에휴정에게 하직하고 보덕사(普德寺)로 가서 3년간 머문 후 1581년부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돌아다니면서 선을 닦았다.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진리를 깨닫고 오대산 영감사(靈鑑寺)에 머물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스승인 휴정과 함께 투옥당했다가, 강릉지방 유생들의 탄원으로 풀려났다. 1592년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기응변으로 인근 9개 촌락의 백성을 구출했으며, 휴정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했다.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1593년 1월의 평양성 탈환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으며, 그해 3월 서울 부근 삼각산 노원평과 우관동 전투에서도 공을 세웠다. 이 일로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받았다. 1594년 4월부터 1597년 3월 사이에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의 4차례 협상회담에 참여했다. 1595년에는 장편의 상소문을 올려 전쟁에 대비하여 국력을 충실히 하는 방책을 건의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승려 로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의 벼슬을 하사받았다. 1604년 휴정이 입적하여 묘향산으로 가던 중에 왕명을 받고 일본과 강화를 맺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1605년 4월에 포로로 잡혀갔던 조선인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했는데, 이때 왜군에 강탈당했던 통도사(通度寺)의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되찾아와서 건봉사(乾鳳寺)에 안치했다고 한다. 묘향산으로 가서 휴정의 영정을 참배한 다음 원주 치악산에 머물렀다. 그후 병이 들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던 중 1610년 8월에 입적했다.

그는 휴정의 4대 제자의 하나였지만, 불교승려로서의 독창적이며 체계화된 사상은 남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승병장(僧兵將)이나 외교가로서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경험을 토대로 부국강병책을 건의하여 중농정책의 실시, 인물본위의 관리채용, 탐관오리 숙청, 민력(民力)의 무장, 산성축조, 무기제조, 군량미 비축 등을 강조했다. 특히 불교억압책으로 인하여 몰락한 승려의 사회적 신분을 일반민과 같이 해줄 것을 건의했다. 임진왜란중에 이미 가토와 4차례의 회담을 가진 바 있는 그는 난이 끝난 직후에는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성공적인 강화를 맺고 귀국했으며, 입적하기 직전에는 쓰시마 도주[對馬島主] 종의지(宗義智)에게 우호를 강조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시문에 능하여 저술이 많았으나 임진왜란 때 거의 불타버렸고,〈사명대사집 四溟大師集〉7권과 〈분충서난록 奮忠紓難 錄〉1권, 기타 상소문·발문(跋文)·서장(書狀) 등이 전한다. 문도들이 해인사 홍제암(弘濟庵)에 탑과 비를 세웠다. 밀양 표충사(表忠祠), 묘향산 수충사(酬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81) 미노리(未老里): 목조(穆祖)의 무덤이 이곳에 있으며, 도조(度祖)가 태어난 고향임을 말한다. 읍지(邑誌)에는 미노리(眉老里)로 되어 있다. 『關東邑誌』

82) 관음굴(觀音窟): 익조(翼祖)가 정숙왕후(貞淑王后)와 함께 이곳에서 아들 낳기를 기원하고 있었는데, 꿈속에 납의를 입은 승려가 나타나서, “반드시 귀한 자식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선래(善來)라고 하라.”고 일러주었다. 얼마 후 도조(度祖)가 탄생하니 이름을 선래라고 하였다고 한다. 『關東邑誌』

83) 비파의 가곡: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적하는 말이다.

84) 돌 위의 …… 되었다: 낙산사(洛山寺)의 개창과 관련된 설화의 내용을 말한다. 낙산 바닷가에 석굴이 하나 있는데 신라의 승려 의상(義湘)이 관음의 모습을 보려고 석굴 앞에서 14일간 기도를 하였으나 보이지 않으므로 바다에 투신을 하였다. 그런데 바다의 용이 구출하여 바위 위에 놓으니 관음대사가 석굴 속에서 팔을펴 수정(水晶) 염주를 주면서, “내 몸을 직접 볼 수는 없으나 석굴 위에 쌍죽(雙竹)이 자라고 있는 곳이 나의 정수리이니 이곳에 가람을 세우도록 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해룡도 여의주(如意珠)와 편옥(片玉)을 전해 주었는데 의상이 그곳에 가람을 짓고 해룡이 준 편옥으로 관음상을 조각하여 보관하였다고 한다. 《關 東邑誌》 85) 유림(柳琳): 1637년(인조15) 호란(胡亂) 때에 관서 절도사 유림이 왕을 돕기 위해 갈 때 이곳을 지나다가 적병을 만나 적장 야빈대(耶彬大)를 죽이고 공적을 이룬 일을 말한다. 백전(栢田)은 관서 관찰사 홍명구(洪命耈)가 순절한 곳이기도 하다. 승첩비(勝捷碑)와 충렬사(忠烈祠)가 있다.『關東邑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