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5호

[향토사료] 2) 양양 남대천의 수해(水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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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9회 작성일 2024-01-17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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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양양 남대천의 수해(水害)



(1) 수해의 원인은 하상계수(河狀係數)

우리 하천의 홍수위를 조사하면서 반드시 언급하는 것이 하상계수인데 최대 유량과 최소 유량과의 비율로 하황계수(河況係數)라고도 한다. 이 수치가 1에 가까우면 하황이 양호한 것이고 수치가 크면 클수록 하천의 유량 변화가 큰 것이다. 하상계수는 치수(治水)나 이수(利水)에 중요한 지표이다. 하상계수가 큰 경우 댐을 축조하여 홍수 시 물을 일시 저장, 하류의 수해를 방지하기도 하고 갈수기에는 댐의 저수를 방류하여 이수(利水)가 될 수 있게 한다.21)

양양 남대천은 환경부 한강수위관측소에서 양양대교에 설치한 유량 자료를 토대로 수십년간 통계를 가지고 하상계수를 산출해야 하나 측정을 시작한지 10년 미만이라 확정적인 하상계수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2020년 920, 2021년 298, 2022년 76022)으로 3년간 연도별 하상계수를 알수 있는데 2020년과 2022년은 강수량 변동이 매우 높지만 2021년에는 매우 가물었음을 알 수 있다. 하상계수가 높으면 집중 호우, 태풍, 수해에도 취약하며 봄철 식수난에도 불리하다.

유럽이나 남미의 강이나 베트남, 중국에 비하면 양양 남대천을 비롯한 우리나라 강들은 하상계수가 20배이상 되기 때문에 태풍으로 인한 수해를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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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왕조신록으로 보는 역대 수해(水害) 기록

역대 조선왕조실록 중 수해(水害)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 번째 기록은 태종 4년(1422년) 7월 25일(陰曆) ‘대신을 흥국사와 낙산사로 보내 기청회(祈晴會)23)를 베풀었다’24)는 기록을 보면 이는 오랜 장마가 있었던 기록으로 추측된다.

이 밖에도 1600년도에 4번의 큰 물난리 피해 보고가 있는 등 8번의 피해가 신록에 등장한다. 날짜가 모두 음력임을 감안(勘案)한다면 장마철보다는 태풍철에 몰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록되지 않은 수재가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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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00년대 이후 수해(水害) 기록


■ 병자년(丙子年) 포락(浦落)

병자년(丙子年) 포락(浦落)은 1936년 병자년 7월 말부터 9월에 걸쳐 강원도를 강타한 물난리를 가리킨다26). 1925년 을축년(乙丑年) 수해 때 강원도에서는 80년 만의 대참사(大慘事)를 당했지만27), 1936년 병자년 포락에 비할 바가 아니다.

1936년 8월 26일부터 29일까지 통천에서 삼척까지 폭우가 동해안을 강타했다. 강릉시는 준공한 후 얼마되지 않은 제방이 터지고 강릉 남대천의 강릉교가 무너질 정도로 시내가 물에 휩쓸려 수천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양양은 한밤중에 제방이 터지며 남대천이 범람해 양양읍내가 싹 쓸리며 천 명에 가까운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현산공원에 있는 위도비(慰悼碑)에는 사망 584명, 부상 500명, 가옥과 농경지 침수 또는 유실 등 많은 수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전한다.28)


■ 1954년 9ㆍ13 수해(水害)

‘9·13 수해’는 갑오(甲午)년인 1954년 9월 12일부터 36시간 동안 초속 23m 이상의 강풍과 980mm의 강우량을 동반한 태풍의 엄습으로 양양군 전 지역에 수해가 발생하여 사망 32명, 중상 18명, 경상 25명, 가옥 유실 135호, 가옥 파괴 704호, 가옥 침수 1,195호, 선박유실 102척, 선박파괴 85척, 도로유실 500여 곳 등 이재민 900여명이 발생한 수해다.

특히, 육군(陸軍) 제1101야전공병단(野戰工兵團)이 새로 건설한 남대천 목재(木材) 교량(橋梁)이 완전히 유실되었으며, 당시 남대천 하구의 도평(島평)뜰에 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포 36문, 탱크 2대, 군용 천막 2동이 매몰(埋沒) 또는 유실(遺失)되어 복구에 3개월이나 소요되었다고 한다.


■ 사라(SARAH)호 태풍(颱風) ⇒ 열대성 저기압 5등급

1959년 9월 15일부터 18일까지 발생해 우리나라에 큰 피해를 준 태풍『사라』는 최대 풍속 85m/sec로 제주도와 영남지방을 비롯한 전국에 큰 피해를 주었으나 일찍이 동해로 빠져나가면서 양양지역은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29)


■ 루사(RUSA)

『루사』는 2002년 8월 30일부터 9월 1일 사이에 엄청난 양의 비와 바람을 동반하고 영동지방을 강타하여 최악의 재난을 불러왔다.30)

2002년 8월 31일 하루 동안에 1904년 한반도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래 1일 최고 강수량이 쏟아졌는데 강릉이 880㎜, 양양이 851.5㎜를 기록했다. 이로 인해 양양은 콘크리트로 가설된 서면 용천리 입구의 용천교(龍泉橋)가 떠내려가는 등 막대한 피해(被害)를 당했다. 당시의 피해액이 양양군 1년 예산(1,291억원)의 4배가 넘어 국가에서‘재난지역 선포’라는 초강수를 두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태풍 루사로 인해 사망 23명, 부상 18명, 도로유실 66km, 교량 파손 및 유실 63개소, 제방 유실 15km, 농경지 유실 1,821ha, 수리시설 파손 137개소, 건물 파손 및 침수 2,672동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복구하는 기간만 2년 이상이 소요되었으며 복구 비용은 총 5천 93억원이 소요되었으며, 지방비 부담 가중으로 200억원의 부채를 지기도 하였다.


■ 매미

2003년 9월 12일부터 13일까지 우리나라에 상륙한『매미』는 순간 최대 풍속이 무려 60m/sec의 무서운 태풍이었다. 루사 피해를 제대로 복구하지도 못했는데 또다시 비와 바람을 몰고 와 농경지 침수와 유실로 복구 기간의 연장은 물론 다시 한번‘국가 재난지역으로 선포’가 되는 피해를 입었다.31)

양양지방에는 2003년 9월 12일 새벽 3시부터 9월 13일 새벽 5시까지 26시간 동안 최고 438㎜가 내려 건물 32동(전파1, 반파2, 침수 29) 농경지 유실 197.8ha, 농작물 99ha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재산피해는 총 407억원으로 도로 교량 등이 94건에 388억원, 사유시설이 19억원의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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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네이버지식백과 하상계수, 자연지리학사전 2006. 5. 25

22) 한국수문조사연보 유량편

23) 기청회(祈晴會) : 장마철 등에 날씨가 맑기를 기원(祈願)하는 불교의식

24) 『조선왕조실록』太宗券八四年七月二十五日甲子遣內臣于興國寺等及洛山寺設祈晴法會

25) 큰물지다 : ‘홍수가 나다’로 전라도 방언

26) 『향토지』양양군교육청, 1968.

27) 『朝鮮の洪水조선의 홍수』조선총독부, 1925, p.158.

28) 『양양지방의 금석문』양양문화원, 2014, p.115.

29) 「위키백과」태풍사라

30) 앞의 백과 태풍루사

31) 앞의 백과 태풍매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