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신묘의 정체성과 복원에 대한 학술대회

1. 기록에 나타난 東海에서의 신앙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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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72회 작성일 2023-03-07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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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신라

 

신라는 東海와 南海, 그리고 北海를 관장하는 신령을 위하는 祭場을 마련하였는데, 공통적 으로 선박의 접안이 가능하고, 신라 수도인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군사 ·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설치하였다. 경주 가까이에 동해와 남해를 관장하는 해신을 위한 제장을 만들고, 北 海의 祭場은 동해안에서 가장 중요한 해상활동의 거점인 삼척 비례산에 설치하였다.

삼척 오십천 하구는 자연 항구로써, 이곳을 중심으로 울릉도와 동해안 남북으로 향하는 해상 교통망이 구축될 수 있는 결절점이기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해상 교통 중심지인 삼척을 지키지 못한다면 신라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수 있었다. 이에 삼척 비례산에 北海 祭場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례산이 구체적으로 어디인가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는데, 일단 다른 해안지역의 제장 과는 달리 山이라는 점과 삼척에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덧붙여 제사를 지낸 산이라면 신령이 좌정할 만한 공간적 특징을 지니면서, 海神을 위하는 제의를 설행할 수 있는 여건 또한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들은 비례산이 어디일 것인가에 대한 관심을 중심으로 논지를 전개하 였기에, 삼척보다 더 북쪽으로 올라간 지역을 확보하였던 신라가 왜 삼척에 북해제장을 설치 하였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필자는 바다에 제사 지낸 목적성을 고려한다면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海神을 잘 위해주어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를 위한 海神祭[龍王祭] 를 지낸 전통은 고대국가 단계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동해에서 海神[龍]을 위하는 전통과 고대 국가 단계에서 행하였을 신앙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자료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자료 1] 『삼국유사』2 기이 제2 만파식적

제 31대 신문왕의 이름은 政明이요. … 동해 바다에 작은 산이 떠서 감은사로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 왔다 갔다 합니다. 왕이 이를 이상히 여겨 日官 김춘질에게 점을 쳐 보게 하였더니. 일관이 아뢰었다.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지키고 계시고 …

 

[자료 2] 동해를 향한 ‘望海’ 기사 

*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 2, 미추이사금 3년미추이사금 3년(264)에 왕은 동쪽으로 순행하여 ‘望海’하였고 … 

*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 9, 혜공왕 12년감은사에 행차하여 望海하였다.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 11, 경문왕 4년감은사에 행차하여 望海하였다.

 

위의 기록에서 ‘望海’는 동해를 관장하는 신령에 대한 경건한 의식이다. 8) 그리고 동해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인지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신종원은 단군신화 관련 연구에서 감은사를 동해신(=용) 9) 을 모시기 위한 절이라고 하였다. 10) 즉, 동해신은 용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자료 3] 『삼국유사』 기이 2 수로부인 성덕왕대에 순정공이 강릉태수(今 溟州)로 부임차 가다가 바닷가[海汀]에서 점심을 먹었다. 곁에는 돌봉우리가 병풍처럼 바다를 두르고[臨海] 있고 높이가 천 장[丈]이나 되고 그위에 철쭉꽃이 만발해 있었다. 공의 부인 수로가 보고 좌우에 이르기를 "꽃을 꺾어다 줄 사람이 그 누구인가"라고 했다. 그러나 종자는 "사람의 발길이 이를 수 없는 곳입니다"하고 모두 할 수 없다고 했다. 이때 옆에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인이 있었는데 부인의 말을 듣고는 꽃을 꺾어 노래[歌詞]까지 지어 바쳤다. 그 노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몰랐다. 그 뒤 이틀 길을 더 가다가 또 바닷가의 정자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바다의 용이 나타나 부인을 끌고 바다로 들어가 버렸다. 공은 땅바닥에 넘어질 듯 발을 굴렀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또 다시 한 노인이 있어 말해주기를 "옛 사람의 말에 뭇 사람들의 말은 쇠도 녹인다 하니 바다 속의 용인들 어찌 뭇 사람들의 말을 두려워 않겠습니까. 마땅히 관내(管內)의백성들에게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고 바다 언덕을 지팡이로 치게 하십시오. 그러면 부인을 만나볼 수 있을 겁니다"라고 했다. 공이 그 말을 따랐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어 모시고 바다 에서 나와 바쳤다. 공이 부인에게 바다 속에서 있었던 일을 물으니 "칠보궁전에 음식은 감미롭고 기름지며 향기롭고 깨끗한 것이 인간의 연화(煙火)가 아니었습니다" 했다. 이때 부인의 옷에 배인 향기는 기이하여 세상에서 들어본 바 없는 것이었다. 수로부인은 자태와 용모가 절세로 빼어나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물(神物)에게 붙잡혀갔다.

