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5호

[향토사료] 4) 양양남대천 하류(下流)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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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4회 작성일 2024-01-17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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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양양남대천 하류(下流)의 변화

 

하천의 하류는 사행천(蛇行川)이기에 홍수 등의 영향으로 수시로 변경되었지만 지금은 인공구조물과 튼튼한 제방, 직강화(直江化) 등으로 옛 모습을 잃었다.

양양남대천의 하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큰 변화를 겪고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특히, 도평(島坪)들과 해안사구지대(沙丘地帶)의 변화는 일제가 대정(大正) 4년(1915년) 측도(測圖)하여 대정 5년(1916년)에 제작한 지도와 비교하면 가히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이 지도를 보면 당시 남대천 하구의 수로가 북쪽으로 직사각형의 석호인 조산개〔造山浦〕를 형성하여 강현면 주청리(酒廳里) 경계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 호수가 형성되어있었음을 알 수 있다.60)



(1) 도평(島平)들

1915년에는 현 양양가족센타 앞에서 물길이 갈라져 한줄기는 현재의 남대천 물길을 따라 내려가고 한줄기는 연창리 대미소〔竹尾沼)61)에서 갈라져 송암리를 감싸고 또다시 분화(分化)되어 한줄기는 연창리와 청곡리 앞으로 샛강이 되어 흘러 포월리에서 물줄기가 커지며 조산리 앞까지 흘러 바다로 간다.

연창리에서 분화된 한줄기는 토둔지(土屯之: 작은 언덕)에서 갈라지며 한줄기는 청곡리 샛강에 합류하고 또 한줄기는 도평들을 남동쪽으로 가로지르며 남대천 원줄기에 합류한다. 이런 이유로 도평(島坪)들은 어느 쪽으로 접근하든지 물을 건너기 때문에 육지속의 섬인 도평(島坪)이 된 것이다. 당시의 도평들에는 농경지가 오늘날의 1/3밖에는 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대천으로 흐르는 물은 한개목62)에 이르기 전에 큰 석호(潟湖)63)에 모였다가 바다로들어갔음을알수있다.

1605년 을사포락으로 부유하게 형성된 촌락은 사라지고 황무지로 변했던 사구는 비옥한 밭과 초원으로 새로워졌으며, 연창리 대미소를 기점으로 물길이 북천과 남천으로 갈라져 흐르면서 장마로 북천이 우세하면 북쪽 마을 즉 양양면 쪽이, 남천이 우세하면 남쪽인 손양면 쪽이 부유한 복록(福祿)을 입는다고 설화가 전해져 오고 있다.

8·15해방 이전에는 송암리 쪽 넓은 초원에 축구장을 만들어 놓고 매년 여름이면 양양군과 강릉군(江陵郡)의 축구팀이 축구 경기로 양강(襄江) 두 고을의 우의를 다지기도 하였다.

6·25 전쟁 이전의 도평들은 낙원의 풍광으로 쓸만한 사구는 비옥한 밭으로 가꾸어져 조·콩·밀·보리·수수가 일렁거리고, 밭으로 가꾸지 않은 대부분의 사구는 우마가 풀을 뜯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메워져서 곡창(穀倉)인 농경지(農耕地)로 변하였다.



(2) 대포영(大浦營)

조선시대 동해안을 방어하기 위하여 주둔하던 강릉 안인포(安仁浦)의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을 1490년 성종 21년에 양양부 조산리(造山里)로 옮기고 대포영(大浦營)64)이라 칭하였다. 사천리(仕川里)에는 대포영의 군관들이 거주하면서 사천리(沙川里)가 모래사(沙)에서 벼슬할사(仕)의 사천리(仕川里)로 마을 이름이 변경되었다.

