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5호

[향토사료] 1) 수계(水系) 및 유역의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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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00회 작성일 2024-01-17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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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계(水系) 및 유역의 행정구역



양양 남대천 본천의 수계는 동해안에서 가장 길어서 약 60km에 이르며, 후천의 수계는 약 26km, 오색천의 수계는 20km로 총 100km가 넘는다.

행정구역상 우통수는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산1번지17)에서 발원하여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 가마소골로 흘러들어 부연동(釜淵洞) 마을 가운데를 가로지르다 현북면 법수치리로 이어지기 때문에 3개 시군에 걸쳐져 흐른다.

어성전리에서 면옥치리, 장리, 도리로 이어지면서 손양면과 경계를 이루며 서면 내현리, 수리, 용천리, 양양읍 월리, 서문리, 남문리, 연창리, 송암리, 조산리로 이어진다.

남대천이 서면 용천리를 지나 양양읍 월리로 막 들어서는 입구에“두물뫼(지금은 형체가 없어졌다)”가 있는데 북평리 건지산(乾芝山) 앞에서 남대천과 후천이 합쳐졌기 때문에“양수(兩水)머리”라고 했다.18)

양양남대천은 본천(本川)을 포함한 7개의 지방하천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소하천은 13개로 남대천 하구까지 이어져 동해로 들어간다.



(1) 양양남대천의 수계(水系)


■ 본천(本川) : 오대산 두로봉(1,422m)에서 발원하여 하구까지 약 60㎞에 이른다. 발원지(發源地)~군계(郡界)까지 약 20㎞이고, 군계(郡界)~하구(河口)까지 약 40㎞이다.


■ 후천(後川) : 응복산(1,360m)에서 발원한 벽계천은 미천골(米川谷) 입구(入口)에 이르고, 약수산(1,306m)과 구룡령(1,117m)에서 발원한 청계천은 갈천리를 지나 미천골 입구에서 응복산(鷹伏山)의 계천(溪川)과 합류하여 서림, 영덕, 공수전, 범부리를 지나 임천리까지 약 26㎞이다.


■ 오색천(五色川) : 점봉산(1424m), 오색령(1004m), 대청봉(1708m)에서 발원하여 송천리까지 약 20㎞이다.



(2) 양양남대천과 관련된 지명


■ 법수치리(法水峙里)는 양양남대천 상류에 위치해있어 물이 맑아 불가(佛家)의 법수(法水)를 용출(涌出)한 곳과 같다는 전설에 의한 마을 이름이다.


■ 어성전리(漁城田里)는 마을을 둘러싼 산들이 산성(山城)을 이룬 분지형(盆地形)으로 기름진 전답(田畓)이 수십만평(數十萬坪)이고 오대산(五臺山)과 응복산(鷹伏山)에서 발원한 물이 합수(合水)하여 평탄한 하상(河床)을 넓게 펼쳐 물고기 서식(棲息)에 적지이다. 그래서 예부터 이곳을‘장작불 때고 어탕(魚湯)에 이밥을 배불리 먹으니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理想鄕)’이라 불렀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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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남대천 수계별 지천(枝川)>



■ 중류인 서면의 본천(本川)에는 물골마을 또는 수동(水洞)이라 불렸던 수리(水里)가 있으며 용소(龍沼)에서 샘이 솟는다는 용천리(龍泉里)가 있다.


■ 서면의 후천(後川)에는 구룡령(九龍嶺) 입구의 갈천리(葛川里)가 있는데 춘궁기(春窮期)에 칡뿌리로 입에 풀칠하였기에 마을 앞 하천에 칡가루가 가라앉아 속칭‘치래’라고 하였다.


■ 황이리(黃耳里)의 미천골〔米川谷〕에는 신라 말에 선림원(禪林院)이라는 강원(講院)이 있었는데 성불하기 위해 찾아든 학승들을 위해 조석으로 공양미를 몇 가마씩 씻다 보니 쌀 씻은 물이 내를 이루어 후천까지 흘러들어 수색(水色)이 마치 막걸리를 뿌려놓은 듯 탁해 보였다. 이를 본 후천변(後川邊)의 서림, 영덕 주민들이 쌀 미(米)자 내 천(川)자를 써서 이 골짜기 이름을 미천골〔米川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속칭‘사(쌀)래골’이라고도 한다.


■ 송천리(松川里)는 하천 가운데 송림이 울창하여 강물이 송림 양쪽으로 흘러서 일명‘소(솔)래’라고도 한다.


■ 용소리(龍沼里)는 하천의 큰 소(沼)에서 용이 승천하여‘용소(수)골’이라 한다. 송어리(松魚里)는 마을 앞 하천에 송어, 연어, 자라가 많아서‘송어골’이라고도 하였다.


■ 수상리(水上里)는 1936년 병자년(丙子年) 포락(浦落) 때 하천물이 벼랑에 부딪혀 위로 돌아 내려갔다하여‘물 웃구미’수상리(水上里)라 부른다.


■ 하류인 양양읍내로 흐르는 물도 과거에는 거마천이 문수사 앞으로 흘러 군청사거리에서 서문리에서 내려오는 물과 합쳐져 청곡리, 포월리를 지나 포월천과 합쳐져 조산리에서 바다로 빠져나갔다. 이로 인해 포월리 앞에는 큰 개(大浦)가 있어 달이 뜨면 아름답게 비춘다하여 개 포(浦)자에 달 월(月)자 포월리(浦月里)가 되었다고 하며, 청곡리와 조산리 사이의 앞뜰을 도평(島平)이라 부르는 것도‘물로 둘러싸인섬 버덩(들)’이란 뜻이다.


■『관동지』에는 여름에는 남대천을 건널 때 배(舟)를 이용하였는데, 월리는 본래 양양부에서 가자면 반드시 물을 건너야 하는 마을로 넘을 월(越)자를 썼는데 일제가 달월(月)로 바꾸었다고 한다.


■ 수여리는 물이 풍부하다는 의미로 물수(水), 남을 여(餘)자를 써서 수여리(水餘里)라 하였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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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988~1995년.

18) 『양양지방의 땅이름』양양문화원, 1995, p.120.

19) 앞의 책, p.243.

20) 『양양의 땅이름』양양문화원, 1995, p.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