이때 뭇 사람들이 부르던 해가(海歌)는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죄 그 얼마나 크랴, 네 만일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잡아서 구워먹으리」라고 했고 노인의 헌화가는 「자줏빛 바위 위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저 꽃 꺾어 바치오리다.」라고 했다.

 

위의 자료를 통해 당시 東海를 관장하였던 신령이 용(龍)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자료 1]은 문무왕이 동해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켜준다는 믿음을 표현한 것이고, [자료 2]는 ‘望 海’라는 용어를 통해 동해를 관장하는 신령, 즉 용에 대한 경건한 의식을 행하였음을 보여주며, [자료 3]은 바다를 관장하는 용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들 자료를 통해 당시 신라인들은 동해를 관장하는 신령으로 ‘용’을 믿었고, 이에 따라 용을 모시는 절을 짓고, 종교의례를 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11)

 

 

나. 고려

 

『高麗史』와 『高麗史節要』를 비롯하여 다양한 자료를 통해 고려시대에 바다에서 제사지냈던 전통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자료 4] 『高麗史 』雜祀條 顯宗16년 5월 以海陽道定安縣再進珊瑚樹陞南海神祀典

 

[자료 5] 『高麗史節要』

敎曰海陽道定安縣再進珊瑚樹其南海龍神宜陞祀典以奬玄功

 

위의 [자료 4, 5]의 기록은 고려시대의 海神은 自然神이 아니라 龍이라는 상서로운 동물로 형상화된 神靈이며, 특정 신령이 국가제사를 받는 祀典에 오를 수 있는 것은 바로 玄功에 의해 그 神의 神靈함이 증명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12)

 

그리고 嶽·海·瀆및 山川에 대한 제사는 다른 시대의 국가제사와는 달리 고려시대에는 中· 小祀에 등재되어 있지 않고 雜祀로 구분되어 있다. 嶽·鎭은 山嶽神인데, 嶽은 五嶽혹은 四嶽 을 말하며, 鎭은 鎭護하는 山神을 말한다. 瀆은 흔히 四瀆이라 하며, 發源하여 바다로 들어 가는 하천을 말한다. 고려의 嶽·瀆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海神은 각 방위별로 제사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로 南海神은 海陽道定安縣에서 珊瑚樹를 바친 것을 계기가 되어 현종

16년에 祀典에 올랐다. 13)

또한 이규보가 食蒸蟹라는 詩에서 게는 ‘8월에 稻芒을 東海神에게 보내야만 먹을 수 있다’고 하였다. 어부들은 게의 풍작을 위해 8월에 東海神에게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태조대의 팔관회에는 龍神이 나타나 있는데, 흔히 龍은 국가와 불법의 수호자, 혹은 水神·海神으로 나타난다. 八關은 天靈과 五嶽·名山大川·龍神등을 섬기는 것이라는 표현은 주요 神格의 순서에 따라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기에 龍神은 水神 혹은 海神으로 판단된다. 14) 위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고려시대의 海神은 自然神이 아니라 龍이라는 상서로운 동물로 형상화된 神靈이었음을 알 수 있고, 바다에서의 안전과 풍어를 위해 이들을 모셔서 제사할 때 각 방위별로 제사지냈음을 알 수 있다.

 

 

다. 조선

 

조선시대에도 국가 차원에서 東海에 제사지내기 위해 양양에 東海神廟를 설치하였고, 수토 관련 기록을 보면 海神을 위하는 제사를 지내 바다에서의 안전을 기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東海神廟 설치 

조선시대에 국가제사인 中祀를 지낸 곳 중에는 현재 양양에 설치하여 동해에 제사지낸 東 海神廟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선조 38년(1605)에 허균이 작성한 아래의 「重修東海龍王碑文」 을 통해 국가 제장인 東海神廟에서 모셨던 神靈은 龍王神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이해될 수있다.

