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신묘의 정체성과 복원에 대한 학술대회

2. 모시는 神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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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48회 작성일 2023-03-07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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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이래 고려를 지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국가 차원에서 해신[용왕]을 위한 전통을 이어 받아서 동해안 지역에 거주하며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바다에서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한 다양한 제의를 설행하고 있음을 현지 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동해안지역에 소재한 마을에서 마을 전체 주민을 위하면서 바다에서의 안전 또는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주로 모시는 신령은 山神이나 城隍이다. 마을 내에 하당인 해신당이 있거나, 바닷가나 기타 장소에서 마을제의 중 바다 관련 별도의 하위 제차를 진행하는 전통이 있어 종교적 감응을 좀 더 직접적으로 부여받기 위해 모시는 신령은 海靈ㆍ海神ㆍ龍王ㆍ해서낭 등이다.

해안지역 마을에서 모시는 신령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강원도 고성을 비롯하여 속초ㆍ양양, 경상북도 영덕ㆍ포항, 그리고 울산 등에 속한 해안지역 마을에서 마을 전체의 안녕과 풍요,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기 위한 마을제의에서 주로 모셔지는 신령은 성황 또는 할아버지서낭, 할머니서낭 등으로 불리 우는 신령들이다. 이들 마을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의 종교적 염원은 소지 형태로 표출 되거나, 수 년에 한 번씩 열리는 별신굿[서낭굿 또는 풍어제]을 통해 그들의 종교적 염원을좀 더 강하게 드러내고, 이에 반응한 신앙의례가 행해진다.

위의 사례와 함께 어업을 주요 산업으로 하면서, 별도의 해신당이나 해령당이 없는 마을 에서는 마을 내 제당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위한 제의를 베풀더라도 상당신으로 산신이나 성황을 모신 사례들을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를 비롯하여 속초시 외옹치, 양양군 남애리, 울진군 오산리 등 많은 마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울릉도에서는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주로 운영하는 해신당에 해신이나 용왕과 함께 상당신으로 山神이나 洞神을 모신다. 조선 시대에 울릉도 수토에 나선 수토사들 또한 바다에서의 안전 항해를 기원하기 위해 산신에게 정성을 드린 사례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다와 닿아 있는 동해안지역 마을의 제장에서 주로 모시는 신령은 산신, 성황, 할아버지서낭, 할머니서낭으로 불리워지는 신령인 것으로 보아 내륙에 있는 마을에서 모시는 신령과 비교하여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바다에서의 안전과 풍어 등을 직접적으로 관장하는 신령으로 모셔지는 海靈은 山靈에 대비되는 용어로써 바다가 지닌 신령함 그 자체에 의탁하여 종교적 염원을 이루려고 모신 신령이다. 강릉 안인진에서 어민들이 운영하는 바닷가 제당을 ‘해령사[해령당]’, 울릉도 사동2 리 해안에 위치한 옥천마을에 어민들이 주로 운영하는 제당을 ‘해령사’라고 이르는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海神은 바다를 관장하는 지위를 지닌 신령을 이르는 표현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많은 기록에서 바다에서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모신 신령을 海神이라 하였으며, 울릉도 내수전 해신당, 태하마을 해신당에서 모신 해신, 울진군 진복 1리, 죽변 3리, 덕천리, 기성리등 동해안에 소재한 해안마을의 제당에서 해신을 모신 사례들은 매우 많다. 즉, 바다를 관장 하는 지위를 부여 받은 신령인 해신에게 기대어 바다에서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주로 모신다.

울릉도 지역 마을신앙을 조사ㆍ분석한 글을 보면 대부분 ‘海神’을 ‘龍王’과 동일하게 인식 하면서 ‘海神’이라는 표현은 우리나라에서 울릉도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울릉도의 동제는 토지생태계를 중심으로 한 산신당 유형과 해양생태계를 중심으로한 해신당의 유형으로 구분하여 ‘해신당’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인식이 매우 강하게 표출 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난 이유 중의 하나가 일본의 영향이라는 주장들이 있다.

1900년 이후 일본 어부들이 울릉도에 많이 진출하였고, 이에 따라 울릉도에서의 어업 활동이 활발하여 자연스럽게 바다에서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모신 海神에 대한 의례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독단적으로 일본의 영향으로만 한정 짓는 것은 매우 우려스럽다.

다음 2가지 사례를 통해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역사적으로 海神에 대한 인식이 있었음을알 수 있다.

 

[자료 13] 海神 관련 자료

 

① 北郊祈雨諸海神祭文 24)

② 海行摠載 25)

③ 祭海神文 南玉撰 26)

④ 耽羅船粟時祭南海神文 27) (『홍재전서』 23 제문 5)

 

[사례 분석 1] 일본의 해신제사 유적과 부안 죽막동 유적 비교 검토 28)

 

일본의 해신제사 유적은 바다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모두 해안이나 섬에 위치하고 있다.