양양읍 임천리(林泉里) 뒷산 석성산(石成山) 자리가 만호(萬戶)터로 1496년 대포수군(大浦水軍) 만호(萬戶)65)가 본영(本營)은 조산리 성안말에 두고 관사(官舍)는 임천리 석성당(石城堂) 자리에 건축하고 살았다 하여 ‘만호터’라 한다.66)

1520년 중종 15년 대포영에 높이 12척, 둘레 1,469척 석성을 축조하였다가 인종 4년(1545)에 적합지 못해 혁파(革罷)하였으며, 1529년 양양인 이봉(李芃)이 대포수군만호(정3품)로 임명된 사실이 지난 2011년 3월 21일 양양지역 전주이씨 문중 선묘(先墓) 이장(移葬) 중 묘지석(墓地石)이 출토되면서 밝혀지기도 하였다.67)

1530년경 대포수군만호가 양양읍 기정리 동쪽 호수(湖水) 부근에 정자(亭子)를 짓고 학포정(鶴浦亭)이라고 하였다.68)

포월리 북쪽과 기정리 경계에 있는 산길 중간에 대포수군부장(大浦水軍副將)이 쉬어 갔다는 원수(元帥)터가 있다.

1605년 을사포락(乙巳浦落)으로 인하여 군항이 사토(沙土)로 매몰되면서 기능을 상실하여 자연스럽게 양양지역에서 대포영이 철수한 것으로 보인다.

배둔지〔船屯池〕는 조산리 동남쪽 끝 구룡지(九龍池)에서 흐르는 여울 남쪽에 대포영의 병선을 매던 곳으로 도평들 한가운데인 양양읍 조산리 122번지 포월천 부근인데 지금은 호수가 메워져 논으로 활용되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대정4년(1915년)에 측도한 지도를 보면 왜 대포영의 배둔지가 그곳에 위치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대포영지(大浦營址)는 조산리 서쪽의 성안말〔城內村〕과 북쪽의 성재〔城峙〕사이에 있었으며 주위가 능선으로 둘러싸여 있다. 축성 흔적이 있는데 남쪽 능선에 동명서원이 있다.



(3) 조산리 석호 조산개[造山浦]

1990년 이전에는 지금의 동해신묘에서 조산초등학교까지 백사장(白沙場)에 조산개〔造山浦〕라는 석호(潟湖)가 있었는데 낙산 프레야 콘도를 신축하면서 사라졌다.

호반에는 갈대 등 수초가 무성했으며 바닥은 개펄이었다. 말 종류의 수초가 자라고 물빛이 흐려 바닥을 볼 수 없었다. 어류의 먹이가 되는 수생 플랑크톤이 풍부하여 잉어, 뱀장어 등 어류가 많이 서식하였으며 ‘갯〔浦〕터짐’으로 바다와의 물길이 열리면 숭어, 황어, 전어 등이 찾는 곳으로 작은 배를 띄워 투망과 낚시로 어획하였다.69)



(4) 양양남대천의 개〔浦〕막힘 현상

‘개〔浦〕막힘 현상’은 양양남대천의 한계목이 1년에 3∼5회 정도 막혀서 담수가 바다로 유입되지 못하는 현상으로 주로 바닷물이 역류한 후 막히는데 이때 기수성 수역이 만들어지면 염분의 농도가 해수와 담수의 중간으로 기수호(汽水湖)70)가 된다.

바다가 백중사리71) 때가 되거나 강한 동풍과 함께 파도가 높으면 바닷물 수위가 올라가게 되는데 이때가 되면 남대천 하구인 한개목의 유속(流速)이 점점 느려지다가 바닷물이 역류하면서 모래가 퇴적(堆積)되어 결국 막히게 된다.

개 막힘 현상이 일어나면 도평들 저지대 논의 수로(水路)로 염분(鹽分)이 함유된 하천수가 역류하여 농사의 피해를 염려한 주민의 요구로 굴삭기 등 장비를 이용하여 뚫어놓게 된다.

수위(水位)가 많이 오를 때는 남대천 하구에서 양양대교까지 물이 불어 거대한 호수가 되면서 양양대교에 설치된 유속측정 장비에 마이너스(-) 유속이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이다.