 

[자료 6] 許筠의 惺所覆瓿藁에 실려 있는 「重修東海龍王碑文」 중 관련 내용

 … “우리나라는 사해 용왕을 위해 사당을 세우되 지리의 중앙되는 곳을 가려 설치하였 는데 강릉은 동해의 한 가운데이고, 정동이며, 더욱이 고을 한 가운데가 상개(爽塏 ; 앞이탁 트여 밝은 땅)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정동이라 이름하고 신라 때부터 이곳에서 용왕께 제사지냈다. 그런데 공희왕(恭僖王 중종) 때에 강릉부 사람으로 장원 급제한 심언경(沈彦 慶)ㆍ심언광(沈彦光) 형제가 용왕의 사당에 비용이 든다 하여 방백에게 말하여 상께 글을 올리고, 까닭없이 옮겨버렸다. 요즘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동해 용왕의 사당은 양양에 있는데 지금까지 복구되지 않고 있다. 현재의 사당 자리는 낮고 더러워 귀신의 영을 평안히 하기에는 적당치 않다.’고 하니, 귀신의 노여움도 당연하다 하겠다. 언광 형제의 몰락도 이것 때문일 것이며, 을사년 바람과 비의 변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 었다. 신이 사람에게 밝게 고한 것을 믿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미혹하기 때문이다. 부사의 사당 개수(改修)는 예에 들어맞는 처사니, 어찌 그를 덮어 둘 것인가.”

 

하고, 갖추어 기록하고 이에 송(頌)을 드린다.

 

바다는 천지 간에 / 가장 큰 것이온데

그 누가 왕이 되어 / 바람 불고 비 오게 하는가

강하고 강한 용왕신이라 / 하늘의 용은 이것 같음이 없네

복 내리고 화 내리매 / 신령스러운 응보 매우 진실코야 … 15)

 

2) 울릉도 수토 관련 기록에 나타난 海神 모신 전통 

조선전기부터 울릉도를 관리ㆍ수호하기 위해 관리를 파견하였으나 중기에 정치ㆍ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이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숙종 19년(1693) 울릉도에서 안용복 등조선 어부들과 일본 어부들 사이에 벌어진 충돌과 그 이후의 갈등으로 인해 숙종 20년 (1694)에 삼척첨사 장한상을 울릉도에 파견하여 수토하였다. 이후 수토를 공식적인 국가 정책으로 확정하여 숙종 23년(1697)과 숙종 24년(1698)에 관련 규정을 마련하여 3년마다 수토를 하였다. 16)

울릉도를 수토할 때 수토관들은 출항부터 귀항할 때까지 山祭와 海祭ㆍ船祭 등 각종 제사를 지냈음은 다음 사례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자료 7] 『日省錄』 正祖 10年(1786) 6月 4日 … 수토관(搜討官)의 차례가 된 월송 만호(越松萬戶) 김창윤(金昌胤)의 첩정(牒呈) 안에, ‘4월 19일에 평해(平海) 구미진(丘尾津)에서 바람을 살폈습니다. … 29일에 배가 출항하여 저전동(苧田洞)에 이르자 배 4척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목욕하고 산제(山祭)를 지낸 뒤에 간심(看審)하니, … 수색한 뒤 같은 날 신시에 일행이 일제히 단 위에 올라 바다 신[海神]에게 삼가 제사를 지내고, 돛을 걸고 곧 돌아왔습니다. … 17)

 

[자료 8] 『朝鮮王朝實錄』 正祖 18年(1794) 6月 3日

 … 수토관 월송 만호(越松萬戶) 한창국(韓昌國)에게 관문을 띄워 분부하였습니다. 월송 만호의 첩정(牒呈)에 ‘4월 21일 다행히도 순풍을 얻어서 식량과 반찬거리를 4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왜학(倭學) 이복상(李福祥) 및 상하 원역(員役)과 격군(格軍) 80명을 거느리고 같은 날 미시(未時)쯤에 출선하여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렀는데, 유시(酉時)에 갑자기 북풍이 일며 안개가 사방에 자욱하게 끼고, 우뢰와 함께 장대비가 쏟아졌습니다. 일시에 출발한 4 척의 배가 뿔뿔이 흩어져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는데, 만호가 정신을 차려 군복을 입고 바다에 기원한 다음 많은 식량을 물에 뿌려 해신(海神)을 먹인 뒤에 격군들을 시켜 횃불을 들어 호응케 했더니, 두 척의 배는 횃불을 들어서 대답하고 한 척의 배는 불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 이어 죽암(竹巖)·후포암(帿布巖)·공암(孔巖)·추산(錐山) 등의 여러 곳을 둘려보고 나서 통구미(桶丘尾)로 가서 산과 바다에 고사를 지낸 다음, 바람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 18)