해안 중에서도 돌출된 岬이나 砂丘, 丘陵, 山斜面에 위치하며, 섬의 경우에는 산정상이나 山 斜面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유적의 입지가 다양한 면을 띠고 있지만 모두 바다의 조망이 유리한 지점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와 같은 일본 제사 유적의 입지는 기본적으로 바다의 조망이 유리한 곳에 제장을 건립 하였다는 점에서 부안 죽막동유적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양국의 해신제사가 유사한 양상을 보이는 것은 공동의 바다를 해상 교섭 수단이면서, 경제적으로 이용하였기에 부단하게 해상 교류를 진행시켜왔고, 한편으로는 동일한 어로문화나 해양 신앙을 배경으로 유사한 神 관념이 발전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울릉도 海神과 海神堂을 이해함에 있어 1900년 이후 일본인의 진출로만 규정지을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변화에 따른 자연스런 변화로 보아야 하며, 일본인들이 神社 를 만들어 여기서 ‘海神’만을 위하였다는 경직된 생각 또한 변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 인들의 공동체 신앙의 전통을 보면 우리가 山神을 상당신으로 모시듯이 그들 또한 우리와는 다른 상당신을 모신 후 해신을 위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구조적인 이해와 그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9)

 

용왕은 신라 이래 고려ㆍ조선을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해안지역 마을에서 바다에서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모셔지는 신령이다. 삼척시 근덕면 덕산리 마을 제당에서 모시는 신령 중 주신인 성황신을 협시하는 형태로 모셔진 용왕, 울진 죽변ㆍ영덕 구계리를 비롯하여 다수의 해안 마을 제의 중 하당제인 용왕제에서 모셔진 용왕이 이에 해당한다. 해신을 용왕으로 여긴 사례들도 많기에 바다에서의 용왕제에서 모신 용왕이 지닌 종교적 기능은 위에서 소개한 해신과 유사한 종교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해안지역 마을에서는 위에서 소개한 신령 이외에도 수부나 성주를 모신 사례들도 있는데, 이는 해안지역 마을을 특정하는 신령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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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북교단(北郊壇)에서 여러 해신(海神)에게 고하는 기우제문 

25) 해사일기 제문 고려말과 조선시대의 일본 통신사들의 일기와 포로 및 표류 등으로 일본을 왕래한 사람들의 기행록을 모은 총서.4책.

활자양장본. 1914년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간행한 조선군서대계(朝鮮群書大系) 속속편(續續篇) 제3~6집에 실려 있다. 서문과 발문 없이 20여 편의 저술이 수록되어 있다.수록된 내용을 보면, 제1책에 정몽주(鄭夢周)의 <봉사시작 奉使時作>,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 海東諸國記>, 김성일(金誠一)의 <해사록 海{錄>, 강항(姜沆)의 <간양록 看羊錄>, 제2책에는 경섬(慶暹)의 <해사록>, 오윤겸(吳允謙)의 <동사상일록 東上日錄>, 이경직(李景稷)의 <부상록

扶桑錄>, 임광(任 )의 <병자일본일기 丙子日本日記>, 이선달(李先達)의 <표주록 漂舟錄>, 김세렴(金世濂)의 <해사록> (상), 제3책에는 김세렴의 <해사록>(하), 황호(黃 )의 <동사록 東 錄>, 신유(申濡)의 <해상록 海上錄>, 작자 미상의 <계미년동사일기 癸未年東日記>, 남용익(南龍翼)의 <부상록>, 제4책에는 홍역사(洪譯士)의 <동사록>, 김지남(金指南)의 <동사일록>, 조엄(趙 )의 <해사일기 海 日記> 등이 실려 있다. 대부분 일기형식의 산문과 시로 되어 있다. 정몽 주의 <봉사시작>은 일본 사행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며, 1377년(우왕 3) 9월에 출발하여 이듬해 7월에 돌아오면서 쓴시이다. 일본의 실정을 알려주는 내용의 시 12수이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 김성일의 <해사록>, 이경직의 <부상록>, 김세렴의 <해사록>, 황호의 <동사록>, 김지남의 <동사일록> 등은 대부분 사행일기이며, 일본의 문물제도, 일본인 과의 대화, 견문, 사행길의 감회 등을 기록했다. 강항의 <간양록>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서 4년 동안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국해서 쓴 기행문이며, 이선달(李先達)의 <표주록 漂舟錄>은 일본 홋카이도[北海道]까지 표류하다가 일본 관원 들에게 구조되어 귀국한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인들이 일본을 보는 시각 및 일본인들이 조선을 보는 시각, 일본의 문물제도 등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된다. 1974년 민족문화추진회에 의해 국역되었다. 한편 작자·연대 미상의 <해행총재>(28책)가 전하는데, 수록된 저술이 조선고서간행회 편의 이 책과 큰 차이가 없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26) 해신(海神)에게 제사한 글 [남옥(南玉) 지음] 

27) 탐라(耽羅)로 보낼 곡식을 배에 실을 때 남해신(南海神)에게 제사한 글 

28) 유병하, 「부안 죽막동유적의 海神과 제사」,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7.

29) 이와 관련하여 일본 내 공동체 신앙 또는 개인 신앙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며, 이를 통해 울릉도 마을신앙의 성격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