(5) 양양남대천 중하류(中下流)의 소(沼)

소(沼)란 하천의 폭포수가 떨어지는 곳이나 기암괴석, 이상 지형 등으로 인하여 물길이 돌아가거나 유속이 빠르고 힘이 있어서 하천 바닥이 파여서 깊은 곳을 말한다. 깊은 물로 인하여 고기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어 천렵꾼이나 피서객이 몰리다 보니 인명사고가 종종 일어나며 소마다 크고 작은 전설을 가지고 있다.


■ 좌랑소(佐郞沼)는 내현리 관가평(官家平) 옆에 있는데 좌랑(佐郞) 벼슬을 한 부자가 투신(投身)하였다하여 좌랑소라고 한다.

■ 용소(龍沼)는 월리 양양교에서 용천리 방향으로 300m 정도 상부로 가면 하천변에 용머리를 한 바위가 있어 용소라고 불렸다. 지금은 59번 국도개설로 거의 없어지고 작은 암석만 남았는데 이 바위 밑이 매우 깊어 명주(明紬) 꾸리72)

■ 게바위둥지소는 가평리 뒷산 아래에 있는데 게바위둥지소 위의 산상에서는 매년 호랑이가 새끼를 쳐갔다 하는데 물살이 매우 빨리 돌며 수심이 깊어 여름철 매년 익사 사고가 발생하였다.

■ 이 밖에도 용천2교 남쪽 300m 지점의 띠기소, 용천2교 북쪽 780m 지점의 배랑소, 용천리 은벼룽산 남쪽 가둔지보밑의 은벼룽소, 송현리 고월산 아래의 또깝소, 수여리 버덩말 끝자락의 가재기소가 있었으나 하천 제방 공사로 대부분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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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朝鮮五万分一地形圖」조선총독부. 대정4년측도(大正4年測圖) 동5년제작(同5年製版).

61) 연창리 마을 앞 7번국도의 양양대교 북쪽 머리쯤이 대미소(일명 대못소)라 하였는데 산등성에는 대나무가 있고 산밑에 소(沼)가 있어 대미소(竹尾沼)가 되었다.

62) 한개목은 남대천이 끝나고 동해가 시작되는 곳을 말하며 옛 문헌에서는 황계목이라고도 하고 대포(大浦)라고도 한다. 넓은 의미에서는 남대천 하구를 뜻한다. 수군만호가 있을 때는 병선(兵船)이 있어 이곳을 통해 배둔지(船屯池)로 왕래하였다.

63) 사주, 사취 등이 만의 입구를 막아 바다와 분리되어 형성된 호소(湖沼)

64) 조선시대 동해를 방어하던 군항(軍港)을 대포영(大浦營)이라 한다.

65) 고려·조선 시대 외침 방어를 목적으로 설치된 만호부의 관직으로 통솔하여 다스리는 민호(民戶)의 수가 만호였으나 품계와 직책 등으로 변경되어 초기의 만호는 3품관, 부의 만호는 4품관이었다. 『경국대전』에 강원도의 수군만호는 4인이었다.

66) 『양양의 땅이름』양양문화원, 1995, p.76.

67) 『양양의 역사와문화』양양문화원, 2017. p.15.

68) 『양양의 땅이름』양양문화원, 1995, p.79.

69) 이종우(88) 양양학연구소 고문(顧問)의 증언

70) 기수호는 바다와 연결되어 있어, 바닷물과 민물이 섞여있는 호수, 하층은 비중이 큰 바닷물, 상층은 민물인 이중구조로 바닷고기와 민물고기가 함께 서식한다《. 국어사전》

71) 백중사리는 태양, 지구와 달의 위치가 일직선상에 있으면서(대조기) 달의 연중 최 단근지점(Perigee,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을 때이므로 연중 조차(潮差)가 가장 크다.

72) 명주(明紬) 꾸리 : 명주실을 감아 놓은 뭉치 하나가 다 들어갔다고 한다. 8·15해방 이전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