 

[자료 9] 『承政院日記』 1767책, 정조 20年 9月 15日 기록 … 항해 중에 악풍이 불거나 고래 등을 만나면 龍食을 바다에 흩뿌리며 기도하였다. 곡물이 많이 소요되었다. … 19)

 

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울릉도에서 山神을 위하면서 海神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용왕에게 獻食한 목적은 안전한 항해와 원활한 임무 수행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이들 신령을 모셔서 제사지냈음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海神[龍王]을 위하는 의식을 설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山神을 위한 제의도 설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안전 항해를 위해 海神을 모신 사례 

조선시대에 선박을 이용하여 세금이나 구휼미를 운반한 사례들이 많다. 제주도에 다녀오거나, 동해안을 오갈 때 무사히 항해(航海)할 수 있도록 기원하기 위해 출발 전에 海神을 위한 제사를 지냈음은 많은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때 국가에서 매년 초에 향축(香祝)을 풍랑이 심한 道에 각각 보내서 감사로 하여금 해신(海神)에게 치제(致祭)하도록 하였으며, 평소 에도 배가 출항하기 전, 그리고 관동ㆍ관북을 지날 때에는 그 도의 지경에 이르러 해신(海 神)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되 향축(香祝)은 국가에서 내려 보내는 등 안전 항해를 위해 해신을 위한 제의에 많은 정성을 드렸다. 관련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자료 10] 『朝鮮王朝實錄』 英祖 18年 1月 20日

 … 동·남·북 3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해신(海神)에게 치제(致祭)하였다. 임금이 북도의 곡물 수송이 복선(覆船)되기 쉬움을 염려하여, 예조에 명하여 특별히 3도에 향축(香祝)을 보내서 감사로 하여금 정성을 다해 몸소 기도하여 무사히 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빌게 한 것이다. … 20)

 

[자료 11] 『朝鮮王朝實錄』 正祖 12年 12月 10日

… 함경도 관찰사 이숭호(李崇祜)와 위유 어사(慰諭御史) 정대용(鄭大容)이 장계하여 재해 (災害)의 형편과 백성들의 실정을 진술하고 영남의 곡식을 옮겨주기를 청하니, … 배에 곡식을 싣고 갔다가 되돌아와서 정박할 때까지는 영남 백성들을 위해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기간이니, 영백(嶺伯)에게 거듭 신칙하여 기필코 무사히 항해(航海)할 수 있도록 하라. 배가 출발할 때와 관동·관북을 지날 때에는 그 도의 지경으로 접어드는 곳에서 각각 해신(海神) 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되, 향축(香祝)은 연전의 예에 따라 서울에서 내려 보내도록 하라."

… 21)

 

[자료 12] 『朝鮮王朝實錄』 純祖 13年 10月 14日 

관북 도신 김이양이 환곡과 진제해 줄 것을 장청하다. … 비변사에서, 포항의 창곡은 원수(元數)가 넉넉잖으므로 포항과 제민(濟民) 두 창고의 곡식을 합하여 2만 3천 석을 나누어 보내지고 하면서, 이어 무신년의 예에 따라 운반을 독촉하고 배가 떠날 때 향축(香祝)을 보내어 해신(海神)에게 제사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 22)

 

위의 기록들을 통해 조선시대에 동해에서 제사지낼 때 모신 신령은 海神이었으며, 허균이 작성한 「重修東海龍王碑文」이라 쓰여진 비문 제목과 내용, 울릉도 수토관들이 항해 중에 龍 食을 바다에 흩뿌리며 기도하였다는 기록 등을 통해 海神을 용왕으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있다. 그리고 조선 정부 차원에서 구휼미나 세금을 운송할 때 향축을 내려 해신을 위한 제의를 지내게 한 사례 등으로 보아 동해에서 龍王으로도 인식된 海神을 모셔서 안전을 기원한 전통은 신라 이래 고려와 조선시대에 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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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김영하, 「신라시대 순수의 성격」, 『민족문화연구』14, 1979, 218~219쪽.

신종원, 『한국 대왕신앙의 역사와 현장』, 일지사, 2008, 164쪽.

9) 동해신은 나라와 백성을 지켜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심술을 부리므로 鎭撫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수로부인, 처용랑, 망해사 이야기를 보면 때로는 동해신(용)이 위함을 받아야 하는 신격임을 알 수 있다.

신종원, 『한국 대왕신앙의 역사와 현장』, 일지사, 2008, 164쪽.

10) 신종원, 「단군신화에 보이는 곰의 실체」, 『한국사연구』 118, 2002, 22~24쪽.

11) 김도현, 「신라의 국가 제사와 삼척」, 『이사부와 동해』12호, 한국이사부학회, 2016. 8.

12) 김철웅, 「고려시대 잡사 연구」, 고려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1.

13) 김철웅, 「고려시대 잡사 연구」, 고려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1.

14) 김철웅, 「고려시대 잡사 연구」, 고려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1.

15) 許筠, 『惺所覆瓿藁』, 「重修東海龍王碑文」 〈… 我國設四海龍祠。相度地理之中以置宇。江陵爲東海之最中。而正東尤其 邑之中。位置爽塏。故名爲正東。自新羅祭龍于是。恭僖王朝。府人沈彥慶,彥光兄弟秉魁枋。以龍祠有費於府。諷方伯 啓聞。無故移之。方纂輿地。書曰。東海在襄陽。至今未復舊。今祠地庳汚。不合妥靈。宜其神之怒也。彥光兄弟之敗。

其亦坐是。而乙巳風水之變。實可懼也。神之明告人。人不能信。吁其惑也夫。府伯之改修廟。甚合於禮。其可泯之乎。

遂備紀而係以之頌曰。海於天地。爲物甚鉅。孰王其中。以風以雨。矯矯龍神。天用莫如。降福降沴。靈應孔孚 …〉

16) 배재홍, 「조선후기 울릉도 수토제 운용의 실상」, 『대구사학』103집, 대구사학회, 2011.

17) 『日省錄』 正祖 10年(1786) 6月 4日 〈… 今年搜討官當次。越松萬戶金昌胤牒呈內。四月十九日。候風于平海丘尾津。… 二十九日。解纜到苧田洞。四船之人。沐浴山祭後看審。… 搜探後同日申時。一行齊登壇上。謹祭海神。掛帆旋歸。…〉

18) 『朝鮮王朝實錄』 正祖 18年(1794) 6月 3日〈… 故搜討官越松萬戶韓昌國處, 發關分付矣。 該萬戶牒呈: "四月二十一日, 幸 得順風, 糧饌雜物分, 載四隻船, 與倭學李福祥及上下員役、格軍八十名, 同日未時量, 到于大洋中, 則酉時, 北風猝起, 雲霧 四塞, 驟雨霹靂, 一時齊發, 四船各自分散, 莫知所向。 萬戶收拾精神, 戎服禱海, 多散糧米, 以餽海神後, 使格軍輩, 擧火應 之, 則二隻船擧火而應, 一隻船漠然無火矣 … 仍遍看竹巖、帿布巖、孔巖、錐山等諸處, 行到桶丘尾, 禱山祭海, 待風留住

…〉 

19) 『承政院日記』1767책, 正祖 20年 9月 15日. 〈… 山祭海祭船祭及遇惡風及鯨鰐也, 龍食之散, 祈禱之節, 穀物甚多入, …〉 

20) 『朝鮮王朝實錄』 英祖 18年 1月 20日 〈… 命東南北三道道臣, 致祭海神。上慮北路運穀, 易致臭載, 命禮曹別送香祝於三 道, 使道臣虔誠躬禱, 以祈利涉 …〉

21) 『朝鮮王朝實錄』 正祖 12年 12月 10日 〈… 咸鏡道觀察使李崇祜、慰諭御史鄭大容狀啓, 陳災形、民情, 請移轉嶺南穀, …

船運裝發, 至回泊間, 爲嶺民無非用慮之日, 申飭嶺伯, 期得利涉。 發船時, 關東北過涉時, 各於道內初境, 設祭海神。 香 祝, 依年前例, 令自京下送” …〉 

22) 『朝鮮王朝實錄』 純祖 13年 10月 14日 〈… 關北道臣金履陽, 狀請 … 備局以浦項倉穀元數不敷, 以浦項濟民兩倉穀合二萬 三千石劃送, 仍請依戊申例督運, 發船時送香祝, 祭海神, 從之 …〉

23) 김도현, 「동해안지역의 민간신앙 전통과 이사부」, 『이사부와 동해』11호, 한국이사부학회, 2015.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